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민족의 정체성

우리는 질곡의 역사를 살아왔다. 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주권을 잃고 식민지로 수십 년을 살았으며, 동족끼리 총부리를 겨누고 살육했던 한국전쟁, 다시 독재정권 안에서 신음했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근 100여년은 자존을 버리고, 혈육을 버리며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시간이었다.

가까운 50여년을 뒤돌아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전쟁과 독재와 인권유린과 속임수와 반칙과 항쟁과 희망과 풍요 따위의 역동적인 세월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내며 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국민의 몸속에는 수많은 지식과 경험이 쌓였다.

나는 이것을 우리 민족의 저력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제 위정자의 거짓말도, 감언이설도, 헛된 희망도 몸으로 감지하는 능력을 가졌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국민을 대변한다는 지식인이나 정치인 혹은 사회지도층이 헛다리를 짚는 경우가 훨씬 많다.

또한 최근 들어서 언론사의 여론조사는 이상하게 틀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최신 장비와 첨단기법을 이용한다는 유수의 여론조사 기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위정자가 국민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교묘히 정치인을 속이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국민이 정치와 경제, 문화를 강제하고 조절, 통제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이것은 큰 흐름이다.
정치권의 과거사규명문제나 혹은 중국의 ‘동북공정’ 문제로 나라가 들끓는다. 여기에 북한의 핵문제, 탈북자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따위가 여러 갈래로 얽혀있다. 나는 이것을 ‘민족 정체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은 아주 원초적이다. 원래 사람이나 사회는 자기 합리성을 추구한다. 부모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자식의 미래가 달라지고, 태어난 자리와 살아가는 과정이 합당해야 긍정적인 꿈을 꾼다.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성이 없는 사람은 폭력과 위선과 기만이 얼룩진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누구나 새로운 것을 열거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고 하면 과거를 정리한다. 잘못된 과거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독재자에 무릎을 꿇었고, 자신의 양심에 충실하지 못했다. 비겁했으며, 돈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아픔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빌붙어 자존심과 민족과 혈육을 팔았다. 자신의 전통을 버리고, 자신의 부모를 배반하면서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우리의 것을 되찾고 자존을 회복하며 우리의 미래와 운명을 개척해 나갈 자신이 생긴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대한 시민의 힘이 있고, 맹렬한 붉은악마가 있으며, 세상을 볼 수 있는 인터넷과 역동적인 청년과 똘망똘망한 눈빛의 젊은 아줌마와 여성들이 있다.

이제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할 때가 되었다. 과거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정신과 의사가 정신병을 치료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픈 과거지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야 한다. 설사 상처가 재발하고, 뼈 속 깊은 곳까지 울리는 고통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있는 그대로가 드러나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

친일을 하고, 독재에 부역하며, 양심을 팔았던 모든 행위는 모두 드러내야 한다. 이것을 방해하거나 물타기를 하는 세력은 미래를 열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미래가 없는 세력은 과거의 무덤 속에 묻어버려야 한다.

온전한 과거의 청산과 치유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 비굴하고 암울했던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는 경험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불어 넣는다. 정체성이 확고한 민족이나 사회는 긍정적이며 낙관적이다. 또한 생각이 다른 사람도 이해하며 포용한다. 연대할 줄 알며, 지혜와 힘을 모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

통일을 가로막는 것은 언제나 친일파와,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압살했던 세력이었다. 민족의 통일은 대단한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 시작점은 아픈 과거를 청산하고 치유하는 일부터다.

민족의 영물

▶최명식/범/유화
호랑이는 비겁하지 않다. 당당히 자신의 영토를 지키며 자식을 강하게 키운다.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며, 민중과 가깝게 호흡해온 영물이다. 호랑이는 우리의 풍류사상과 맞닿아 있으며, 우리 국토를 상징한다. 민화에 숱하게 등장하는 호랑이는 귀엽거나 앙증맞은 모습으로 민중의 생활을 담고 있다. 88올림픽의 상징으로 쓰였으며, 가정의 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벽사의 역할도 했다.

우리 그림 속에 호랑이는 무섭지 않다. 신선처럼 보이거나 약간은 웃기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끔 달빛과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포효하는 호랑이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의 호랑이를 그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본풍이다. 우리나라 80년대 판화작품 중에서 이런 호랑이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호랑이 모습이 있고, 그 머리 위에는 대머리 독수리가 발톱으로 짓누르며, 뒷발에는 일본족쇄가 채워져 있는 형상이었다.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이번에는 북한화가 최명식이 유화로 그린 <범>을 소개한다. 아주 세밀한 붓질로 그린 이 작품은 유화의 깊은 맛과 어울러져 단단한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림 속의 호랑이는 무섭지 않다. 한 쌍으로 보이는 호랑이는 서로를 핥아 주며 친근감을 보인다. 배경은 숲이 깊게 우거진 곳이다. 아마도 백두산의 깊은 어디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호랑이는 백두산 호랑이인 셈이다.

북한 화가가 그린 호랑이 그림이라서 도끼눈을 뜨고 유심히 보았다. 혹 작품 속에 미묘한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지 않나 해서 말이다. 선군정치? 강해야 산다? 김일성 부자? 보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는 다른 의도로 읽힐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버하지 말자. 이 작품은 그냥 호랑이 그림으로 보는 것이 훨씬 매력적이다.

우리나라 태백산 어디쯤에서 호랑이를 봤다는 제보가 있고, 실제 호랑이를 찾아다니는 사람과 모임도 있다. 또한 백두산 호랑이를 되살리고 번식시키기 위한 노력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호랑이가 태백산 일대에 서식한다면 위험할 지도 모른다. 사람을 상하게 하거나 가축을 위협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호랑이가 살아있기를 바란다.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누구나 알고 있다. 마음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그 어떤 끈끈한 고리를 말이다.

우리에게는 강인하면서도 부드러운 상징이 필요하다. 이런 상징은 서로가 서로를 묶어주고 연결시키는 고리 역할을 한다. 남북한 모두에게 호랑이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자 매개이다. 언제가 호랑이는 통일된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영물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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