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 "한번 더 보면 마지막인가" 아침부터 설레는지 떨리는지 모를 심정이었다.

이산가족 방북단 선정 통보를 받아놓고 기다릴땐 그렇게 안가던 시간이 개별상봉때는 왜그렇게 빨리가는지.

나는 북의 아내에게 "혼자서 애들 키우느라 고생 많았다. 스물 여섯 예쁘던 얼굴이 왜 이리 쭈글쭈글해졌어"라고 말하고 나니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기자들에게 나가달라고 하고 아내를 업고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었다.
죽었는 줄 알았는데 살아있어 줬고 애들도 잘 키워줘 정말 고마웠다.

"진일이, 진성이가 당신 닮아서 착한 것 같아. 효도받고 오래 살아. 내년에는 고향까지 간다니 그때 보자. 건강해야 돼"라고 말은 했지만 얼마나 위로가 됐을지는 모를 일이다. 두 아들에게도 어머니 잘 모시고 이웃, 어머니 친구분들에게도 잘 해드리라고 신신당부했다.

아내는 자재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큰아들에게 "어디가든지 신용을 잃지 말고 똑똑히 배워서 건강히 잘 살아라. 엄마 구실 못해서 미안하다. 살아있는 것이 고맙다"고 말했다고 했다.

남북 가족이 함께 하는 점심시간이 됐다.

그동안 몇번 지나가면서 남의 아내, 북의 아내가 스쳐갈 기회가 있었지만  선뜻 인사를 나누지 못했는데 북측 안내원이 합석을 권유, 이때서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앉아있기가 민망했지만 다행히 자식들이 자리를 어색하지 않게 만들어줬다.

(남쪽) 아내의 큰아들이 내게 먼저 "아버님 받으십시오"라며 들쭉술을 권해줘서 "나는 머슴처럼 어머님을 받들고 있으니 걱정마라"고 해줬다.

내 아들 진일이도 (남쪽) 아내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아버지를 돌봐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서 통일이 돼서 아버지의 90세 생일상은 제가 차려드리겠습니다"고 했다. 그리고는 진일이와 동생 진성이가 아내 큰아들에게 "형님으로 하겠습니다"라며 손을 잡았다. 고마운 아들들.

아내가 "이런 비극은 역사에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한숨을 쉬어 온 가족이 건배를 했다.

아내는 북쪽 아내 홍씨에게 악수를 청하며 "반갑습니다. 건강하세요"라고 인사했고 귀가 잘 안들려 별말이 없는 홍씨를 대신해 진일이가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남쪽 아내에게) 잘해 드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아내는 점심을 다먹고 방으로 올라가다 기자들에게 "통일돼서 다시 만나면 본처를 위해 자리를 양보하겠다. 북쪽에 남편을 양보하겠다. 그게 순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30년 넘게 같이 살았지만 참 착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오후에는 청년중앙회관에서 민족가극이라는 `춘향전`을 구경했다.

극 중간중간 무대 좌우에 설치된 자막에서 `어제는 백년가약 사랑이 넘치더니 오늘은 생이별의 피눈물이 넘치구나` `꿈이더냐 생시더냐 꿈이라면 깨지 마라` 등 마치 우리 이야기를 하는 듯한 가사들이 나와 나도 가슴이 찡하고 다른 사람들도 많이 흐느꼈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아내와 "이젠 자식도 만났으니 서로 마음 편히 살자. 자식 버리고 내려온 죄인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하자"는 말을  나눴다. 워커힐에서부터 매일밤 제대로 못잤지만 평양에서 마지막인 이날 밤은 정말 잠이 오질 않았다.

◇18일

아침 일찍 숙소로 전송나온 북쪽 가족들을 보니 그제야 "정말 가야하는구나"하는 실감이 났다. 모두들 부둥켜안고서는 울고불고... 내 평생 이렇게 내키지 않는 걸음은 처음이었다. 겨우 버스를 올라타고 멀어지는 가족들을 보면서 15일날 왔던 길을 되짚어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올 때와는 달리 대한항공 비행기가 와있는걸 보니 조금 반갑기도 했지만 떠난다는 아쉬움 때문에 착잡하기만 했다. 예정보다 한시간 정도 늦은 오후 1시께 비행기가 이륙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평양의 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는데 불과 1시간도 안돼 김포에 착륙했다. 이렇게 짧은 길을 그렇게 오래 걸려 돌아오다니...

남들은 아들, 딸, 며느리, 손자, 손녀 등 많은 친척이 배웅나왔지만 남쪽에 있는 유일한 혈육인 조카(76)만 공항에 차를 몰고 나왔다. 그래도 북에 둔 자식들을 모두 봤으니 섭섭하지만은 않다. 서울은 왔는데 마음은 아직도 평양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연합 2000/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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