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을 버리고 떠나온 죄인이라는 심정에서 속죄의 마음으로 반세기를 살아온 이선행(80)-이송자(81)씨.

북에 두고 온 자식, 부인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고 최종 방북단 100명에 선정된 뒤 초조하게 하루하루를 기다렸다.

이선행씨는 옛 부인에게 주지 못했던 금반지도 뒤늦게 마련하고 이송자씨는 고생하며 자랐을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줄 청바지와 속옷, 시계를 고르느라 그나마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다.

다음은 남편 이씨의 방북기.

◇14일 = 북행(北行) 하루전.

청와대 오찬을 마치고 남측 이산가족 방문단의 서울 숙소인 워커힐호텔로 들어서니 비로소 내일이면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나러 간다는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여장을 풀고 지하1층 썬플라워룸에서 방북교육을 받은 뒤 저녁식사를 했으나 여전히 마음은 북에 있는 가족들뿐이었다.

내 처는 방북단 일행중에 채성신(72), 김찬하(77), 박용하(84), 강기주(90)씨 등 무려 7명이 동향(평북 영천)이라는 사실을 알고 너무 반가워했다.

이들과 잠시 방에서 만나 고향얘기를 나누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누웠지만 나는 물론 처도 좀처럼 잠을 잘 수 없어 뜬눈으로 하얗게 밤을 새웠다.

◇15일 = 오전 7시 썬플라워룸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짐을 꾸려 호텔 로비로 내려오니 벌써 마음은 평양에 가 있는 것 같이 꿈속을 거니는 듯 발걸음이 가볍다.

고향동기들과 주차장에서 방북 기념 사진을 찍었다.

어제까지 많이 아파 모습이 보이지 않던 김금자(69), 박관선(70)씨도 휠체어에 몸을 실고 나타나 정말 다행스럽고 기쁘기 그지없다.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출발.

오후 1시 북측 방문단이 타고 온 고려항공에 탑승하자 하얀 블라우스에 감색 조끼를 입은 여승무원들이 왼쪽 가슴에 김일성 배지를 착용한 채 "어서 오십시오"라고 반갑게 인사했다.

이륙 1시간 뒤 비행기가 미끄러지듯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이산가족, 대한적십자사 관계자, 취재단 모두 일제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여승무원은 방송을 통해 "그리던 혈육과 뜨거운 상봉을 바랍니다.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라고 인사했다.

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평양-순안간 고속도로를 통해 평양시내로 들어가는 내내 도로변 시민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해준다.

광복절 휴일이라 가족단위로 놀러나온 인파가 눈에 띄었지만 지난 6.15 정상회담때 환영인파에는 못미쳤다.

오후 2시께 숙소인 고려호텔에 도착하자 노동신문, 조선중앙TV,  조선중앙통신, 민주조선 등의 명찰을 단 북한 기자 1백여명이 나와 취재에 열을 올리고 있기는 남측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후 3시40분께 1층 식당에서 늦은 점심.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평양냉면은 옛맛 그대로였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순간이 왔다.

오후 6시께 호텔 상봉장으로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나는 50년이 지나는 동안 너무 늙어버린 북의 아내 홍경옥(76)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26세 꽃다웠던 그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깊은 주름만 속절없이 패여있지 않은가. 세월의 벽때문인지 의외로 차분한 대면이 이어졌다. 그러다 경옥이 오빠 이름을 확인한 뒤에야 어깨를 감쌌다.

"혼자서 애들 키우느라 고생 많았지..."

하지만 근래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경옥이는 50년만에 본 남편인데도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안타깝기만 했다. 어린애였던  장남 진일이(56)와 셋째 진성이(51)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오래 전부터 제사를 지내왔다며 가족사진을 꺼내놓았다.

내 처는 내가 북의 가족들을 만나고 있는 바로 5m 앞에서 반세기만에 큰아들 박의식(61)을 만나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남편을 찾아 47년 월남했다가 남편도 찾지 못하고 이듬해 가로막힌 38선 때문에 헤어진지 52년이나 흘렀다.

아내는 어느새 손자까지 둔 할아버지가 돼 버린 아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다 이내 손을 잡고 눈물을 쏟았다.

오후 8시부터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만찬에서 북측 고위인사라는 사람이 환영인사도 하고 건배제의도 했지만 우리 부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고기종합보쌈, 생선묵, 쉬움떡(술떡), 칠색송어구이 등 맛난 음식들이 한상  가득했지만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만남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데다 북의 가족들은 빠진 자리여서 아쉬움이 너무 컸다.

객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평양의 어두컴컴한 야경은 조금 만난 가족들의 얼굴을 비추는 스크린인 듯했다.

피곤한 일정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상봉당시 기분이 지워질까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연합 2000/08/18)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