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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서 3당합동과 남로당의 출범 ④ - 남로당 출범과 여운형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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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3.09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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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장례식
여운형은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으나 지나친
좌경화에 반대하여 이를 탈피하고 근로인민
당을 조직하여 당수로서 정치활동을 하던 중
1947년 한지근에게 암살당하였다.
3당 합동 문제를 둘러싸고 불거진 좌익정치세력 내부의 분열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문제는 당시 좌익정치세력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좌익 3당은 변화하는 정국에 주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대중적 기반 위에서 합법적 대중정당을 결성하기 위해 3당 합당을 추진했는데, 만일 이 과정에서 생겨난 이견 때문에 분열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당초의 목표를 실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다가는 아예 시도하지 않은 것만 못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좌익정치세력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조선공산당의 박헌영계열(간부파)과 인민당의 48인파, 신민당의 중앙간부파가 합동하여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였지만, 여기에 반발해 조선공산당의 대회파(반 박헌영계열)와 인민당의 31인파, 신민당의 반간부파가 모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좌익세력이 분열된 가장 중요한 원인은 3당 합당에 대한 주도권 문제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헌영과 여운형의 3당 합당에 대한 이해관계가 달랐던 것입니다. 박헌영은 좌익 3당의 합당을 통해 민전을 강화하고 투쟁력을 높이겠다는 것이었고, 따라서 3당 합동은 당연히 당세가 큰 남로당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여운형은 3당 합동 과정은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주도할 보다 대중적인 정당을 세우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합당과정은 합법적이고 대중적이며 민주적인 절차를 밟아야 하며, 그것을 인민당과 자신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차이를 해소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좌익 3당 가운데 공산당은 당세가 가장 강했습니다. 또 공산당은 언제든지 인민당이나 신민당을 뒤흔들 수도 있었습니다. 인민당과 신민당 내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박헌영 계열은 반대세력을 설득하려는 노력보다는 쉬운 방법을 택했습니다. 인민당과 신민당 내의 프락치들을 움직여 일방적으로 끌고 가려했던 것입니다.

합당 문제가 수렁에 빠져들자 박헌영은 곧바로 칼을 빼어듭니다. 조공의 간부파, 인민당의 48인파, 신민당의 중앙간부파만으로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기로 마음먹은 것입니다. 이때 북조선노동당의 박헌영 지지 성명은 커다란 힘이 되었습니다. 북로당은 8월 30일까지 북로당 결성대회에서 무조건 합당을 지지한다면서 박헌영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북한으로서는 정세가 엄중한 상황에서 더 이상 내분에 싸여 있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한 것입니다.

1946년 9월 4일 신민당 회의실에서 3당합동준비위원회 연석회의를 열고, 여기서 합당결정서를 정식으로 가결합니다. 다음 기초위원이 제출한 선언 및 강령(초안)도 토의합니다. 그리고 이미 조직된 3당합동준비위원으로 남조선노동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결당 준비공작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합니다. 반대파에서는 당연히 반발했겠지요.

이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3당 합당을 위한 양파간의 대립과 공작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던 9월 6일 공산당의 핵심 간부 이주하가 경찰에 구속된 것입니다. 거기다가 9월 7일에는 박헌영에게도 체포령이 내립니다. 이어 공산당이 주도하는 `9월 총파업`이 벌어집니다. `9월 총파업`은 `10월 항쟁`으로 발전하고 정국은 급변하게 됩니다.

상황이 급변하면서 반대파의 대회소집 주장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됩니다. 10월 초순 박헌영도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갑니다. 3당 합당 문제도 매듭짓지 않은 채 심복 이승엽에게 맡기고 갔습니다.

결국 3당 합당은 박헌영 계열의 일방적인 주도 아래 진행됩니다. 11월 23일부터 24일까지 서울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남로당 결당식이 있었고, 12월 10일에는 중앙본부가 조직됩니다. 위원장에 허헌(신민당), 부위원장에 박헌영(공산당), 이기석(인민당)이었으며, 중앙위원은 공산당 14명, 인민당 9명, 신민당 6명이었습니다.

이때 반대파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요? 무조건 합당에 반대하던 각 당의 세력들은 10월 16일 모여 사회노동당을 결성하기로 하고 강령(초안)을 발표합니다. 이어 11월 1일에는 사회노동당 임시 중앙위원과 감찰위원을 선출합니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백남운, 강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로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했던 여운형은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여운형은 공산당과 좌익 세력 내부의 여러 분파를 의식하면서도 `원만한 좌익의 단합`을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두 개의 노동당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의 대중정당으로 합동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11월 7일 여운형은 남로당에 대해 무조건 합동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남로당측의 이승엽은 사로당의 해체만을 고집합니다. 11월 16일 사로당은 다시 남로당에 무조건 합동하자는 서한을 보내지만 남로당은 끝내 거절한 채 결당식을 감행합니다. 이로써 3당 합동은 남로당과 사로당으로 분열된 채 끝납니다.

그러나 사로당은 곧바로 사라지는 운명에 처합니다. 1947년 2월 27일 제1회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발전적 해체`를 결의함으로써 역사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사로당이 이렇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1946년 11월 16일 북로당에서 사로당을 부정하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이 당의 정당성에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또 남로당이 `과거를 반성(자기비판)하기만 하면 포용하겠다`는 포섭공작을 전개하면서 사로당의 기반이 와해되기 시작합니다.

결정적으로는 여운형의 거취입니다. 사로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던 여운형은 취임도 하지 않고 있다가 12월 4일 [좌우합작·합당공작을 단념하면서]라는 일종의 자기비판서를 발표하고 사실상 정계은퇴를 선언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여운형은 왜 정계은퇴를 선언했을까요. 여운형으로서는 자신의 주도로 진행될 것으로 믿었던 3당 합당이 박헌영의 일방적인 독주로 끝나버렸고, 좌우합작운동도 사실상 난관에 봉착해 더 이상 출로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뒤 여운형은 1946년 12월 28일부터 1947년 1월 8일까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때 김일성은 여운형이 아직도 할 일이 많다면서 정계복귀를 권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특히 남로당의 결성 과정에서 소외된 좌익세력을 재결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지요.

평양에서 돌아온 뒤 여운형은 광범위한 민주세력의 결집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신당조직에 착수합니다. 그렇게 해서 1947년 4월 26일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하는 근로인민당 창립선언 초안이 발표되고 5월 24일 근로인민당 결성대회가 있었습니다. 여운형은 근로인민당의 창당 작업과 함께 재차 좌우합작운동에 나서지만 1947년 7월 19일 암살되고 맙니다.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근로인민당도 사실상 형해화되었고, 좌우합작운동도 종말을 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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