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환(통일맞이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기획정책위원장, 민화협 정책위원장)


우리는 우리 자신, 남쪽의 모든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함과 동시에 북쪽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비판은 네가 살아야 내가 살고, 내가 살아야 네가 산다는 공생공영을 지향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이리 될 때에라야 우리는 새로운 종합을 해낼 수 있습니다. 통일과 함께 우리가 진정 커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문익환,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입니다』, 삼민사, 1991).

올해는 늦봄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신지 십년 째 되는 해이고 세상을 놀라게 하며 방북을 결행한지는 꼭 15년이 되는 해이다. 올해의 늦봄 10주기, 방북 15주년은 내외의 여러 조건으로 인해 새삼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늦봄은 누가 뭐라 해도 '이남을 대표하는 통일인사'이지만 그간의 권력들은 그를 언제나 '과격한 친북인사' 정도로 왜곡해왔고 그로 인해 그가 전개한 통일운동과 그 성과는 늘 부당하게 외면당해왔다. 지난 김대중 정부에 들어와서, 특히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북관계가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지만, 그래도 이남에서 늦봄은 여전히 무언가 '불온한', 경원시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이제는 늦봄의 방북과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 그리고 4.2공동코뮤니케의 발표 등 늦봄의 핵심적인 활동성과가 과거의 냉전적 기준으로 재단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화해와 단합의 관점에서 분명히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늦봄 방북의 역사적 의미의 첫 번째는 무엇보다도 그의 활동과 노력이 6.15공동선언의 역사적 기초가 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늦봄은 북의 고려연방제와 남의 민족공동체통일방안 사이에 서로 합치할 수 있는 지점이 있고 이 사이의 공통성을 기초로 접근하면 민족의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보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직접 방북을 결행, 김일성주석과 회담하였다.(이승환, 「문익환 목사 5주기의 의미」, <통일맞이늦봄문익환목사기념사업 5주기 행사 보도자료>, 1999. 1)

그리고 그 회담에서 그는 마침내 '연방제는 급속히 할 수도 있고 천천히 추진할 수도 있다'는 역사적 합의를 얻어냈던 것이다. 이것은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남북연합'을 연방제의 느슨한 한 단계 혹은 형태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남과 북이 통일방안의 차이를 넘어서 민족통일의 합의에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늦봄은 이 합의를 토대로 노태우정권, 김영삼정권 등 이남의 권력을 상식과 도리, 그리고 민족적 열정을 가지고 직접 설득하고자 하였다. 비록 그의 노력은 생전에 그 결실을 얻지 못했지만, 2000년에 그의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의 최고지도자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민족통일의 대장전이 된 6.15공동성명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노력은 마침내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6.15공동선언에서 문익환-허담 4.2공동코뮤니케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6.15공동선언의 제2항, 즉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 사이에 서로 공통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해나간다는 부분이다. 이 2항은 4.2공동선언의 점진적 연방제를 언급한 제4항과 제6항의 "남북교류와 점진적 연방제 통일제안이 두개 한국을 지향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부분과 연동된다.

그러나 6.15공동선언에서 자주원칙을 확인한 1항이나 이산가족 교환방문 등을 다룬 3항, 다방면의 교류협력을 제기한 4항, 그리고 당국간 대화를 언급한 5항 등은 모두가 4.2공동코뮤니케의 자주원칙을 언급한 제1항, 이산가족문제와 다방면의 교류를 언급한 제3항과 당국간 대화를 제기한 제9항 등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양자 사이의 관계는 일면적이 아닌 전면적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둘째로는 그의 방북과 통일운동 성과가 '반공에서 화해로' 역사적 변신을 시도해온 이남 민주화운동의 역사성을 가장 높은 수준에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익환 통일운동의 역사적 의의가 "무엇보다도 반공주의와 분단국가주의를 극복한 옳은 의미의 민족주의에 있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강만길, 「문익환통일론의 정립을 위하여」, 97년 1월 문익환목사 3주기 추도행사에서 행해진 강연 중에서)

문익환을 공생활로 나아가게 했던 '스승' 격의 장준하가 철저한 반공주의와 소극적인 분단 용인 지식인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소박한 통일지상주의자로 나아갔다면, 휴전협정 당시 미군의 통역관이었던 문익환은 장준하에게 남아 있던 분단국가주의의 잔재를 철저히 떨쳐내고 통일운동을 민족자주운동이며 민주화운동과 일체화된 최고의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즉 그는 장준하의 "국가형태야 어찌 되든지 덮어놓고 통일하고 보자는 일부의 환상적 논리에는 엄숙한 반성이 촉구되는 바이다. 또한 우리의 '자유와 민권'이 침해될 가능성을 예상시키는 여하한 형태의 중립주의도 용납될 수 없다"는 당시 남한 지식인의 일반적인 '반공, 분단용인적 주장'과 문익환-허담의 4.2공동코뮤니케 속에 담긴 "민주는 민중의 부활이고 통일은 민족의 부활이며 민중과 민족의 부활은 자주 없이는 성취될 수 없다"는 늦봄의 주장 사이에는 일종의 환골탈태(換骨奪胎)가 존재하고 있다. 이 환골탈태를 통해 그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남한 민주화운동 전체를 '민족민주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의 주역으로 이끌어 올렸던 것이다.

셋째로 그의 방북 이후 남과 북에서 통일운동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의 방북 활동이 가져온 직접적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역사적 합의 이후 북은 사실상 '고려연방제' 대신 '느슨한 연방제'를 내세우기 시작했으며, '남북 기본합의서'의 제정과 함께 93년에는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발표하는 등 민족화해와 협력에 더욱 적극적 태도를 보였다.

문 목사의 방북 이듬해인 90년의 신년사에서 김일성 주석은 '1국가에 이르는 과정'과 관련하여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적 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치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합의할 용의가 있"다며 '단계적 연방제'='느슨한 연방제'를 제기하여 연방제 문제에 대해 전례 없이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또 그는 이 신년사에서 '1체제에 관한 문제'는 후대에 맡기자며, 연방제를 실현하기 위해 사상과 제도를 초월한 민족대단결을 각별히 강조했는데,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을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의 민간통일운동은 늦봄의 합의에 고무되어 통일운동이 더욱 대중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통일운동과 관련하여 남과 북 사이에 공식적 연계를 맺으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정파와 신앙, 정견의 차이를 넘어' 민족적 대단결을 이루려는 노력이 범민족대회 등을 통해 추진되었다. 90년대 전반기의 통일운동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는 여러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이 시기의 통일운동이 이후 통일운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넷째로 그는 통일운동을 '압도적 다수의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했으며, 그런 맥락에서 초지일관 노력해온 통일운동의 진정한 개척자였다.

그는 통일운동을 골방의 운동가 중심의 운동이나 정파 간의 논쟁에서 벗어나 진정한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가 방북한 것도, 범민련을 결성하고 또 이를 스스로 해체하려 한 것도, 민족회의와 통일맞이를 세운 것도 모두 통일운동의 대중화라는 일관된 맥락에서 추진했던 것이었다.

그는 일부 인사들로부터 개량주의라는 오해와 공격을 받으면서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생의 마지막까지 통일운동과 통일운동 조직이 소수의 운동, 문턱 높은 관문주의, 남쪽 대중운동의 실정에 맞지 않는 과도한 조직형식주의 등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더 나아가 그는 통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운동으로서 '통일맞이운동'을 전국민적 운동으로 전개하려 하였던 것인데, 불행히도 이 사업을 시작하자마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또한 통일 과정에서 관과 민의 역할을 바르게 설정하고 이를 민의 입장에 서서 구체화하려 했던 최초의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늦봄이 자신의 방북 성과를 가지고 남쪽의 노태우나 김영삼 정부를 설득하려 했던 것은 결코 '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통일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할 민과 관의 각이한 역할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걸쳐 시작된 세계적 탈냉전을 활용하여 남측 당국을 최대한 유연화시키고 그를 바탕으로 '고립된 냉전의 섬'에서 명실상부한 '압도적 다수의 대중적 통일운동'을 실천해나가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른 체제에서 다른 생각과 생활방식을 가지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서로 차이를 인정하며 크게 하나가 되는' 화해와 관용의 철학을 통일운동에 도입하려 했던 것이나, 냉전해체 국민운동으로서 관과 합작하는 문제를 때로 언급했던 것은 이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늦봄은 남과 북의 어느 권력에도 치우치지 않고 민족이라는 잣대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했던 '우리 시대의 김구'이며, 북의 김일성주석과 대담하게 통일의 진로를 협상한 '이남 통일운동의 대표자'이자 또한 압도적 다수의 대중운동으로 통일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해 희생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통일선구자'였다.

늦봄의 10주기와 방북 15주년를 맞아 이런 그의 참 모습이 온 민족에게 더욱 널리 알려지고 이를 통해 이제는 저 밑으로부터 민족과 민중의 부활이 보다 높은 수준으로 실현되어가기를 진심으로 열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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