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불만족에 대하여

열등감과 불만족은 다르다. 사람들은 이 둘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차이를 혼동한다. ‘불만’은 늘 ‘불평과 짜증’을 달고 다녔다. 그래서 ‘불만’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치 ‘자유’라는 말에 ‘방종’이 따라 붙듯이 말이다. ‘사회적 불만’은 ‘개인적 열등감’이 되어 버린다.

나도 학창시절을 열등감 속에서 살았다. 부족한 손재주와 게으름, 혹은 태생적 한계에 대한 열등감은 청춘시절을 괴롭혔다. 이것이 열등감이 아니라, 사실은 불만족이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후였다. 내게 느끼는 불만족,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느끼는 불만족이었다.

현실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었다. 거대한 벽이 있었고, 독재가 있었으며, 획일적인 틀이 있었다. 청춘시절은 이 불만족스러운 세상을 탈출하거나 이겨보려고 발버둥을 친 역사였다. 나의 불만족과 타인의 만족 사이에서 손가락은 언제나 스스로에게 돌아왔고, 머리와 언변이 부족한 나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불만족인 나는 논리와 이론, 실천이 필요했지만 만족한 타인은 굳이 자신을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만족한 타인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약간은 눈을 아래로 깔면서...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예수나 부처의 삶을 공부하면서 불만족과 열등감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예수가 현실에 만족했더라면 평범한 목수로 살았을 것이다. 또한 부처가 만족했더라면 왕이 되어 부귀영화를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분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을 뛰쳐나왔다. 그리고 불만족스러운 현실과 인간에 대해 깊게 명상했다. 다시 불만족스러운 현실로 돌아와 이것을 개선하고 바꾸기 위해 여생을 살았다. 때론 비참하게 혹은 구차하게 삶을 마감했다.

미래는 불만족한 사람들의 것이다. 삶에 불만인 사람들이 철학과 예술과 과학과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작은 물건이 발명되거나 개선되는 것도 모두 불만족의 결과이다.

어떤 보수적인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에서 미술을 열등감의 산물처럼 표현했다. 현실을 이겨낼 수 없는 나약한 화가가 미술작품 속으로 도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훌륭한 작품이 나왔다고 했다. 나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론이 아니라 경험으로도 그렇다. 열등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나는 아예 붓을 들지도 못했다.

미술은 불만족이 꾸는 아름다운 꿈이다. 만족스런 세상과 인간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예술은 침침한 골방에서 은밀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한 불만족이 열등감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구체적인 표현과 사회와의 관계망이 필요하다.

만족은 원하는 것을 성취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족하면 보수가 되고 그걸 지키려고 하면 꼴통이 된다. 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완벽한 삶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배고프고 목마르다. 조국이 분단된 것도 불만족이고, 남의 나라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도 불만족이다. 돈 있다고 뻐기는 사람에게도 불만족이고 민주주의가 더딘 것도 불만족이다. 이 불만족이 내 작품 활동의 밑거름이다.
불만족스러운 나는 살아있다.


불만에 가득 찬 소년

▶나도 공부하고 싶어요/리문길/조선화/1997
이번에는 북한화가 리문길의 <나도 공부하고 싶어요>라는 작품을 소개한다. 조선화 형식으로 그렸으며, 제작연도는 1997년이다. 이 작품은 일제시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북한에서 일제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수탈과 항일무장투쟁이고, 또 하나는 봉건지주의 횡포이다. 이 작품은 봉건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학교와 공부라는 관점으로 접근하고 있다.

우리 전통 사회에서 학교와 지식은 아주 커다란 권력이다. 학벌과 지식의 독점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돈과 권력이 있어야 좋은 학교를 가고, 좋은 학벌과 지식은 또다시 돈과 권력에 접근하는 수단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가진다는 것은 곧 돈과 권력이 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 미술에서 이와 비슷한 소재의 작품을 자주 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짚으로 만든 우비를 쓰고 학교 입구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소년은 머슴이나 종이다. 허름한 옷에 신발도 없다. 우측 상단에는 무슨 소학교라는 간판글자가 보이는데, 지금 같으면 중, 고등학교 정도 될 것이다. 소년 머슴은 비 오는 날, 주인집 아들에게 우산을 씌워 주려고 기다리고 있다.

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표정은 밝다. 그에 반해 소년 머슴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다. 아마 주인집 아들과 소년 머슴의 나이는 비슷할 것이다. 화가는 학교 안에서 공부하는 소년과 학교 밖에서 기다리는 소년을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이 둘 사이에는 학교라는 거대한 구조가 가로막고 있다. 화해와 상생은 불가능하다.

소년 머슴의 표정은 아주 심각하다. 작품 제목이 ‘나도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되어 있지만, 희망찬 표정이 아니다. 학교에 들어가서 주인집 아들처럼 공부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소년 머슴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소년 머슴의 표정은 절망과 분노와 불만이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화가는 작품에서 봉건지주를 타도하거나 싸워야 한다고 속삭이지는 않는다. 그런 장치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런 비참한 현실을 담담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일제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접근한다. 이런 부분이 미덕이다.

그동안의 북한미술이 직접적인 표현에 치중한 것에 반해 이 작품은 간접적인 표현방식을 취하고 있다. 간접적인 표현 방식은 감상자의 정서와 생각이 더해져야 느낌이 온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울림은 훨씬 크다.

소년 머슴의 불만이 그저 열등감과 체념으로 끝날지 혹은 인식의 발전과 실천으로 극복해 나갈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작품을 보는 감상자는 어느 쪽인가? 그 차이는 학교 안의 주인집 아들과 학교 밖의 소년 머슴 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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