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희병(여중생범대위 사무국장)


▶2002년 12월 14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국민주권 회복의 날`  행사가 열렸다.
사진은 참석자들이 대형 성조기를 찢고 있는 모습. [사진 - 통일뉴스 송정미기자]

1. 미군 장갑차 두 여중생 살인사건

2002년 6월 13일, 친구 생일잔치를 가던 신효순.심미선 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54톤 장갑차에 깔린 두 여중생은 전신 뼈마디가 으깨어지고 뇌수가 터진채로 참혹하게 죽어갔다. 여기에 분노한 150여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6월 26일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하고 '진상규명, 살인미군처벌, SOFA전면개정, 부시사과'의 요구를 가지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언론과 방송은 이 참혹한 사건이 나자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단신으로 보도했을 뿐이다.

"진상을 밝히라"는 유족과 한국민의 요구에 대해 미군들은 "시야제한과 통신장애로 사고가 났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장갑차 전문병들은 "전방 30m를 볼 수 없는 장갑차란 존재할 수 없다"고 증언했고, 이미 가해미군(운전병 워커마크)은 스스로 "갓길의 소녀를 보았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미군의 주장대로 장갑차가 시속 8~16km로 이동중인 상황에서 두 여중생을 3m가량 나란히 깔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증언이다. 8~16km 이동시 50톤 장갑차 마찰계수는 '0'에 가깝기 때문에 급제동하였다면 적어도 앞쪽의 효순이만큼은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폐에만 여념이 없는 오만한 미군은 형사재판권 이양을 끝끝내 거부하더니 결국은 공범이 공범을 재판하는 해괴한 미군재판정에서 살인자들에게 무죄를 평결하였고 살인미군은 본국으로 돌아갔다.

월드컵으로 뜨거웠던 광화문을 비롯하여 전국해외로 무죄평결에 분노하여 촛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전세계 언론은 '분노와 감동의 촛불바다, 미대사관을 포위하다'라고 보도했다. 이렇게 타오른 자주평화 촛불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촛불시위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친미보수세력의 여론 호도에도, 정부의 촛불시위 탄압과 여중생범대위 관계자에 대한 구속이 이어졌어도 촛불행진을 420여 차례를 넘게 이어왔다.

2. 우리들의 분노, 투쟁 그리고 2년간의 기록

1) '민중의 소리' 기자 집단 폭행후 연행

사건이 벌어진 당시는 월드컵이 한창 이었다. 월드컵 열기와 미군의 4억원의 보상금 제안, 추모비 건립 부대원 모금, 미군사령관이 사과성명 등의 기만적인 조치로 사건이 금방 파묻혀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6월 26일, 규탄집회에서 200여명 여고생들의 참여와 인터넷방송국 '민중의 소리' 기자 2명이 미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투쟁은 곧바로 공중파를 타고 일거에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야만적인 미군은 기자 두 명을 '케이블 타이'(cable tie)라고 하는, 야생동물 포획용으로 쓰는 강철보다 단단하고 움직일수록 더 죄는 플라스틱 수갑으로 묶은 채 몇 시간 동안 화장실 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고 비인간적인 구타와 폭행, 신문을 자행했다. 이때 얻어맞으며 묵비권을 고수하던 기자 중 한 사람이 목에 기브스를 하고 팔목이 퉁퉁부은 모습으로 언론의 집중취재를 받고 저녁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면서 국민들의 분노가 달아올랐다.

오만하고 뻔뻔한 미군이 아침방송 전화인터뷰에서 기자 폭행사실은 물론, 연행한 사실조차 부인하는 거짓말로 일관하면서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분노하는 여론이 빗발치자 재판부는 기자 두 명의 구속영장을 기각하고 석방하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여중생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2) 넉달만에 100만 서명 돌파!

한국언론과 방송은 여중생 투쟁이 살인미군의 무죄평결후에 우연히 촛불시위가 벌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중생 사건이 벌어지고 전국해외 각양각지에서 대책위를 구성하고 '진상규명, 살인미군처벌, SOFA전면개정, 부시사죄'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폭발적으로 진행했다. 이와 더불어 촛불시위 전까지 항의규탄범국민대회를 8차례나 진행하였고, 49재 추모제, 9.14 문화제에 1만명이 참여하였다. 또한 청소년 행동의 날 3차례, 대학생 행동의 날 5차례, 노동자 행동의 날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투쟁이 수십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서명운동은 가히 폭발적으로 벌어졌다. 고사리손 어린아이부터 주름 가득한 할아버지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미군범죄 사진전, 여중생사건 비디오 상영, 서명운동 가판대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참여했다. 전국해외 주요도시와 인터넷에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과 대학교, 노동현장과 일반회사, 교회와 성당 등 가리지 않고 서명운동이 진행되었다. 마침내 서명운동 시작 넉달만인 10월 30일 역사적인 100만 서명을 돌파했다. 

3) 그들만의 재판과 처절했던 5일간의 투쟁

2002년 9월 24일 첫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해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자, 미군은 "다음 열리는 (11월 18일, 21일)재판은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진행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여중생 범대위는 재판방청을 위해 소속단체에 방청신청을 받아 미군측에 전달했으나, 미군측에서는 장소협소를 들어 제출한 500명에 대해 '불가'방침을 내렸다.

뒤늦게 2명만 방청을 허용한다던 미군측은 당시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의 방청마저 거부한채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이 모두 미군으로 공범이 공범을 재판하는 한국민을 우롱하고 기만하는 재판을 진행했다. 방청객으로 법무부와 외교통상부에서 각 1명씩 나와 재판과정을 참관했다. 한국정부 관리의 말이 가관이었다. "비교적 공정하게 재판이 진행되었다"는 것이었다.

영하의 강추위속에서 참가자들의 투쟁은 격렬하게 밤늦게까지 진행되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동두천 시민들까지 "너희들이 한국경찰이냐? 미국 놈의 경찰이지!"라며 경찰의 폭력만행에 분노했다. 부상자가 속출했고 머리와 얼굴이 깨지고 경찰의 집단폭행에 뇌진탕, 실신자들이 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다. 기만적인 미군재판이 진행되는 5일간의 처절했던 동두천 캠프케이시 미군부대 앞의 투쟁은 범국민적 촛불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4) 촛불바다가 미대사관을 포위하다.

무죄평결후 항의, 규탄의 글이 홈페이지에서 넘쳐났고 상황실 전화가 불이 날 정도였다. 상황실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죄송합니다. 학교 다닐때 미군철수 주장하는 사람들 욕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의 심정을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미군놈들 인간도 아닙니다. 나도 딸아이가 있는데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자랑스럽습니다"라고 말하고 30대 주부라며 울먹였다.

여중생범대위는 11월 26일부터 '매일 6시 종로로 모이자'는 결정을 하고 촛불을 들고 국민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촛불들고 광화문에서 모이자, 월드컵에서 보여준 한국민의 힘을 다시한번 보여주자, 여기는 00인데 데모 안하냐, 미국상품 불매운동하자...."는 투쟁 호소, 제안 등이 쏟아지며 술렁거렸다.

마침내 11월 30일, 2만의 네티즌, 시민들이 모여 분노와 눈물과 감동의 물결을 만들었다. 어느 참가자의 분노와 호소이다.

"여러분!!! 우리는 미국의 식민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나라 대한민국의 주인입니다. 우리가 왜 이방인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합니까? 우리...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을... 이렇게  이렇게... 그냥 억울하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여동생 효순이와 미선이가 하늘에서 보고 있습니다. 눈도 감지 못한채... 하늘에서 울고 있습니다. 우린 그랬죠. 무슨 사건이 일어나면 그 때만 잠깐 번뜻~ 시끄러웠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기억의 저편으로 흘려 보냈죠. 우리 이번엔 그러지 맙시다~~ 우리 이번엔!! 꼭!!! 꼭~~~ 우리의 힘을 보여 줍시다!!"

청소년, 대학생, 여성, 노동자, 장애인, 문화예술인, 종교인, 교수, 교사 등 각계각층 행동의 날이 이어졌다. 12월 7일, 미군주둔 57년만에 역사상 처음으로 경찰들의 저지선을 뚫고 성난 시위대가 미대사관 앞으로 진출했다. 12월 14일, '주권회복의 날' 전국해외 100여곳에서 50만이 운집한 가운데 성조기가 찢겨지고 태극기가 올랐다. 12월 21일, 28일 미대사관 주위로 촛불 인간띠잇기가 성사되고 12월 31일, '2003 자주평화의 해'를 선포했다.

5) 방미투쟁

여중생범대위는 '여중생투쟁을 일상화, 전국화, 국제화하자'는 기치를 들고 투쟁했다. 한국민의 목소리를 '130만 서명용지'의 전달을 통해 백악관에 직접 전달하고 여중생투쟁의 국제화를 실현하기 위해 '2002 여중생 범대위 방미 투쟁단'이 조직되어 출국했다. 많은 언론과 방송에서, 심지어 참여단체에서 "정말 백악관 가느냐?"라는 의구심을 갖는 질문을 많이 했다. 여중생범대위는 방미투쟁을 통해 여중생사건에 대한 국제 여론의 환기, 국제연대 활성화, 국내투쟁을 활성화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6) 촛불로 파병, 전쟁막자!

2003년 3월 20일, 야만적이고 부도덕한 미국은 UN을 비롯한 전 세계가 반대하는 이라크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효순이.미선이의 촛불은 반전평화의 촛불로 타오르고 세계 각지에로 퍼져갔다. 광화문은 이라크인을 비롯한 수많은 외국인과 해외 평화애호단체에서 방문해서 효순이.미선이를 추모하고 반전평화의 목소리를 높였다. 광화문은 연일 해외 기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광화문은 자주평화의 상징, 세계인의 명소, 반전평화의 진원지로 되었던 것이다.

2003년 정세는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라는 전쟁위기가 고조되었다. 미국은 독수리 훈련 등을 이유로 한반도 주변에 배치된 신무기들과 항공모함이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말로는 대화로 풀겠다고 했지만 한반도 주변에서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북에 대한 압박은 결국 전쟁준비와 다를 바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를 통한 한미정상회담은 한반도 전쟁위기를 더욱 부채질하고 있었다.

효순이.미선이 1주기 추모대회를 맞이해서 반전평화와 파병반대투쟁으로 이어진 촛불은 한반도 전쟁반대 촛불로 다시 폭발했다. 한달새 20만명이 넘게 준비위원으로 참가했고 서울 시청광장을 비롯한 세계 100여곳에서 자주평화의 촛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노무현 대통령의 '촛불자제' 발언과 기만적인 SOFA 운용개선안 발표, 이례적인 국무총리 담화까지 발표된 상황에서 폭발한 촛불은 자주평화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대세라는 확신이 되었다.

7) 숫자로 보는 촛불시위

- 422차례 촛불행진 : 연인원 500만명 참가
- 한미SOFA개정 서명운동 참가자 : 200만이상 참가
- 6.13 추모대회 준비위원 수 : 20만명이상 참가
- 전국해외 동시다발 촛불시위 : 총8회, 100여곳에서 진행
(12 월7일/ 12월14일/ 12월21일/ 12월28일/ 12월21/ 1월25일/ 3월1일/ 6월13일)
- 여중생 사건사진 104종 사진세트 배포 : 1,500세트
- 홍보선전용 비디오 배포 : 1,000개
- 미국바로알기 10종 포스터 : 670세트
- 촛불시위 구속자 : 3명 (촛불시위 불구속자 : 3명, 체포영장 발부자 : 5명, 소환장 발부자 : 22명)
- 수상경력 : KNCC인권상, 사월혁명상, 아름다운 재단 후원
- 2002년 오늘의 인물 수상 : 문정현, 한상렬 여중생범대위 상임공동대표

3. 촛불행진의 성과

1) 자주평화 의식 고양

미군 장갑차에 의해 끔찍하게 희생된 효순이.미선이의 추모, 오만하고 뻔뻔한 무죄평결에 대한 분노로 촛불시위가 확산되었다. 더불어 불평등한 한미 SOFA 전면개정 요구가 자연스럽게 모아졌다. 여중생투쟁과 촛불시위는 국민의식의 급격한 전환을 가져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2003년 1주기를 맞이하여 다음 포탈사이트에서 SOFA 개정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여론조사 직전에 두 차례에 걸쳐 한미합동위에서 기만적이고 미봉책에 불과한 'SOFA 운용개선안'을 발표했지만, '현행 한미 SOFA는 불평등하므로 전면개정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여론이 무려 92%였다.

효순.미선 1주기를 앞두고 모 신문사의 기자가 상황실을 방문했다. 그 기자는 미국정보기관에서 부시와 미국에 대해 각국을 대상으로 의식조사를 했다는 정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며 다른 나라에서는 부시를 반대하는 여론이 평균 70%인데 비해 한국은 미국을 반대하는 국민여론이 70%라는 결과를 놓고 미정보기관은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과를 놓고 일시적인 것이냐 아니냐를 놓고 자기들끼리 갑론을박한다는 말을 그 기자는 덧붙였다.

이 정보는 2002년 어느 중앙언론에서 8.15를 맞이해서 실시한 여론조사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는데 동의하는 국민의 비율이 71%가 넘게 나온 것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치는 여중생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결과이다. 이러한 지표는 한국사회의 급변하는 흐름을 말해주는 것이며 자주평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2) 반미운동의 대중화, 일상화

촛불시위가 거세게 일어나던 2002년 12월, 기발하고 다양한 대중운동방식을 선보였다. 미군을 상대하는 업소에서 미군출입금지가 나붙었고 자동차 동우회 모임에서는 미대사관 앞 경적시위와 함께 사고현장까지 자동차 시위를 벌였다. 미대사관으로 '낡은 소파'를 전달하는가 하면 '부시사과 저금통'을 제작해서 상황실로 보내왔고 부시 재털이를 만들어서 촛불시위 참가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운동경기장에는 효순이.미선이 추모 걸개그림을 들고 응원전을 했다. 효순이.미선이 추모 및 SOFA 개정 뺏지와 스티커가 수십만개 보급되고 각종 모임에서 자발적으로 제작해서 서로 나누어주기도 했다.

온라인상에서 여러가지 추모를 상징하는 모형과 도형들이 등장하고 아이디와 제목에 달기운동이 확산되었다. 온라인 추모제, 추모벨, E카드 보내기 운동이 전개되고 다종다양한 플래시, 동영상, 만화, 패러디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또한 각종 포털사이트에 지역별, 계층별 카페가 만들어져 서로 의견이 교환되고 실천양식과 일정이 공유되었다.

청소년, 대학생, 여성, 노동자, 농민, 교사, 교수, 문학인, 장애인, 종교인, 문화예술인 등의 각계각층의 행동의 날이 폭발적으로 조직되어 자신의 특성과 내용을 가지고 참여했고 미군부대 진입 등 선도적인 투쟁도 병행되어 진행되었다.

광화문은 명소가 되었다. 교육상 필요하다며 자녀들의 손을 잡고 오는 어머니들, 지방에 사는데 서울 친척집에 왔다가 가족단위로 참가하신 분들, 미군 희생자 가족, 외국의 반미단체, 유학생, 외국인, 외신기자들이 국내, 해외 가리지 않고 광화문 자주평화 촛불시위에 참여했다. 광화문은 자주평화의 광장으로 국제적인 명소로 자리잡았다.

3) 새로운 시위문화 정착

효순이 미선이를 추모하면서 들기 시작한 촛불은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추모, 이라크 파병반대, 부안핵폐기장 설치 반대, 탄핵반대 촛불로 타올랐다. 촛불은 추모, 저항, 자주, 반전, 평화, 민주수호의 촛불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었다.

4. 여중생범대위의 향후 과제

1) 불평등한 한미SOFA 전면개정

1966년 한미SOFA 체결 이후 1991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친 SOFA 개정의 배경에는 공통된 것이 있다. 바로 미군범죄로 인한 반미여론과 민주화투쟁이다. SOFA 체결후 무려 25년만에 있었던 1991년 첫 개정은, 87년 민주화운동의 와중에서 80년 광주에서의 미국의 책임을 묻는 반미 분위기가 고조됨으로써 성사되었다. 2001년의 경우는 1992년 고윤금이씨 살인사건, 1995년 충무로 지하철 미군 난동사건, 그리고 2000년 이태원 여종업원 살인사건과 노근리, 매향리투쟁,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 등 계속되는 미군범죄로 인해 반미여론이 비등한 가운데 성사되었다.

여중생범대위는 불평등한 한미 SOFA를 개정하기 위해 토론회, 공청회를 거치고 SOFA개정 사업단을 설치하고 전문가를 중심으로 SOFA전면개정 범국민 요구안을 마련하고 정부와 미군당국에게 SOFA 전면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한국정부와 미군당국은 한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기만하는 태도를 보였다. 두 차례에 걸쳐서 발표한 한미합동위원회의 SOFA 운용개선안이 그것이다. SOFA 전면개정을 줄곧 요구해온 국민들의 기대와는 전면 배치되는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한미당국은 지금까지 초동수사 강화, 비공무중 교통사고시 선지급 신속화, 미군 사유차량에 대한 관리 개선, 훈련시 안전대책 수립, 새로 반환.공여되는 미군기지에 대한 환경오염 조사 및 치유절차 마련 등의 SOFA 운용 개선안을 내놓았다. 이들 개선안은 일부 진전된 내용도 있지만 불평등한 SOFA는 그대로 놔둔 채 운용면에서 일부 개선한다는 것이어서 한계를 극명하게 가지고 있다. 초동수사 강화만 보더라도 미측의 신병인도 요청이 있으면 곧바로 신병을 넘겨줘야 하는 SOFA 조항이 개정되지 않는 한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훈련시 안전조치 또한 마찬가지다.

또한 SOFA 운용개선안은 SOFA 본 협정이나 합의의사록, 양해사항처럼 국제법의 효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미국이 이 합의 사항을 어길 경우, 예컨대 미국 정부 대표가 1시간 내에 출석하지 않을 경우, "미국은 약속을 저버린 나라"라고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미국이라는 나라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공무중 미군범죄에 대해 한국법정 재판권을 행사한 일은 미군주둔 60여년 동안 단 한번도 없다. 또한 비공무중 미군범죄 재판권 행사율도 5% 미만이다. 5%의 재판결과도 기가 막힌다. 80%이상이 집행유예,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지금도 여전히 하루평균 5-6건의 미군범죄가 발생한다. 최근 오산에서 무면허 뺑소니 사망사고, 신촌에서 만취 미군 칼부림 난동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경찰조사에서 한결같이 'SOFA, SOFA...'를 연발하며 무례하고 뻔뻔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지난 1월 9일 법원은 한강에 포르말린이라는 치명적인 독극물을 대량 방류한 맥팔랜드에게 실형 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법부는 최종 확정 판결 이후에 신병을 인도하도록 되어있는 불평등한 한미 SOFA 때문에 독극물 방류범 맥팔랜드를 구속시키지 못하고 있다. 미군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근본 변혁하는 것이며, 한미SOFA를 전면개정해서 사법주권을 바로잡는 길 뿐이다.

2) 자주평화 실현 투쟁의 확대 강화

촛불시위는 60여년간 미국의 지배와 간섭으로 빚어진 고통을 우리국민들 스스로 해결하고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주권국가 수립을 위한 국민적 요구의 분출이자 한반도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국민적 진출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더욱 공고히하고 완전한 자주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범국민적 투쟁을 하나로 결집할 수 있는 상설투쟁체가 절실히 필요하다. 관련된 조직과 단체의 역할을 높혀내고 상호간에 긴밀한 연대연합정신에 입각한 활동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확장되는 자주평화 투쟁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3) 여중생범대위 발전적 해소와 추모사업회

이번 2주기를 끝으로 여중생범대위는 2년간의 활동을 접는다. 여중생범대위의 그동안 활동과정에서 많은 성과도 있었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진상규명, 살인미군처벌, SOFA개정, 부시사과'의 과제는 아직 실현하지 못했다. 이러한 과제와 더불어 기념비 재건립 등의 과제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러한 남은 과제는 효순이 미선이 추모와 더불어 추모사업회에서 담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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