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준(한국민권연구소 연구위원)


한국사회에서 '숭미'(崇美)와 '용미'(用美)는 과연 어떤 차이를 가질까.

외교부 간부들의 '대통령 폄하 발언'이 발단이 되어 외교통상부 장관직을 사퇴한 윤영관 전 장관이 이임사에서 한 "누군가 숭미라고 하는데 용미 등의 것과는 엄격히 구분돼야 한다"는 발언을 듣고 생겨난 질문이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주변국과의 관계를 설정해야 하고 그런 목표가 뚜렷할 때 우리는 자주 외교를 하고 있는 것"이라며 윤 전 장관은 자신의 발언을 설명하였는데, 최근 일고 있는 숭미론자라는 자신에 대한 비판 여론에 대한 대응이었다. 자신은 미국을 숭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주 외교'를 위해 미국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는, '나름대로의 변론'이었는데, 이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사회 현상은 '의지'보다는 '힘'에 의해 규정된다

물론 숭미와 용미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의 이같은 발언이 사전적 의미를 언급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행동, 자신의 수장으로 있었던 외교통상부의 외교 활동에 대한 것인 만큼, 여기서 숭미와 용미에 대한 의미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사회과학적 의미라 할 수 있다.

사회과학 차원에서 어떤 용어를 정의할 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다. 모든 사회적 현상은 곧 힘의 관계를 반영하여 나타난다는 점이다. 물론 사회적 현상은 '행위자의 의지'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 현상은 '행위자의 의지'보다는 '힘의 관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노무현 정부의 소위 정치개혁이라는 것이 지금도 암초에 부딪치고 있는 것은 정치개혁을 반대하는 세력과의 힘 대결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는 부안 주민의 투쟁이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부안 주민의 의지가 핵폐기장 건설을 추진하는 정부의 힘에 밀리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 현상은 '의지'보다는 '힘'에 의해 규정되는 경우가 더 많으며 의지 또한 힘이 있을 때 구현된다.

윤 전 장관이 '나름대로의 변론'을 시도하며 언급했던 '숭미'와 '용미'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을 '이용'하려는 사회적 작용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이용하려는 행위자 즉 노무현 정부나 외교통상부의 '힘'이 그것을 막고자 하는 '미국의 힘'보다 강했을 때 현실성을 띄게 된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듯이 아직 그러한 힘은 '미국의 힘'보다 약한 것이 현실이다. 힘 관계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용미는 오히려 '역(逆)용미'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즉 미국을 이용하려는 행위를 미국이 역이용할 수 있는 것이며 어쩌면 윤 전 장관의 1년간의 외교활동이 그런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 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풀기 위해 미국을 이용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은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이유로 내걸어 이라크 파병을 얻어내었다. 자주국방을 이룩하기 위해 미국을 이용하려 했으나, 오히려 미국은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군사력이 강화되어야 한다며 최신 무기를 더 많이 배치하는 등 한미동맹을 강화하였다.

'자주'를 지향하지 않은 '용미'는 '숭미'의 또 다른 표현일 뿐

용미할 힘이 없는 조건에서 용미와 숭미는 백짓장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윤 전 장관의 용미론이 숭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국방' 정책을 실질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미국의 힘에 이끌려 이라크 파병 파병을 결정하고, 주한미군의 군사력 강화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이라크 파병에 반대하고, 주한미군의 군사력 강화에 제동을 걸어야 했으며, 작전지휘권의 환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개·폐, 한미소파의 개·폐를 위해 모든 외교적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

이러한 실질적 노력이 따르지 않은 '용미'는 '숭미'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용미와 숭미는 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자주'와 '숭미'의 대치 전선이 있을 뿐이며, '자주'를 지향하지 않은 '용미'는 '숭미'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어쩌면 윤 전 장관은 자신의 '숭미 행각'을 가리기 위한 논리로서 '용미론'을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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