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평화

평화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만족할만한 대답을 내놓기란 쉽지 않다. 전쟁의 반대말 정도나 사전적인 의미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답답하다. 이런 추상적인 개념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래서 사전적 의미는 현실의 여러 상황 앞에서 언제나 무기력하다.

추상개념은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시대적 요청에 따라 달라진다. 전쟁 상태에 있다면 아무래도 전쟁을 멈추는 것이 평화가 된다. 종교분쟁이나 이념의 대립이 있다면 서로 상대방을 인정하고 화해하는 것이 평화가 된다. 정치적으로는 화해나 상생이 곧 평화이다. 개인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문제나 고민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평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그냥 입바른 소리일 뿐이다. 재미도 없다. 전쟁을 멈추는 것에도 아주 많은 방법이 있다. 정복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고, 패배한 것도 전쟁을 멈추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처럼 휴전협정으로 포성만 멈춘 경우도 있고, 이라크 전쟁처럼 종전선언은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전쟁상태에 놓인 경우도 있다. 어떤 쪽에서는 평화가 왔다고 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평화가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종교분쟁이나 이념대립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이념을 버리지 않고 상대방을 인정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서로 더럽게 싸우다가 경찰이나 판사에 의해 억지로 화해하고 악수하지만 진짜 마음은 다르다. 지금은 힘이 없어 화해를 하지만 언젠가 힘이 생기면 복수할 것이라는 마음이 있는데도 평화가 왔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평화란 대부분 힘 있는 자의 논리일 뿐이다. 죽임이나 굴욕을 당하고 인격을 침해당했을 때, 혹은 가진 것을 빼앗긴 사람에게 평화는 없다. 울분과 분노와 적개심이 가득 찬 평화가 어디 있는가. 이라크 전쟁에서 평화란 미국의 평화일 뿐이다. 전쟁을 통해서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라크인에게는 복수가 끝나야 평화가 온다.

진정한 평화란 모든 욕심을 버렸을 때만 가능하다. 개인이든 국가든 마찬가지다. 만약 현실에서 탐욕과 욕망을 버린다면 곧바로 지상낙원이 된다.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환경을 파괴하는 문제를 만들었지만 그것이 물질적으로 더 발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못 먹고 못사는 평화는 상상할 수 없다. 또한 이런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없는 사람은 더 많이 가지기 위해 평화를 버리고, 있는 사람은 유지하기 위해 평화를 버린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서로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지만 서로를 설득하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대립의 중간에 끼여서 둘 다 잘못되었다든가 혹은 둘 다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버려야 평화가 온다고 권할 자신이 없다. 다만 포기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슬픈 평화

▶ 7.27의 아침/안영일/조선화/2002
<7.27의 아침>이란 조선화 작품을 소개한다. 이 작품은 북한화가 안영일에 의해 2002년도에 제작되었다. 작품 제목이 <7.27의 아침>인데, 7월 27일은 북한에서는 ‘전승기념일’이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휴전협정체결일’이다.

작품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전승기념일’날 아침, 유치원생 쯤 보이는 어린이들이 ‘전승기념조형물’이 있는 장소로 견학이나 참배를 가고 있다. 배경에는 거대한 조각상이 보이는데 한국전쟁에서 인민군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형상이다. 하얀 옷과 하얀 모자를 쓴 젊은 여선생이 아이들을 인솔하고 있다. 아이들은 서로 손을 잡고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풍선을 든 아이들도 있다. ‘전승기념일’이니까 북한에서는 좋은 날이다. 제일 앞장선 남자아이는 해군복장을 하고 장난감 총을 메었다. 걸음걸이가 마치 군인처럼 당당하다.

이 작품에서는 여러 요소들이 서로 대비를 이루거나 이질적인 부분들이 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먼저 전쟁과 평화가 대비를 이룬다. 뒤에 보이는 전쟁조형물과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짝이다. 색상도 검정과 흰색으로 처리했다. 어떤 신념과 열정으로 격앙된 군상과 맑은 어린이도 대비를 이룬다. 해군복장을 하고 장난감 총을 멘 남자아이와 천진난만하게 따라오는 아이들과도 대비를 이룬다. 여선생의 흰옷과 흰 모자는 평화를 상징하는지 혹은 경견함을 나타내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화가는 이 작품을 통해 많은 것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보통 극단적인 대비는 시각적 충격을 주거나 주제를 강하게 드러낼 때 사용하는 화면구성이다. 하나는 좋고 대비되는 다른 요소는 나쁜 식으로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대비는 조금 다르다. 긍정적인 대비방법이다. 다시 말해 전쟁과 평화, 어른과 아이, 밝은 색과 어두운 색, 천진난만과 열망 따위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로의 상반된 요소는 어느 한쪽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쟁에서 이겼기에 해맑은 어린이가 있을 수 있고, 무력이 있어야 평화가 있으며, 앞서가는 사람이 있어야 따라가는 사람이 편하고, 통제와 지도가 있어야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화면구성은 북한미술 특유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방법 때문일 것이다. '비판적 사실주의‘가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 사람들의 마음을 환기시킨다면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사회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시킨다.

아마 화가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7월 27일은 전승기념일이다. 미국과 싸워 이긴 날이다. 미국의 무력에 맞서 무력으로 싸워 이겼다. 전쟁에 이기지 않았더라면 평화는 없다. 어린이는 우리의 희망이고 꿈이다.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려면 무력으로 싸워 이긴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군정치’이다. 미국의 위협을 이겨내고 힘 있는 나라를 건설하려면 강력한 군사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순결한 주체사상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무장한 노동당과 당원의 지도 하에 힘차게 나아가자’

작품에서는 어린이와 여선생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것은 상징일 뿐이다. 여선생은 지도자나 혹은 노동당, 당원으로, 어린이는 보통 인민으로, 해군복장의 남자아이는 군인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북한미술에서 어린이를 표현하는 것은 대부분 사회적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어린이는 희망을 나타낸다. 상징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감상자의 시선을 잡아두고 감성을 열기 위한 고도의 조형적 장치이다.

북한에서도 평화는 멀고 험난한 길이다. 그리고 슬프다. 해군복장에 장난감 총을 멘 아이를 등장시키는 화가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이다. 풍선을 들고 유원지를 향해야 할 아이들이 총을 앞세우고 전쟁기념장소를 걷다니...

그러나 조심스럽게 화가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무겁고 칙칙하게 표현된 전쟁조각상을 뒤로 보내고, 비둘기들이 힘차게 날고 있는 곳으로 밝게 나아가는 어린이의 희망을...<*>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