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4년 6월 이른바 제 1차 한반도 핵위기 때 클린턴 행정부는 평안북도 영변일대의 북 핵시설을 정밀타격하는 방안을 검토했다가 실행 일보 직전에 취소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왜 폭격을 취소했는지에 대해서는 미측으로부터 공식적인 설명이 나오지않았다. 클린턴 자서전에는 당시 긴박했던 막전막후의 상황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미 최고통수권자로서는 처음으로 당시 상황을 언급한 것이어서 현재진행 중인 제 2차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도 주목을 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1994년 3월 하순 북한의 심각한 핵위기가 시작됐다...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3월 30일 언론에 말한 대로 나는 전쟁을 불사하고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켜야 한다고 결심했다...북한 사태는 그 후에도 악화돼 북한은 5월 사찰단의 활동을 막은 채 원자로에서 핵연료를 빼냈다...6월 1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 방문 용의를 밝혔다. 나는 앨 고어 부통령 및 국가안보팀과 협의 후 시도해 볼 만하다고 결정했다. 그에 3주 앞서 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양측이 입을 막대한 피해 규모에 관해 정신이 번쩍 드는 보고를 받았었다..."고 밝혔다.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해 김일성 북한 주석과 핵문제 해결을 위한 타협을 보기 전 클린턴 대통령은 '정신이 번쩍 드는 보고'를 받았었고 이미 그 때부터 영변 폭격계획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자서전은 '정신이 번쩍드는 보고'에 대해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99년 10월 미국의 CNN 방송이 94년 당시 미 국무부 특사였던 로버트 갈루치와 국방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 정부는 평북 영변의 한 작은 원자로를 폭격하기 위해 크루즈 미사일 발사와 F-117 스텔스 전투기 폭격을 계획했다.
이 폭격이 북한 당국을 자극해 "(미국 정부는) 100만명이 희생될 것으로 예상되는 전쟁을 불러 오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CNN은 보도했다.
CNN은 영변 폭격이 불러 올 북한 당국의 대응 등을 둘러싸고 클린턴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에서 심각한 논의가 벌어졌고 폭격 취소로 결론이 났다고 전했다.
백악관에서 긴장된 순간에 대해 CNN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994년 6월 15일, 백악관에서의 긴장된 순간. 페리 국방장관과 존 셸리캐슈빌리 합참의장이 클린턴 대통령과 고위관료들에게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3만7천명의 주한미군을 실질적으로 보강하는 세 가지 방안에 대한 브리핑이었다. 펜타곤은 '중간안'을 주장했다. 병력 1만명을 증파하고 F-117 스텔스기를 발진시키며 장거리 폭격기와 함께 항공모함을 한반도 또는 그 부근에 추가배치하는 방안이었다.
페리는 '하루면 한국에 주요 병력을 추가배치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 민간인을 소개하기 직전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진짜 우려는 북한이 병력증파와 민간인 소개를 공격이 임박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한국을 선제침공할 가능성이었다. 미국의 한 분석가는 북한이 지난 91년 걸프전에서 배운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는데 미군에게 병력을 집결할 시간을 주지말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페리 장관은 당시 클린턴에게 제시된 방안 모두가 입맛에 꼭 맞는 것들은 아니지만 어느 것이든 피해가 막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갈루치는 '내 기억으로는 대통령이 (세 가지 방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고 선택하기 직전에 평양에 가 있던 카터 전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왔다. 방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에 그 전화 벨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나하고 통화하기를 원했다'고 회상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사적인 시민의 입장에서 북한의 김일성과 회담을 하다가 돌파구가 마련되자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백악관 모임은 끝이 났고 관료들은 최근의 진전상황을 CNN에 전화로 알려주는 카터 전 대통령의 모습을 TV에서 지켜봤다.
카터 전 대통령은 94년 6월 15일 '김일성의 약속은 정말 중요한 것으로 평가한다'고 말했다. 며칠 후 북한은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신 핵폭탄 제조용 플루토늄을 생산해내지 않는 새로운 원자로 건설과 더불어 그에 따른 중유공급을 약속받았다.
북한의 공격을 퇴치한다는 미국의 '작전계획 5027'은 가동 일보직전에 취소됐다. 한 소식통은 미국이 북한과 전쟁에 돌입할 경우 일본의 기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합의가 포함된 계획이 면밀히 검토된 바 있다고 전했다."
페리 당시 국방장관은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피해가 막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클린턴 대통령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볼 때 상호 판단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이번 자서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자서전은 영변폭격 중단에 대한 김영삼 당시 한국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99년 10월 19일자 일본 요미우리 신문과 회견에서 클린턴 대통령에게 북한을 공격하지 말도록 설득했다며 "내가 설득하지 않았다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