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생활 속의 미술

나는 경제전문가는 아니지만 경제에 관심이 많고 나름의 정보를 모으고 진단을 한다. 원래 화가는 생계에 별 관심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먹고 사는 문제는 천박하고 속된 사람들의 몫이기에, 높은 정신적 가치를 창조하는 화가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틀렸다. 내 주변의 화가는 대부분 경제문제와 생계 때문에 고생을 하고 힘들어한다. 대부분의 화가는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뛰어난 재능을 포기하거나 오랫동안 연마한 높은 기량을 버리기 일쑤이다. 경제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화가로서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라면을 먹으면서 그림을 그리 수는 있지만, 그림을 파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화가는 성직자나 수도자가 아니다. 그냥 미술을 전문직으로 하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미술이나 화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렇다고 잘못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나무라고 싶은 생각도 없다. 이건 소통의 문제이고, 구조의 문제이다. 화가와 일반 사람들은 너무 동떨어져 있다. 또한 서로 삶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하고 이해한 적이 별로 없다. 미술이 사람들을 소외시켰고, 그 때문에 화가들이 고생을 한다. 도대체 이런 현상을 누가 만들었고, 이것을 통해 누가 가장 이익을 얻는가?

대부분의 화가와 일반 사람들은 피해자이다. 이득을 본 자는 일부 미술특권층이다. 미술문화의 구조도 일반 사회구조와 닮았다.

나에게 개혁의 순위를 매기라면 당연히 ‘정치개혁’이 제일 먼저라고 생각한다. 그 다음은 ‘경제개혁’, ‘언론개혁’ 순이다.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개혁은 ‘종교개혁’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찌 보면 쉬운 것이 앞에 있고, 어려운 것일수록 뒤로 간다. 앞에 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 다음 개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도와 형식, 물질이 앞에 있고, 의식과 문화가 뒤에 있다. 결국 ‘의식개혁’으로 완성된다. 사람들은 으레 정신이 먼저 가고 제도와 물질이 뒤로 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매번 ‘의식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며 사람들을 몰아 세웠다. 물론 책임은 개개인에게로 돌아간다. 현실적인 조건이 없는 상태에서 개인의 책임만 강조하는 정치인이나 지식인 혹은 종교지도자는 무책임하다.

미술과 같은 예술은 종교처럼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미술이 사람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을 위로하거나 즐겁게 해 주는 역할로만 제한한다. 혹은 아예 현실과 세상을 등지라고 강요한다. 그야말로 미술가는 지구를 떠난 사람일까.

누가 이런 생각을 만들어 냈을까? 화가는 언제나 현실 속에 있다. 먹고, 자고, 생활하며, 사람들 속에서 희노애락을 같이 한다. 화가는 현실 생활에서 창작의 자양분을 받는다. 불만족스러운 세상을 극복하고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일이 어찌 화가만의 생각이랴.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한다. 다만 사람들은 표현하고 창조할 방법을 모르거나 능력이 부족할 뿐이다.

독재자나 기득권층은 예술가를 싫어한다. 예술가들은 불만족을 첨예하게 느끼고 거침없이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술가 개개인은 약자에 속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감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배문화를 만들어 내거나 협조하는 일부 예술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가들을 무력화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들은 예술가들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고집불통인 사람 혹은 정신 나간 사람 따위로 매도하는 소문을 퍼트린다. 예술가들과 대중들을 이간질시키고 서로를 소외시키도록 조장했다.

예술은 높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예술은 언제나 힘 있고 가진 자의 전유물이었고 대중을 지배하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의식의 변화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신념과 의지는 강한 의식에서 나온다. 예술은 대중에게 돌아가야 한다. 대중은 예술을 손에 주이어야 한다. 창조정신과 표현력, 다양성과 개성, 집중력, 실험성, 도전정신 따위를 대중이 몸으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형식과 제도, 민주주의와 민족의 통일은 대중에게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삶과 예술은 다르지 않다. 예술은 삶을 담아내며, 삶은 예술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목장의 아침

▶함흥청년염소목장의 아침/차진, 최소정, 리지석/조선화
이번에 소개할 <함흥청년염소목장의 아침>이란 작품은 차진, 최소정, 리지석 세명의 화가가 공동 창작한 조선화이다. 작품에는 작가들의 서명이 보이지 않는다. 북한은 사회주의 나라이기에 공동작품은 사회의 소유라는 의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여러 명의 화가가 함께 한 작품을 제작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북한미술의 특징이고,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점 중에 하나다.

이 작품은 한가로운 목장의 아침을 낭만적으로 표현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염소와 짙푸른 숲과 초원만이 보인다. 연두색과 짙은 녹색의 초원 위에 수많은 하얀 염소가 방목되어 있는 모습은 장관이다. 가깝고 먼 거리의 느낌이 잘 표현되어 눈 맛이 시원하다. 멀리 산 중턱에 걸린 구름은 이곳이 아주 높은 고산지대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는데 염소사육이 도움이 된다는 내용이다. 염소는 생명력과 번식력이 뛰어나다. 또한 잔병이 없고 돌림병에 걸릴 확률도 적다. 풀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잘 적응하는 특성이 있어 일찌감치 북한에서는 사육을 장려해왔다.

둘째는 함흥청년염소목장의 성과를 널리 알리는 내용이다. 함흥은 함경도에 있고 흥남하고도 가깝다. 아마도 높은 산맥을 등지고 동해가 보이는 고산지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멀리 보이는 초원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목장의 일꾼들이 거칠고 험한 산을 조금씩 벌목을 해 넓힌 것이다. 염소들이 풀을 뜯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낸 것이다.

북한에서는 높고 험한 산이 많고 들과 평야가 적다. 산은 자원이자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험한 산을 유익하게 바꾸어 염소사육에 성공한 함흥청년염소목장의 사례는 다른 목장에게는 큰 귀감이 되었을 것이다.

북한에서는 이렇게 특정 지역이나 장소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 많다. 무슨 말이냐면, <함흥청년염소목장>이라는 제목처럼 어떤 광산이나 제철소, 혹은 농장, 사업장의 성공적인 경영이나 성과를 작품에 담는 것을 말한다. 마치 TV에서 성공한 공장이나 농장을 찾아 인터뷰하고 취재하는 것과 비슷하다.

북한에서 TV나 라디오에서 이런 사례를 소개하는 일은 빈번하다. 하지만 화가들이 직접 현장에 투입되어 작품으로 표현하는 경우는 우리와 아주 다르다. 다른 나라에도 이런 사례는 없을 것이다.

북한에서 화가는 꿈속을 헤매거나 신선처럼 그림을 그리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과 현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라면 목장이든, 광산이든, 혹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공사장이든 어디든지 달려가 붓과 색채와 창조력으로 인민들의 삶을 표현한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능력이나 의지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당의 뒷받침과 미술가조직의 기획이 있어야 한다. 실제 북한 화가는 인터뷰에서 공적인 작품을 절반 이상 창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을 보는 함흥청년염소농장의 일꾼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광활한 목장과 인민들의 식량이 될 건강한 염소를 보는 감회는 어떨까? 이것이 미술작품으로 표현되어 많은 사람들이 감상한다는 것을 어떻게 느낄까?
사실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일꾼들의 가슴속에는 자부심, 자신감, 희망, 기쁨, 보람...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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