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이 넘는 세월,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전향을 거부한 채 감옥생활을 감수한 미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송환 일자가 9월2일로 확정됐다.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확산되고 있는 남북화해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다.

미국의 보스톤 글로브지(Boston Globe)는 18일 "냉전의 마지막 전사, 미전향 장기수들이 북한으로 송환된다(Last of the coldwarriors ; North`s ex-spies to leave S. Korea)"라는 장문의 특집기사를 통해 이들을 집중 조명했다.
다음은 기사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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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시들긴 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신인영씨를 비롯한 8명의 북한 공작원 출신들은 수십 년간의 감옥생활 이후 획기적으로 바뀐 세상을 실감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950-60년대 북한의 공작임무를 띠고 한국에 침투된 수천명의 간첩 가운데 일부이다.

남한 당국에 체포, 투옥된 이후 이들은 물고문을 비롯한 온갖 고문과 구타를 감내해야 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감옥에서 죽거나 자유를 찾아 전향했다.

그러나 100명 가량은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채 감옥생활을 하던 중 자신도 정치범 출신인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됐다.

대통령 특사로 풀려난 이들은 기독교 단체에서 만들어준 통일의 집에 거주하며 초라한 삶을 살고 있다.

때론 자신들을 도와준 데 대한 감사의 뜻으로 구호기관 허드렛일을 하는 것에서부터 감옥에서 자기치료를 위해 몰래 배운 침술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일까지 이들은 해오고 있다. 고향 북녘 땅을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이들은 서투나마 컴퓨터에 익숙해져갔고,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바꾸는 젊은이 문화와 MTV 등에도 친숙해졌다.

그러나 이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들이 한 때 전복을 맹세했던 한국의 정치 시스템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기쁨도 잠시, 이들은 자신들이 세계 마지막 남은 냉전의 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남한 땅에 갇힌 제한적인 자유인신세란 사실을 이내 깨달아야 했다.

그러나 지난 6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으로 이들 미전향 장기수들의 귀환이 가능해졌다. 풀려난 사람 가운데 2/3가 귀환신청을 했다.

이번 주 한반도 전역을 울린 이산가족들의 감격적인 상봉장면은 고향방문을 앞둔 이들을 더욱 가슴 설레게 만들었다.

비록 잠깐이긴 하지만 어머니와 오래 동안 잃어버렸던 아들, 아내와 행방불명의 남편 사이의 필사적인 포옹은 앞으로도 감격적인 장면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몇 주만 지나면 이들 미전향 장기수들은 꿈에 그리던 가족들과 만나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공산주의 국가에서 살게될 것이다.

일제 식민지의 온갖 만행에 반발한 젊은 애국주의자로서 이들은 한반도 통일을 위한 싸움을 벌이기 위해 공산주의 북한에 가담했다.

올해 71세의 신 씨는 "당시 모든 진보적 인사들은 통일을 위해 월북했다"면서 "반면 모든 보수적 인사들은 남한 땅에 남아 자신들의 실패가 공산주의 탓이라고 맹비난했다"고 주장했다.

39년을 복역한 74세의 윤용기씨는 간첩이란 지칭에 화를 냈다. 그는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칭했다.

그는 "간첩은 다른 나라 정부가 돈으로 고용한 자를 가리키는 것"이라면서 "나는 내 조국을 해방시키고 통일하도록 돕기 위해 북한에서 왔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 일했다. 내 신념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면서 "나는 여전히 한국 정부가 미국과 다른 외세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이들 늙은 신념가들은 자신들이 대학생과 일반 대중들 사이에 혁명을 고취시키고 한국정부 관계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남파된 것이라는 주장을 반복할 뿐, 그들의 임무에 대한 토론을 거부하고 있다.

요즘 이들은 이런 활동을 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약초 재배, 환자치료, 쓰레기 수거, 인터넷을 통한 북한신문 읽기 등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분명 통일을 위한 자신들의 활동이 줄어들었지만 그 신념만은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한국의 눈부신 번영과 피폐해진 북한 경제상도 이들의 신념을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

이들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지적하며 자본주의가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오랜 경제제재가 사라지기만 하면 북한의 경제난은 사라질 것으로 이들은 보고 있다.

신씨의 조그만 방에는 만일 그가 북한에 있었다면 갖지 못했을 구식 TV와 컴퓨터, 다양한 책과 신문들, 서로 입맞추고 있는 커플상을 포함한 조금은 저속해 보이는 장식품 등이 있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은 다 내버려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불필요한 잡동사니라고 말한다.

한국 내 인권단체, 카톨릭 자원봉사자들로부터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한국사회에서 이방인들이다.

이들은 북한에 가야 자신들이 위엄을 갖추고, 영웅적 환영을 받을 수 있으며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의 친교가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이들이 북한 송환을 희망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이념이다. 가족은 그 다음이다.

신씨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지난 수십 년의 세월동안 돌아가기를 꿈꾸던 내 조국"이라고 강조했다.

골수암으로 고생하고 있는 그는 북한에서의 치료가 현재 서울에서 무료로 받고 있는 치료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지난 33년 동안 헤어져 살아온 부인 및 세 자녀와의 해후는 신 씨에는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는 현재 신씨의 92세된 노모와 6명의 형제자매가 살고 있어 북한으로 가면 이들과 생이별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씨는 현재 남북 당국에 노모의 북한행을 허용해 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6일 이들 미전향 장기수들이 남한 내 가족들과 함께 북한에 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입장표명을 하지 않고 있다.

이들 미전향 장기수 송환만으로도 한국 내에서는 격렬한 논란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 것으로 추산되는 400여명의 국군들과 납북인사들, 그리고 남한측 스파이 등에 대한 송환과 미전향 장기수 북송을 연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많은 사람들이 펴고 있다.

북한은 이런 유형의 남한출신 인사가 한 명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인은 남편이 가족의 영달이 아닌 통일을 위해 중요한 일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동안의 세월을 자랑스럽게 보냈을 것"이라고 신씨는 말한다.

그는 "북한을 떠나기 전 부인에게 우리 세대에 분단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 세대가 희생해야 한다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통일의 집에 거주하고 있는 세 명의 장기수들은 한국에서 결혼했거나 북한에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북송을 신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도 통일을 위해 조용히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70세의 안학섭 씨는 "통일을 위해 이곳까지 왔다. 그런데 아직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성난 듯 반문한 뒤 "남한 내 친지들은 나를 빨갱이 취급을 한다. 감옥에서 나왔을 때 조카가 와서는 `삼촌은 아버지 같습니다, 그런데 빨갱이더군요`라는 말을 했다"고 전했다.

안씨는 "북한으로 돌아가면 열렬한 환영을 받고 훨씬 나은 생활을 할 것이란 사실을 잘 안다"면서 "그러나 평생을 내 신념에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곳에 남아있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안씨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쓰레기 수거에 나선다. 이렇게 해서 그가 버는 돈은 한 달 평균 400달러이다.

안씨는 오후가 되면 환자들을 위한 약재를 만들고 김정일의 통일 이론을 공부한다.

그는 "나는 세뇌된 남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같은 민족이고 훨씬 더 부지런하며 더 정직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이어 "나는 남한사람들에 도덕적인 삶 또한 보여주고 싶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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