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순(한국진보정치연구소 소장)


고이즈미 일본총리가 5월 22일 평양을 방문하였다. 지난 2002년 9월 17일 평양을 방문하여 역사적인 ‘조일 평양선언’을 발표하고 돌아간 지 1년 8개월 만에 다시 평양을 방문하였다.

1년 8개월 만에 열린 북일 정상회담에서는 지난 2002년 9월에 채택된 ‘조일평양선언’을 재확인하고 그 이행과 관련된 문제들을 토의하였으며, 전반적인 국제문제들과 양국관계개선에서 제기되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이로써 양국 관계개선을 위한 북일 국교정상화 회담이 곧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고이즈미 일본총리의 평양방문의 의미와 향후 동북아 정세 특히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정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살펴보자.

1. 고이즈미 평양방문의 정치.외교적 배경

이번 고이즈미의 평양방문 과정을 보면서 드는 느낌은 ‘허둥지둥’이다. “허둥지둥 평양으로 달려갔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분석이라고 생각한다. 허둥지둥 평양으로 달려갔다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외교정책의 일관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제2차 6자회담 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의 대북 강경대결정책의 돌격대 역할을 자청하였다. 6자회담의 의제에 일본인 납치문제를 삽입하자고 주장하여 회담에 인위적인 난관과 장애를 조성하기도 하였으며, 일본의회에서는 대북 제재법안을 통과시켜 대북경제 봉쇄정책을 실행해 나갔으며, 일본에 정박 중인 이북 선박에 대한 수색을 강행하는가 하면 조총련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강경일변도의 대북정책을 펼쳤던 고이즈미 내각이 태도를 돌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북의 입장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현재 북미사이의 현안문제들에 대한 이북의 원칙과 입장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것은 제2차 6자회담과 지난 5월 12일 있었던 6자회담 실무그룹회의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여기에서 이북의 기본적인 원칙과 입장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의 대북 정책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이처럼 현재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에서 양측의 입장이 전혀 바뀌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태도가 바뀐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납치피해자 가족을 돌려보내주겠다는 이북의 약속 때문인가?

둘째, 외교정책의 목표가 모호하다. 고이즈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현재의 양국간 적대관계를 우호관계로, 대립관계를 협력관계로 바꾸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방북 목적을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과연 고이즈미 총리가 양국간 관계정상화에 대한 확고한 목표와 의지를 갖고 있는가는 의문이다.

이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말했듯이 양국관계 개선문제는 일본의 동맹국이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갖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동맹국이란 두말 할 나위 없이 미국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북일 관계개선 문제를 얘기한다는 것은 정책실현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결여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셋째, 추진과정 자체가 말 그대로 ‘허둥지둥’이다. 차분하고 치밀한 준비와 계획에 의했다기보다 무엇에 쫓기듯이 평양으로 달려갔다고 보는 것은 전해 과장된 묘사가 아니다.

허둥지둥 평양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이 미국에서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6자회담에서 미국의 처지는 점점 궁색해지고 있다. 이남에서는 지난 4.15 총선에서 대북 대결노선이 패배하고 남북화해협력, 평화노선이 승리하였다. 4.15 총선 직후에 있었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은 핵문제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정세에 전환적 국면을 창출하였다.

여기서 양국은 전통적 우호협력관계를 바탕으로 상호이해가 걸려있는 국제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기 위해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 나가면서 상호 경제협력관계를 양적 질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이로서 북미관계(한반도 핵문제의 해결)와 상관없이 상호협력적인 새로운 21세기 동북아시아 질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리게 되었다.

만약에 북미관계와 관계없이 한반도 남과 북,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유럽까지 참여하는 21세기 동북아 경제협력질서가 형성.발전 된다면 미국에 기대서 미일패권적인 동북아 질서를 추구해 나가려고 했던 일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를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현재 동북아 정세가 이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추종노선을 견지해온 일본으로서는 초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시점에서 미국추종노선을 고수하게 되면 대북 관계개선기회를 상실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본의 가장 긴급한 외교적 현안문제인 납치 피해자 가족 귀환 문제 해결이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는 새로운 동북아 경제협력구조 형성과정에 일본만 소외될 것이다. 그것은 일본외교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악몽이다. 이것이 고이즈미로 하여금 허둥지둥 평양으로 달려가게 만든 이유이다.

2. 북일 정상회담의 성과와 의미

이번 5월 22일 평양 대동강 초대소에서 열린 제2차 북일 정상회담에는 북측에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참석했으며,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총리를 위시해 야마자끼 마사아끼 내각관방부장관, 벳쇼 고로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다나까 히또시 외무성심의관, 야부나까 미또지 외무성 아시아 오세안 주 국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1시부터 약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다. 이날 회담내용에서 협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조일 평양선언’이행문제이다. 이날 일본 고이즈미 총리는 “‘일-북 평양선언’을 중시하며 이를 성실히 이행하는 과정을 통해 적대관계를 협조관계로 만들며 두 나라 관계를 정상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피력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공화국정부는 앞으로도 ‘조일평양선언’의 리행을 위해 적극 노력할 것”이라는 의지를 피력하였다.

그러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조일관계개선의 진전여부는 일본의 동맹국이 어떤 태도와 립장을 취하는가에 많이 달려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국교정상화를 위한 실무협의를 속개해 나가기로 합의하였다.

둘째는 핵과 미사일문제 등 국제문제에 대한 협의이다. 현재 초점으로 되고 있는 핵문제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핵문제는 6자회담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설명하였고, 고이즈미 총리는 이북의 핵프로그램의 포기를 요청하였다.

셋째는 기타 양국관계의 현안문제 해결모색이다. 일본 측에서는 일본인 납치피해자 가족의 일본귀환을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허락하였다. 또한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정부는 앞으로 △이북을 적대시하는 제재법 발동을 중지하겠다 △재일조선인을 차별하지 않고 우호적으로 대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대북 인도지원을 재개하겠으며 쌀 25만톤과 1천만 달러어치의 의약품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번 북일 정상회담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갖는 정치.외교적 의미는 북일 양국 관계의 측면에서만 접근해서는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북일 양국관계의 의미에서만 접근하게 된다면 지난 2002년 9월에 발표된 ‘조일 평양선언’을 재확인하고 중단되었던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기로 하였다는 것밖에는 없다.

물론 이것도 커다란 성과이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갖고 있는 정치.외교적 의미를 다 설명할 수 없다.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갖고 있는 정치.외교적 의미의 핵심적 요체는 현시기 동북아시아 정세,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 정세에서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번 북일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에서 미국은 또 한번의 결정적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번 북일 정상회담 과정에서 일본정부와 미국정부 사이에 사전 협의가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이번 북일 정상회담이 미일 양국의 정책적 의도가 개입된 공동의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분석이다.

이번 북일 정상회담은 철저히 이북의 정치적 이니셔티브의 산물이지 미일 양국의 정책적 의도의 산물이 아니다. 미국은 일본정부가 이북과 정상회담을 갖는 것을 철저히 가로막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미국은 그럴만한 정치.외교적 능력을 상실하였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미국정부의 힘을 믿고 즉 미국정부가 북미대결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이북을 정치.외교적으로 고립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미국의 돌격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정부는 머지않아 이북 측의 정치적 항복을 받아낼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북일간 현안문제들도 자기들 측에 아주 유리한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고 향후 새롭게 조성될 동북아 질서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속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 정세는 미국과 일본 측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6자회담 내에서 미국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면서 오히려 고립되어 갔다. 게다가 지난 4.15 총선에서 남북대결세력이 패배하고 남북화해협력세력이 승리한데다가 뒤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중국방문으로 미국의 기존 대북정책은 실질적으로 파탄났다.

이러한 현실에서 일본 측은 미국에 의존해서는 국물도 없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휩싸여 독자적인 북일관계 개선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미국으로서도 이러한 일본의 시도에 제동을 걸 명분도 능력도 없었다. 미국으로서는 한반도 핵문제 해결 전까지는 수교하지 않겠다는 약속정도를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신세에 처한 것이다. 고이즈미의 평양방문과 북일 정상회담으로 일본정부는 더 이상 미국의 요구대로 대북 강경압박정책의 돌격대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향후 일본정부는 더 이상 대북 압박정책의 돌격대로 역할을 수행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미국에 북미대화와 협상을 설득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대북 적대적 대결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미국에게는 결정적인 타격으로 될 것이다. 미국은 이제 고립무원의 답답한 처지에 빠져버린 것이다.

3. 북일 정상회담의 평가와 전망

이번 북일 정상회담에 대해 북측에서는 어떻게 평가할까를 예측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것은 북측의 언론보도에서도 이번 북일 정상회담을 “조일 관계를 개선하고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는데 역사적인 사변”으로 된다고 평가한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보도로 보아 북측에서는 이번 북일 정상회담의 성과를 김정일식 외교의 또 하나의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결코 아전인수식 평가라고 말할 수 없다.

분명히 이번 북일 정상회담은 이북식 자주외교의 힘을 잘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동북아시아 정세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북이 정치.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쥐고 자기의 방향대로 끌고 나가고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북미 대화와 협상을 통한 한반도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해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현 우리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와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점에서 남과 북의 정치.외교적 협조가 절실히 요청된다.

이번 북일 정상회담의 결과로 한반도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대결에서 대화와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노선이 훨씬 유일한 고지를 장악하고 미국을 압박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전망이 열렸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채 대북 강경대결노선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6자회담의 전망은 밝지 않다. 그리고 미국의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북일 관계정상화 협상도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미국의 편이 아니다. 미국이 현재 취하고 있는 ‘시간끌기’ 전략은 미국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측은 이미 밝힌 대로 핵억지력을 계속 강화해 나갈 것이며,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경제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한 동아시아 나라들의 경제적 연대와 협력도 양적으로 질적으로 확대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은 더욱 불리한 처지에 빠질 것이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정치.외교적 주도권을 다시 잡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정부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박도 강화될 것이다. 문제는 우리정부가 이러한 압박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대화와 협상노선을 견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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