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ynano@hanmail.net)


어르神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 누구나 늙고 병든다. 그리고 죽는다. 돈 많은 사람도, 권력 있는 사람도, 동네 아저씨 아줌마도 늙음과 죽음 앞에서는 평등하다. 한 손에 돈다발을 들고 또 한 손에 권력을 들어도 가는 청춘 막을 수 없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다. 이 진리를 부정할 때 부질없는 욕망과 고통이 생긴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에 빠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쁘다. 삶의 의욕이 생긴다. 순간순간 현실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느낀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40세 전후로 물맛을 느끼고, ‘수제천’, ‘영상회상’ 따위의 우리 전통음악과 새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훌륭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험이 깊어지고 삶의 폭이 다양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릴 적 내 모습과 지금의 모습만 비교해 봐도 그렇다. 일이 많아 스트레스를 많고 어깨에 짊어질 삶이 무겁긴 하지만 예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졌고 풍부해졌다고 자부한다.

나는 연륜이 풍부한 노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미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오래 산 노인의 경험담과 삶을 통해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일은 무척 재미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젊게 사는 비결일 수도 있다. 현재의 신체적 나이보다 10년 쯤 정신적 지혜와 경험을 가지는 것이다. 60세 할아버지가 50세 아저씨를 보고 ‘네 나이면 쇳덩이도 씹어 먹겠다’라는 얘기를 흔히 들을 수 있듯이 10년이란 세월을 무엇이든지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다.

요즘 세대간의 갈등이 심하다. 젊은이와 늙은이의 정서적 격차를 넘어 반목하는 현상도 벌어진다. 못된 의도를 가진 언론매체가 조장한 탓도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세대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세대간의 차이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젊은이의 진취적인 생각과 새로운 문화를 수혈 받지 못하는 늙은이는 그저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늙은이의 경험과 연륜을 배우지 못하는 젊은이는 그저 하룻강아지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무슨 골프채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상점 유리창에 붙어있는 광고를 한참동안 멈춰 서서 바라보았다. 광고의 내용은 골프의 황제라 불리는 타이거 우즈의 모습이었다. 젊은 타이거 우즈와 늙은 캐디의 모습이 나란히 들어있었다. 키가 크고 젊은 우즈에 비해 캐디는 허연 수염이 난 작고 뚱뚱한 체구의 늙은 모습이었다. 이 둘은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당한 타이거 우즈의 모습과 늙은 캐디의 모습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광고가 골프채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광고는 골프채와 관련 없이 묘한 감동을 주었다. 젊은 애송이 타이거 우즈를 훈련시키고 풍부한 경험을 가르쳐준 사람은 바로 늙은 캐디였다. 아무리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났다 하더라도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하면 소용없다. 또한 늙은 캐디는 자신의 꿈을 젊은이를 통해 이루고 있었다. 젊은 타이거 우즈를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중국 무협소설이나 영화에도 흔히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젊은이의 진취적인 생각을 착취해서 노욕을 채우는 못된 늙은이들 천지이다. 대학원생의 논문을 빼앗거나 기술력을 싼값에 착취하는 늙은 교수들의 이야기는 흔하다. 젊은이의 생각과 문화를 이해하기보다는 무조건 훈계하려 들거나 과거 타령만 늘어놓은 늙은이도 주변에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타이거 우즈의 늙은 캐디의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이렇게 극단적인 대립의 원인은 무엇보다 늙은이의 소외에 있다. 젊은이든 늙은이든 사회에서 소외를 당하면 싸움이 일어난다. 구매력이 있는 젊은 사람들 중심으로 소비문화가 만들어지면서 늙은이의 소외는 빠르게 진행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터넷 따위의 최첨단 기술과 문화가 늙은이들이 따라 올 수 없을 만큼 빨리 보급되어 버린 이유도 있다.

‘아빠의 청춘’이란 노래처럼 늙은이도 청춘이 있고 미래가 있으며 소중한 삶이 있다. 늙은이의 경험과 연륜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젊은이의 미래를 밝혀주고 도움을 주는 것은 젊은 시절을 열심히 산 늙은이의 미덕이다.

청춘을 열심히 산 당신, 수많은 역경과 고통 속에서 삶의 끝을 놓지 않았던 당신, 그 험난한 인생을 살면서 어린 자녀를 먹이고 공부시키고 꿈을 심어준 당신, 회한과 후회도 깊은 주름 속에 녹여내 버린 당신, 아낌없이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물리고 흐뭇해 하는 당신, 이런 당신을 우리는 존경하며 이렇게 부른다.

‘어르神’

늙은 전사의 노래

▶결전의 노래/ 여정남/ 조선화/ 2002
북한은 매우 어려웠다. 1990년대 초 커다란 홍수와 가뭄이 들었다. 땅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말라비틀어진 곡식 위로 홍수가 쓸고 지나갔다. 북한 인민의 정신적 기둥인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 여기에 북핵문제로 인한 미국과의 관계는 전쟁 일촉즉발의 벼랑으로 몰고 갔다. 탈북자가 생기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생겨나고, 어린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노동력이 없는 늙은이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이 어려운 시절을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그려진 북한의 작품은 처절한 희망을 담고 있는 내용이 많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인정하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편으로 당과 당원의 헌신성을 요구했다. 또한 군사력을 전면으로 내세웠다. 북한의 지도부가 솔선수범함으로서 위기를 이기려고 했던 것 같다. 미술작품에는 온통 이런 내용이었다.

북한 화가 여정남이 그린 <결전의 노래>는 이런 북한의 현실이 잘 담겨있다.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자. 아코디언과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하는 남녀 주인공이 있다. 그 뒤로 ‘강성대국’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보이고, 많은 군인과 노동자들이 크레인이나 중장비와 함께 공사를 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라남의 봉화’, ‘결사관철’, ‘하루계획 120% 초과’라는 구호들이 보인다. 확실하진 않지만 수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공사장 같다.

제목이 ‘결전의 노래’인 것은 아코디언 연주에 맞춰 여성이 부르는 노래의 곡명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 작품의 주형상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늙은 남성과 노래를 부르는 늙은 여성이다. 군복을 입고 앞가슴에는 훈장을 주렁주렁 단 늙은 전사들이 젊은 군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늙은 남성의 얼굴에는 비장미가 흐르고,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하는 늙은 여성의 표정은 한껏 감정이 올라와 있다.

이들은 현역 군인이나 고급 장교가 아니다. 현역 군인이나 장교라면 현장에서 진두지휘를 해야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리는 없다. 이들은 퇴역한 군인이다. 이 정도의 나이면 손주의 재롱에 재미를 붙일 나이다. 환갑이 넘었다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강성대국을 건설하기 위해 모두 떨쳐나섰다. 늙은이라고 뒤로 물러서서 ‘에헴’할 수는 없다. 노동력을 상실한 늙은이들이 군복을 입고 나섰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젊은이들의 뒤편에서 서서 ‘결전의 노래’를 목이 쉬도록 부르며 격려하고 잡일이나 하는 것이다.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훈장을 보라. 틀림없는 고급 장교다. 그런데 왕년의 장교 체면은 간 곳이 없다.

이들은 늙었지만 청춘의 가슴을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을 보는 북한의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몸과 마음이 끓지 않겠는가. 감동의 지점은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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