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민주노총 공공연맹 전국철도노동조합 위원장)

▶4월 30일부터 5월 3일까지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남측 노동자
대표단 309명이 평양을 찾았다. 가운데가 필자. [사진제공 - 김영훈]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한 방북, 그리고 룡천역 사고

나는 지난 3월 16일 위원장에 당선된 직후 민주노총에 인사차 방문한 자리에서 총연맹의 통일위원장인 이혜선 부위원장으로부터 이번 남북노동자 통일대회의 계획을 처음 들었다.

사실 그 동안 이런저런 이유로 6.15 공동선언 이후 변화된 남북관계와 국제정세,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온 노동자들의 자주교류 사업의 진행정도에 대해 무지했던 나로서는 '노동절 행사를 남북의 노동자가 평양에서 공동 개최한다'는 이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남북노동자 통일대회의 결실이 있기까지 노력한 동지들의 노고를 생각하는 것도 잠시, 염치 불구하고 '반드시 이번 대회에 참석하리라' 다짐하며 그 동안 챙겨보지 못했던 자료들을 공부하는 것으로 방북준비에 들어갔다.

방북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나는 '6.15 공동선언 관철을 위해 투쟁해 온 동지들에 비해 그 동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단지 위원장이라는 이유로 이번 남북통일대회에 무임승차하는 것 아닌가?'하는 문제에 대해 반문했지만 방북을 준비하는 설레는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

먼저 우리 조합의 김용욱 통일위원장과 이종선 통일정치국장에게 어떤 기념품을 준비해 갈 것인가에서부터 시작하여 철도현장 조합원들의 통일염원을 어떻게 북녘의 노동형제들에게 전달할 것인가, 이번 방북을 통한 우리조합의 구체적인 사업목표는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이르기까지 하나씩 준비해 들어갔다. 그리고 틈틈이 최근 정세에 관한 보고서들과 언론보도 등 관련 자료들을 챙기면서.

그러나 방북을 불과 1주일정도 앞둔 4월 22일 발생한 '룡천역 참사'는 이러한 우리의 계획을 원점에서부터 다시 고민하게 하는 중대한 사태가 되었다. 엄청난 피해규모와 특히 어린 학생들의 피해는 북으로서는 말 그대로 국가적인 참사였던 것이다.

이러할 때 우리들의 방북이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손님을 치러야 하는 북쪽에서는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생각과 '슬픔에 잠겨있을 북녘 동포들 앞에서 무엇을 경축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가?'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회성사의 여부는 전적으로 대회를 준비해온 남북의 3개 조직의 결정으로 가능한 것이고 특히 북녘의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직총)의 의사가 중요한 것이므로 어쩌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일이었다.

그리고 직총이 이번 대회를 준비하는 의지는 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처음 나눈 안내원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국가적인 참사이지요, 하지만 얼마나 기다려온 오늘입니까? 통일로 가는 길에 이런저런 곡절이야 있는 것 아닙니까? 북과 남의 노동자들이 59년을 기다렸는데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지요."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알게 한 방북사전교육

관련법률에 의해 방북하는 모든 남쪽의 인사들은 정부에서 주관하는 소정의 사전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우리도 그 예외가 아니라서 방북 전날인 4월 29일 서울에서 교육을 받아야 했다.

▶4월 29일 출발을 하루 앞두고 사전 방북교육을 받았다. [사진자료 - 통일뉴스]
나는 교육을 통해 정부의 통일관과 정책의 변화를 느껴보고자 했으며 과거 군사정권시절의 그것과 얼마나 달라졌나를 알고 싶었다. 두 시간여 진행된 이날 강의는 두 명의 강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먼저 6.15 이후 달라진 이북에 대한 강의는 너무나 일반적인 수준이라 사실상 '남북의 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런 내용이었다. 솔직히 과거 정권과 대북관에 있어 아무런 변화를 느낄 수 없었다.

두 번째 강의는 주로 남측의 인사들의 초기방북 시 문제가 되었던 몇 가지 사례들을 중심으로 방북 시 유의사항에 대한 교육이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북녘의 동포들에게 하여서는 안 되는 언행과 구입해서는 안 되는 물품, 그리고 가서는 안 되는 장소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남쪽의 인사들의 방북 시 종종 문제가 되는 것이 북의 지도자인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 관련된 사항이라는 내용의 강의가 이어졌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김일성배지(북에서는 이를 휘장이라고 한다)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거나 지도자에 대해 호칭 없이 이름만 그냥 부르는 행위는 결례이므로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라고 공식적인 호칭을 이름과 함께 붙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좋다는 강의였다.

나는 속으로 '정말 세상 많이 변했구나!'하고 느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선생님들이 방북하셔서 김일성이를 부를 때 그냥 김일성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를 부를 때 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그리고 김정일이는 위대한 지도자 김정일 장군님이라고 부르는데 우리는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고 김일성이는 김일성 주석, 김정일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물론 임금님도 없는 자리에서는 흉도 보고한다는 옛말이 있고 우리사회에서 대통령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 예사인지라 그것이 무슨 문제냐고 할 수는 있다. 다만 마지못해 주석, 국방위원장 이렇게 호칭을 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조국의 지도자로서 대해야 한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면 강사부터 공식적인 강의 시에는 정확한 호칭을 붙이는 것이 교육의 목적을 조금이나마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방북교육을 하는 강사들에게 우리 민주노총의 통일일꾼들이 한번 특강을 하는 것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였다. 정부기관에서 일하는 분들이 통일과 관련한 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면 무엇 할 것인가? 통일을 진정으로 염원하는 신념과 연북의식이 없다면 자신들의 의식 속에는 김일성주석은 김일성이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김일성이 아들 김정일이에 불과할 것인데.

"통일위원장은 뭐가 달라도 달라"

교육을 마친 후 사무실로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기념품을 포장하고 하다 보니 밤 아홉시가 훌쩍 넘었다. 우리 조합에서는 기념품으로 조끼를 준비했다. 흔히 투쟁복이라고 하는 구호들이 인쇄된 조끼가 아닌 단순히 우리 조합의 로고만 찍혀있는 일상복으로서의 조끼를 준비했고 우리청에서 노동조합의 방북소식을 접하고 고속철도 개통 기념주화와 기념우표책을 보내주어 이를 하나하나 포장했다.

우리청에서는 이번 방북과 관련하여 같은 철도인으로서 룡천역 사고와 관련하여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해달라는 주문도 함께 보내주었다. '통일로 가는 길에 노사가 따로 있을 수 있나, 이런 조그마한 정성을 모아 가는 것이 통일운동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였다.

개인 짐을 챙기고 있는데 우리조합 출신으로 공공연맹에서 일하고 있는 김재하 동지가 한마디 한다. "위원장님 이북이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준비하는 대회이니 만큼 평양에 가시거든 쌀 한 톨, 물 한 방울 아껴 쓰시고 웬만한 것은 여기서 다 준비해 가서 민폐 끼치지 말고 잘 다녀 오세요." 북이 바로 남이고 남이 또 다른 북이라는 고마운 말이었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민주노총 충남본부 할당으로 함께 방북하는 우리조합의 장재영 천안기관차지부장과 맥주 한잔하고 잔다는 것이 새벽 두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 여섯시 김용욱 통일위원장을 만나 우리조합에서 환송 차 가는 간부들과 함께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나는 김용욱 통일위원장에게 우리는 어제 밤에 한잔하고 잤는데 잘 잤느냐고 물었더니 통일위원장 하는 말 "어쩌면 오늘 평양 도착해서 룡천역 사고 관련 집단헌혈을 할 수도 있어서 한잔하고 싶었지만 참았다"라고 하는 것 아닌가!

아차! 헌혈해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번쩍하고 지나갔다. 역시 통일위원장은 다르긴 다르구나. 달리 통일위원장이겠냐고 농담을 하긴 했지만 어려움에 처한 북녘동포를 생각하는 통일위원장의 마음은 이미 룡천역에 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참고로 우리조합의 김용욱 통일위원장은 민주노총 통일선봉대장 내정자다. 이런 자세를 가진 동지가 민주노총의 통일선봉대장이라는 사실이 나는 자랑스럽다.

서울발 평양행 대한항공, 항공기번호는 '815'

4월 30일 인천공항은 새벽부터 310명에 달하는 방북단과 환송하러 나온 동지들로 분주하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금을 통한 의료품 등의 구호물자들과 각 단위노조에서 준비한 기념품 등 소화물로 인해 출국수속에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모두가 설레는 표정들이다.

오전 8시경 통일부에서 발행한 방북을 위한 단수여권을 손에 쥐니 정말로 평양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천공항 운항예정시간표 전광판에 선명하게 나오는 '평양.平壤.PYONGYANG'이라는 글자와 발권수속을 통해 받은 서울발 평양행 대한항공 제 815편 항공권. 우연의 일치인지 항공사의 배려인지, 우리가 타고 가는 대한항공 전세기는 815편이었다.

▶참가단은 인천국제공항에서 KE-815편으로 한 시간도 채 못 돼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사진자료 - 통일뉴스]
일제로부터 해방된 8.15를 기념하여 통일을 염원하는 이 땅의 민중들은 그 동안 얼마나 많은 투쟁을 전개하여 왔던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들고 8.15만 되면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이 한판 살풀이를 해 왔었다. 8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그 보다 더 뜨거운 통일의 열정을 가지고 땀과 최루가스에 범벅이 된 채로 아스팔트에 드러누워 곤봉세례를 맞으면서도 외쳤던 통일의 구호가 생각난다. 머리가 터지고 '차떼기'로 닭장차에 실려 가지 않으면 도저히 8월을 그냥 보낼 수가 없어서 그토록 통일을 목놓아 외쳤던 시절이 생각난다. 15년도 더 지난 오늘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열정이 남아 있는가?

우리를 태운 전세기는 직항로를 통해 평양으로 간다. 이륙하는가 싶더니 "방금 우리 항공기는 북한의 영공으로 들어 왔습니다"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온다. 북녘의 산하를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보기 위해 방북단은 일제히 창으로 향하고 이를 취재하려는 기자단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드디어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고 순안비행장을 선회하니 북녘의 산하가 더욱 뚜렷이 우리들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다. '평화로운 농촌풍경' 이것이 내가 받은 순안공항의 첫인상이다.

공항과 논밭이 가까이 있어 대한항공을 알아보고 일부 손을 흔드는 주민들의 모습도 보인다. 우리를 태운 전세기가 무사히 착륙하자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수 백명의 꽃을 든 환영인파가 벌써 몇 시간 째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북쪽의 간단한 확인절차를 거쳐 비행기에서 내리니 함성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조국통일', '우리는 하나다' 남과 북의 노동자들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열렬히 환영해 준 북녘의 동포들과 사진촬영을 해도 되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북 동포들의 답변은 한마디로 '일 없습니다'였다. 목소리가 밝기도 하였지만 특유의 고저가 있는 그 말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방북기간 내내 우리 방북단의 사진촬영이나 대민 접촉에 대해 북 당국에서는 아무런 문제를 삼지 않았다. 물론 일정이 늦어지거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재촉을 하곤 했지만 북 주민들과 담소를 하거나 사진 촬영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자유로웠고 이북의 동포들도 자연스럽게 응대해주었다.

만경대와 묘향산, 김일성 주석의 삶과 죽음

방북기간 동안 주요일정은 첫날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는 만경대와 만경대 소년학생궁전을 둘러보았고 유명한 평양 단고기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둘째 날은 능라도에서 5.1절 통일대회를 개최하였고 모란봉 평화정에서 '남북 노동자 련환공연'을 갖고 남북노동자 대회를 공식폐막 하였다. 저녁은 북의 박봉주 내각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직총의 주최로 인민문화궁전에서의 환영연회가 있었다.

셋째 날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돌아보고 향산호텔에서 버섯요리의 점심을 먹었다. 평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선문을 돌아보고 우리의 숙소인 양각도국제호텔에서 우리측 주최로 환송만찬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특별히 우리측 단장인 강승규 총연맹수석부위원장의 부탁으로 '피바다 가극단'의 공연이 있었는데 '고향의 봄'을 부를 때는 만찬참석자 전체가 '눈물바다'가 되는 듯한 감동적인 공연이었다.

▶묘향산을 찾은 남측 참가단은 보현사와  '국제친선전람관'을 관람했다.
[사진자료 - 통일뉴스]
마지막 날은 평양지하철역과 1968년 원산에서 나포하여 대동강에 정박시켜 놓은 푸에블로호 관람과 주체사상탑, 그리고 대동강맥주공장을 견학하고 평양에 와서 꼭 들려야 한다는 옥류관에서 독한 술을 석잔 나눈 후에 뜨거워진 속을 시원한 냉면으로 달랜다는 '先酒後麵'(선주후면)으로 점심식사를 한 후 순안공항으로 이동하여 남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4일간의 일정이 어느 것 하나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이 있을까? 그리고 많은 동지들이 방북기에 나와 비슷한 감정을 담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이러한 일정 속에서 만경대와 묘향산을 돌아보며 김일성 주석의 삶과 죽음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김일성 주석이 태어난 만경대와 죽음을 맞은 묘향산, 그리고 생전에 전 세계로부터 받은 선물들과 외교활동 등의 언론자료들을 전시해 놓은 국제친선전람관(서거 이후에도 선물은 계속 답지해 온다고 한다)은 바로 김일성 주석의 삶 그 자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 통일을 이야기 할 때 '이북 바로 알기 운동'을 떠올리곤 한다. 통일하자고 하면서 상대방을 제대로 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자체를 금기시 하여왔다. 아니 알면 안 되는 상대였다.

어려서부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자라온 우리가 그것도 '소원'인데 소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또 하나의 조국인 이북에 대해 제대로 알려는 시도 자체를 막아온 세월이 바로 6.15 공동선언 이전의 우리의 아픈 역사였던 것이다.

이북을 바로 알기 위해 김일성 주석을 바로 아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일 것이다. 6.15 선언 이후 남쪽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 중의 하나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국민적 인식변화라고 하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심지어 극우보수언론들까지 국민정서의 아노미현상이라고 할 만큼 우리 언론에 가감 없이 공개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은 우리국민들로 하여금 이북의 최고지도자에 대한 그 동안의 선입관을 무너뜨리고 남과 북이 한층 동질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이북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을 직접 대함으로서 많은 부분에서 유연하게 된 것도 사실일 것이다. 통일운동에 있어 남과 북, 북과 남이 서로를 하나하나 알아 간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국제친선전람관은 김일성 주석의 선물들을 전시해 놓은 수령관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선물들이 전시되어진 장군관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날아온 진귀한 선물들이 정말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 민주노총의 선물도 전시되어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조국의 광복과 분단 그리고 전쟁과 사회주의 국가 건설 그리고 동구의 몰락 이후 강화되는 이북에 대한 고립화와 계속되는 미국과의 핵전쟁 소동이라는 현대사의 중심에서 한 시대를 살아온 김일성 주석은 1994년 묘향산에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준비하다 서거했다고 한다.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돌아보는 것으로 어찌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마는 최소한 어떻게 살다갔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하나의 조국의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이 1979년 10월15일 전람관 개관과 함께 지은 '묘향산 가을날에' 라는 시의 앞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토대우에 올라서니 천하절승 예로구나 묘향산 절경이야 태고부터 있는 것을 전람관 여기 솟아 푸른추녀 나래펴니 민족의 존엄빛나 비로봉 더욱 높네'

천하절경이라는 묘향산가을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무채색의 건물 속에 녹음이 우거진 '평양의 봄'

평양의 거리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천박하지도 않았다. 주요한 건축물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의 건축양식처럼 대단히 웅장하다는 느낌을 준다. 거리를 활보하는 인민들의 모습은 이남이나 별로 다를 바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자동차는 많지 않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전차 속에는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참가단의 숙소인 양각도 국제호텔에서 내려다 본 대동강변 모습. [사진제공 - 김영훈]
거리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방중성과를 축하하고 노동절을 경축하는 구호들이 많이 걸려있다. '강성대국 건설', '위대한 수령님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우리식 사회주의 만세' 등의 구호도 많이 보인다.

내가 본 평양은 무채색의 웅장한 건축물들과 정결한 거리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대동강과 푸른 녹음이 어우러진 도시라는 느낌이다. 어느 나라 수도 못지않은 수려한 모습이었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대동강의 양각도 국제호텔이다. 양의 뿔처럼 생긴 섬이라 하여 능라도, 쑥섬과 함께 대동강의 3개의 섬 중의 하나인 양각도에 있는 호텔인 양각도 국제호텔은 47층 높이의 건물로 나는 27층에 투숙하였다. 대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양각도 국제호텔의 전경은 정말 아름답다.

평양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전력사정이 어려운 관계인 듯하다. 그러나 주체사상탑이나 인민문화궁전 등 주요 건축물은 불을 비추고 있어 그 야경을 보는 것은 또 다른 맛이 있다. 깜깜한 밤에 불을 밝히고 있어 더 멀리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날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건물옥상에서 선명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네온사인. '조선의 심장 평양', '강성대국 건설' 이라는 글씨가 순차적으로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한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여 본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려는 인민들의 맥박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한국전쟁 당시 평양시내에는 폭격으로 인해 성한 건물이 한 채도 없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지금 평양의 우거진 수목은 마치 전쟁 때 헤어진 형님 동생을 만난 것처럼 더욱 늠름하게 느껴진다.

가장 인상적인 말, "일 없습니다"
 
나에게 누군가 이북에서 들은 말 중에 어떤 말이 가장 기억이 남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난 '일 없습니다'를 들겠다. '괜찮습니다'의 이북식 표현인 이 말은 굳이 영어로 표현한다면 'No Problem' (통일 이야기하는데 무슨 영어냐고 하시겠지만 괜찮습니다 보다는 더 가까울 듯하여)이 아닐까 한다. 이미 남쪽에서도 보도를 통해 이 말은 어느 정도 친숙한 표현이 되었지만 실제로 '일 없습니다' 라는 표현을 자주 들었다.

그러한 이유는 우리의 처지가 손님이고 북에서는 초대한 입장이니 북의 사정을 잘 모르는 상황에서 혹시 나의 행동이 결례가 되는 것이 아닌지를 묻곤 했는데 답은 '일 없습니다' 가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방북일정 3박4일 동안 우리 방북단의 많은 동지들은 일정을 마친 저녁시간 조금이라도 많은 동포들과 이야기를 나눌 심정으로 호텔주변을 배회(?)하곤 했고 자연스럽게 술자리로 이어졌다. 이 경우 새벽시간을 훌쩍 넘기기가 예사인데 당연히 거기에서 일하는 봉사원들은 퇴근이 늦어지게 되고 우리가 미안한 마음에 "우리 때문에 퇴근이 늦어지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저희들은 일 없습니다. 선생님들 좋은 시간 되시고 또 오세요" 하는 것이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고 정말로 일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몰라도 이는 이북에서 이야기하는 혁명적 낙관주의의 일단이 아닐까? 혼자서 생각해 본다.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라고 하는 말처럼 지금 조금 힘들지 몰라도 이것이 미래의 희망을 만드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우리는 양각도 호텔 봉사원들의 배려 속에 밤이 늦도록 '내일 일이 없다는 듯이' 남과 북, 북과 남을 이야기하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남남북녀에 대하여

평양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남남북녀라는 옛말을 실감나게 하였다. 지난 부산 아시안게임이나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으로 이미 남쪽에서도 이북의 '미녀응원단'의 명성이 자자한 지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실제로 만난 북의 청춘남녀들은 활기찬 모습이었다.

특히 5월 1일 통일대회를 진행하기 위해 모란봉에 올랐을 때 공원에서 휴일을 맞아 야유회를 즐기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과 어울려 가무(!)를 즐기다 보니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하나 언어도 하나, 하나 문화도 하나, 둘이 되선 못 살 하나', '우리는 하나' 라는 노래는 '반갑습니다'와 함께 이북에서 가장 많이들은 노래이다.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 보면 어느새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다. 누군가 예기했듯이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 아니고 더 큰 하나가 된다는 사실. 이것이 통일이 가지는 의미가 아닐까?

▶만경대에서 만난 흰색 저고리와 검정 치마 차림의 학생들이 남측 참가단을 알아보고
환영하고 있다. [사진자료 - 통일뉴스]
대학생 같은 젊은 남자들은 교복 같은 검은 인민복차림이 많았고, 일반인들은 양복차림도 많았다. 여자들은 전통적인 한복, 양장 그리고 흰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 차림의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특히 흰색과 검은색의 치마저고리 차림의 젊은 여성들의 옷매무새가 너무 마음에 들어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었다. 한 때 일본의 조총련 여학생들의 상징이기도 하였던 흰색과 검은색의 치마저고리가 때로는 여성스럽고 때로는 강인하게 보이기도 하였으며 아무 이유도 없이 서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어쨌든 하나 같이 미남, 미인처럼 보였다.

그런데 '남남북녀'라고 하면서 북쪽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에는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네'라는 생각들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어려서부터 이북사람들은 머리에 뿔이 달린 얼굴이 빨간 사람들이라는 무의식 속에 있다가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들을 대하면서 그리고 밝은 모습을 보니 모두가 미남, 미인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다. 이남의 거리에도 얼마나 많은 미남, 미인들이 많은가! 우리겨레의 아들딸들은 모두다 선남선녀임이 분명하였다.
   
원산에서 나포되어 대동강에 떠 있는 푸에블로호

마지막날 우리는 대동강에 떠 있는 '푸에블로호'를 관람하였다. 알려진 대로 푸에블로호 사건은 1968년 미군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이북 영해인 원산 앞 바다에서 정찰활동 중 조선인민군 해군에 의해 나포된 사건이다. 이들의 포로송환까지 이북과 미국은 지루한 협상을 벌였고 결국 미국이 공식적으로 영해침범을 인정하고 재발방지의 약속을 한 후에 승무원들은 전원 석방되었고 정보함 푸에블로호는 이북에 압류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관람할 때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당시 직접 작전에 투입되었던 인민군 대좌가 그 때의 상황을 설명을 해주었다. 성함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연세가 많으신 인민군대좌의 설명이 어찌나 실감나게 들리든지 나는 비가 내리는 대동강변에서 37년 전의 그 날 원산 앞 바다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마치 파도를 맞고 서 있는 것처럼.

그런데 설명을 듣는 동안 원산 앞 바다에서 나포한 정보함이 어찌 지금 대동강변에 정박해 있는지가 궁금했다. 사실 여러 가지로 전력 상 우위에 있을 미군이 원산 앞 바다에서 나포당한 것도 의아한 일이지만 그것은 남의 나라의 영해에 일어난 일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배로 어떻게 원산의 반대편에 있는 평양의 대동강에 옮겨놓을 수 있었을까?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배를 통해 원산에서 평양으로 들어오려면 공해상을 지나 한반도를 완전히 한바퀴 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첨단정보장비가 24시간 공해를 감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포한 남의 나라 배로 한반도를 돌아 대동강에 정박시킨 일은 보통상식으로는 생각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최초로 남측 인사들에게 공식 공개된 푸에블로호. 68년 당시 체포결사대 조장이었던
박인호 대좌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사진자료 - 통일뉴스]
이에 대한 인민군 대좌의 설명은 이러하였다. "정보함을 분해하여 육지로 이송해서 다시 조립하는 방법도 생각했지만 불가능한 일이고 그래서 정보함을 일반 배로 위장하여 조선반도를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이를 감행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배를 운항하여 대동강에 들어오고 난 3일 후에야 미국에서 이를 알고 땅을 쳤다고 합니다. 무비담대한 장군님의 지도 아래면 우리 인민군대는 못할 것이 없습니다."

'무비담대', 그 무엇과 비교할 것이 없을 정도로 대담하다는 뜻인가? 어쨌든 배짱 한번 두둑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프에블로호에 올라 이리저리 돌아보며 인민군해군 초병과도 기념촬영을 하였다. "어려 보이는데 나이는 몇 살입니까?" "열 아홉 살입니다." "군대생활 힘들지 않습니까?" "일 없습니다."
    
연북의식,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려는 의식적 노력'

우리는 흔히 '통일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한다. 이제 그 누구도 통일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는 자가 없으니 구체적으로 어떤 경로와 방식으로 통일을 이룰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음은 거창하게 낮은 단계의 연방제니, 높은 단계의 국가연합이니 하는 정치제도의 문제보다는 '시민 개개인은 어떤 입장과 관점으로 통일을 준비해 들어갈 것인가?'하는 실천적 과제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통일을 준비하는 한 노동자로서 중요한 첫 실천은 '연대.연합의 의식적 실천'이 아닐까 생각한다. 통일의 주체인 남과 북이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대결의식은 통일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결코 통일을 이룰 수는 없다. 만약 통일을 이루더라도 이는 무력을 통한 어느 한 쪽의 접수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 남의 입장에서는 북과 연대.연합하고자 하는 연북의식은 통일을 이루는 데 중요한 입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단 60년의 역사 속에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의 체제와 의식과 문화 등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북을 바라볼 때 가정 먼저 떠올리는 것이 남쪽과의 비교이다.

예를 들어 평양의 거리와 북녘동포의 옷차림새는 남쪽의 70년대 거리를 연상하게 한다느니 이북의 사회는 모든 권력이 군부에서 시작되는 병영사회라고 하는 사고는 바로 있는 그대로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보다 나를 중심으로 남을 비교하는 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이다.

통일의 문제를 전 민족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분단의 세월동안 너무나 변해버린 남과 북이지만 어떤 동일함이 있을 지를 먼저 생각하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식적 실천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다.

▶국경일인 5.1절을 맞아 모란봉에 나온 일반 주민들과 감격적인 상봉이 이루어졌다.
[사진자료 - 통일뉴스]
나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제도와 사상과 문화를 재단하고 남과 북을 비교하려 하는 것. 이것은 분단이 가져온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이러한 사고는 비단 일반대중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운동을 하는 우리들의 의식 속에도 알게 모르게 잠재되어 있다.

요즘 이북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구호 중의 하나가 '선군정치'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군을 가장 중요한 사회건설의 중심으로 보고 정치사업을 한다는 선군정치를 두고 우리는 단순히 남쪽의 경험에 비추어 '군대=독재권력=나쁜 것'이라는 등식화를 스스로 내리고 북을 재단하려는 것은 아닌지 반문해 본다.

물론 한국전쟁을 겪었고 아직도 정전체제라는 대단히 불안정한 한반도의 상황에서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군부독재에 고통을 당해 온 우리로서는 군대의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문제이다. 그러나 사고를 180도 바꾸어 군대가 항상 국민들의 아픔과 함께 해왔고 이 땅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 봉사한 집단이라면 그러한 역사를 국민전체가 공유하고 있다면 군대에 대한 인식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이다. 80년 5월 광주에는 시민군과 진압군이라는 같은 무력이 충돌하였지만 광주시민들이 시민군에게 대했던 그 따뜻한 정성과 시민군과 시민과의 관계는 진압군과의 관계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인 것처럼.

나는 이번 방북기간 동안 직총의 성원들과 이런 선군정치, 이른바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6자회담 전망 등 다소 무거운 주제들일 수 있는 이야기들도 기탄없이 주고받았다. 이북의 동포들은 대체로 순박하다. 생활양식도 순박하지만 사고도 솔직하고 숨김이 없었다. 이런 정치군사적인 대화에서도 그들의 솔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북에서는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경제발전도 중요하지만 국방력이 담보되지 않은 물질적 풍요는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번 방북기간동안 이렇듯 이북에서 주장하는 여러 주장들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 정도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무슨 고민을 하고 있으며 이북의 노동자들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방북기간 내내 우리 뒷바라지를 해주신 박영희 선생과 권기평 선생, 그리고 늦은 밤까지 고생을 해주신 양각도 국제호텔의 김수경님을 비롯한 봉사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아들뻘인 나에게 남의 노동자 대표라며 극진한 예우를 해주신 직총 중앙위 리창렬 편집부장님에게도 깊은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처음 가본 평양에서의 4일은 이북에 대해서도 한번 더 알게 되는 기회였지만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 통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어디쯤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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