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반전과 미술

무고한 대한민국 시민 한 사람이 단지 대한민국의 국민이란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것도 멀리 이라크에서 말이다. 우리 사회는 온통 반전과 파병반대, 혹은 파병찬성이라는 극한적인 분열 상황을 겪고 있다.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놓고 이렇게 엇갈리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뭘까? 이 죽음은 충분히 예견되어 있었다. 미국이 자국의 추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도 알고 있고, 거기에 무고한 이라크 국민들이 죽어간 사실도 알고 있다.

이미 한국은 파병을 한 사실도, 이라크 저항세력이 외국인을 공격하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의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반증인가? 죽음은 그 자체로서 완결성을 가진다. 어떤 정치적인 계산이나 이익이 죽음에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의 죽음과 아무 관계없이 전쟁은 잘못된 것이다. 미국이 저질러 놓은 더러운 전쟁에 함께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진리이고 아름다움이다.

과연 진보가 뭘까? 진보는 사랑이고, 인간이며, 자연이고 환경이며 생명이다. 상생이며 홍익인간이며 하늘과 땅이다. 진보는 보수의 반대편 말이 아니다. 진보는 그 자체이다. 어느 것과도 비교를 거부한다. 진보는 그 자체로서 진행형이다. 완결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진보와 평화와 반전을 부르짖는 것은 현실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언제나 냉혹하고 슬프다.

지금은 성자와 지도자의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대중의 시대이다. 성자가 저 높은 곳에서 진리를 말하면 대중은 수동적이 된다. 지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여 끌고 가는 것도 대중을 소외시킨다. 대중과 같이 먹고, 대중과 같이 생활하면서, 대중을 설득하고 공감하고자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미술은 본성상 진보적이다. 평화를 추구하며 아름다움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의 진보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내가 표현하는 세상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다. 설사 그것이 먼 미래의 이야기라 할지라도 말이다.

세상이 힘들고 삶이 고단할수록 꿈은 커지게 마련이다. 미술작품 속에는 돈과 권력과 전쟁과 허위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것은 금방 들통이 난다. 미술은 눈으로 쉽게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 그리기는 현실과 부단한 싸움을 벌인다. 현실의 욕망이 이기면 그림 그리기는 고통으로 바뀐다. 반대로 그림 속의 환상으로 도피하면 현실 소외라는 가혹은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하나를 선택한다. 예술을 멀리하고 지독한 현실을 살거나 속세를 멀리하고 그림 속에 은둔하거나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아니 어떤 사람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꿈을 포기한 자가 행복하던가? 아니면 현실을 포기한 자가 아름답던가?

내가 지긋지긋한 이 현실을 벗어나 시골로, 작품으로 도망가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어떤 미학자의 말 때문이었다.

‘진정한 예술가는 꿈과 현실을 결합시키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이다’


백두산을 보고 싶다

백두산이 보고 싶었다.
민족의 정기와 기상이 서려 있는 곳.
눈보라와 비바람이 치는 곳.
무한한 삶의 욕구가 솟구치는 곳...
내 조상의 얼이 있는 곳.
내 형제의 피와 눈물과 꿈이 있는 곳. 내 피의 원천.
한반도를 아우르고 멀리 만주와 대륙으로 내달리는 곳.
일년 내내 슬퍼서 우는 곳.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곳.
내가 울면 너도 우는 곳.
그 백두산이 보고 싶었다.
오늘 같은 날.<*>

▶백두산/김명운/유화/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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