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관성적으로 세상을 살다가 문득 멈춰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있다. 숨가빴던 과거를 반추하면서 아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할 때, 한번쯤 사람들 대부분은 깊은 상념이나 성찰에 빠지게 된다. 이 순간을 철학적 용어를 빌리자면 `에포케`(epoche)쯤 될 것이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송두율(59) 교수가 2일 첫 공판에서 자신의 심정을 그리스어에 `전기`(轉機)를 뜻하는 `에포케`에 비유했다.

◆ 송두율 교수는 모두진술에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오늘을 정말 오래 기다렸다"고 말문을 연 뒤 "재판장에 서기도 전에 벌어진 여론재판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절망감과 참을 수 없는 분노도 느꼈다"고 말했다. 분명 그 분노는 "멀리서 `유신`과 `5월 광주`를 그리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민주화와 통일을 화두로 살아온" 그를 "`해방이후 최대간첩`으로 둔갑시키는 현실"에 대한 항거일 터다.

◆ 이어 송 교수는 "에포케는 `일단정지`를 의미한다"며 "새것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관성적으로 달려온 속도를 우선 멈춰야 한다"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현재 1평 공간에 갇혀있는 제가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는 `일단정지`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면서 "낡은 것과 새것의 충돌이라는 긴장 속에서 열리는 이 재판에 전환을 위한 `일단정지`라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심정을 피력했다.

◆ 화병(火病)이 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자기성찰`을 위해 `일단정지`하는 그의 모습에서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까? 분단시대를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통일을 위해 어느 한편만 지닌 반편(半偏)의 지식인이 아니라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프락시스`(praxis)적인 지식인임을 느끼지 않을까. 분명 그는 우리 민족의 `분단`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전혀 비켜간 여느 지식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 그런데 이번 재판이 송 교수의 뜻대로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자리`가 될지 또는 `전환을 위한 일단정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부여될지는 미지수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명 에포케가 필요하다. 그런데 진정으로 에포케가 필요한 대상은 송두율 교수가 아니라 `공안당국`이다. 공안당국은 55년간 `조자룡 헌칼 쓰듯` 국보법을 얼마나 휘둘렀는가? 눈에 핏발을 세우고 얼마나 쉼없이 관성적으로 그 한길만을 달려왔는가? 이제 공안당국도 속도를 멈춰 `일단정지`하고 `자기성찰`로 돌아갈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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