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에서 피살된 김선일씨 사건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주지 못할 때 국민이 느끼는 배신감과 절망감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더구나 KAL858기 실종사건과 같은 해인 1987년에 발생한 수지킴 사건은 국가 정보기관이 사건을 조작하고 15년 동안이나 온 국민을 철저히 기만했다는 점에서 큰 충격을 안겨줬다.

1987년 115명의 승객을 태우고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858기가 사라졌고, 당시 안기부는 북한 공작원 김현희와 김승일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폭파시켰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7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정부의 이같은 발표를 믿을 수 없다며 끊임없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며, 그 앞장에는 늘 피해자 가족들이 서 있다.

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피해자 가족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지 못하고 부스락 소리만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 사라진 가족들이 되돌아 올 것만 같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피해자의 시신이나 유품 한 점 발견할 수 없었던 미제의 ‘실종사건’일 뿐만 아니라 사건 발생부터 지금까지 의혹이 날로 커져만 가는 ‘의혹사건’으로 전면 재조사가 이뤄져 진상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할 사안임이 분명하다.

다행히 최근 들어 KAL858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방송 3사가 모두 이 사건의 의혹을 제기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했고, 이 사건을 다룬 소설과 조사보고서 등이 속속 발간되고 있다.

이 시점에 국회에서는 대통령 직속기관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범위를 넓혀 이 사건을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가 이같은 뜻을 공개적으로 밝혀 기대감을 더해주고 있다.

이에 따라 그간 침묵과 외면, 법적 대응으로 일관해오던 국정원에서도 법적 근거를 갖고 재조사가 추진된다면 이에 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늦었지만 다행이며,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간 국정원의 입장과 태도를 보면 그것이 결코 진상규명에 대한 능동적 수용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KAL858기 가족회’와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시민대책위’가 요청한 자료제출과 공개토론을 철저히 외면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상규명을 위해 발간된 소설과 책자에 대해 엄청난 금액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는 등 진상규명 움직임에 제동을 걸어왔다.

이제 KAL858기 사건이 ‘큰 침묵의 바다’를 건너 만인 앞에 공개적으로 재조명될 것으로 보인다.

어렵게 마련될 재조사는 국정원이든 국회든 결코 사건의 의혹을 감추거나 무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제대로 밝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국가가 수많은 무고한 국민의 죽음에 대해 침묵하거나 호도하려 할 때 국민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정부와 국정원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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