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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답변 촉구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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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3.11.29  23: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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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대답하여야 한다


1987년 11월 29일 오후 2시 1분.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을 비행중이던 KAL858기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정부에서는 이 사건이 발생하자 이것이 북한의 지령에 의한 공중폭발사건이라고 단정짓고 수사를 진행했으며, 결국 김현희와 김승일 일행에 의해 자행된 테러사건으로 일단락 지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종자 가족들 중 안기부의 수사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국민들은 의혹에 찬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라는 것이 너무나 많은 문제점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블랙박스는 고사하고라도 가족들이 확인할 수 있는 실종자들의 유류품 하나조차도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채 종결지은 수사는 가족을 잃어 멍든 가슴에 다시금 피멍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기되는 각종 사건관련 의혹들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정부당국자들의 행태는 가족들을 또다시 실의에 젖게 만들고 국민들이 가진 의혹을 확신으로 이끌었습니다. 지난 16년간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던 가족들의 그 아픔을 담아 국정원에게 질의합니다. 국정원은 수사담당자로서 다음에 제기되는 의혹들에 대하여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철저한 재조사를 거쳐 의혹을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내는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1. 김현희의 정체에 대한 의혹

- 신원과 관련하여

 (1)
   ① 당시 안기부에서는 마유미가 ?1972년 11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 2차 회담에 참석한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던 장본인?이라고 발표하면서 사진 1장을 공개하였다. 또한 기자회견의 질의응답에서 ?김현희가 자동차에서 두 번째로 내린 사람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완전 허위이다. 72년 평양을 방문한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준 사진 속의 화동의 귀는 둥근 네모형이나, 기자회견 당시의 사진 속 김현희의 귀는 역삼각형으로서 완전히 타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귀 모양은 평생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또한 당시 안기부 수사발표와 달리 남북조절위 대표로 참석한 장기영은 자동차에서 내린 것이 아닌 헬리콥터를 타고 개성에 내렸다. 기자회견이 있은 후 안기부는 일본잡지 「분게이?주」 88년 3월호와의 인터뷰를 통해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에게 주었다?고 함으로써 공식 수사발표를 뒤엎었으며 88년 3월 5일에는 ?헬리콥터에서 내린 사람에게 주었다?고 다시 수정 발표하였다.

   ② 당시 KBS와 주요 일간지에서는 꽃다발을 들고 손을 들어 인사하는 소녀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는 지난 군사독재시절 북한과 관련한 보도통제가 심각하였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안기부가 제공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도 허위임이 드러났다. 당시 주요 일간지를 통해 공개된 사진은 남북조절위 2차 공동위원회 당시의 사진이 아닌 1972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 당시의 것이다. 이는 72년 8월 29일자 「동아일보」에 같은 사진이 공개됨으로써 확인된다. 또한 당시 개성시 유치원에 근무하던 왕영숙이라는 여성이 사진 속의 소녀는 김현희가 아닌 당시 개성시 만월여자중학교 학생시절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하였다.

   ③ 하기와라는 자신이 1972년 평양주재시 찍은 사진을 일본 잡지 ‘그라프 곤니치와’에 게재하면서 그 사진에 나타난 소녀를 김현희라고 99% 확신한다고 발표한 데 대하여, 안기부는 김현희 자신이 “16년 전 내 모습이 확실하다”며 “이 사진을 어떻게 구했냐”고 반문하면서 긍정했다고 하여 이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그러나 역시 귀 모양을 중심으로 의혹이 일자 나중에 하기와라 기자는 그 소녀를 김현희로 본다는 자신의 발표를 부인했고, 그 소녀는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

   ④ 이상을 종합해보았을 때 사진 속의 인물이 김현희라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으며, 오히려 해부학 전문가, 동일인분석 전문가, 얼굴분석 전문가에게 감정 의뢰한 결과 3장의 사진은 모두 김현희가 아니며, 첫째, 셋째 사진은 오히려 북한측 주장대로 정희선과 가깝다는 결론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성장해도 변하지 않는 연골부분(특히 귀)과 눈썹 윗부분을 비교해볼 때 김현희와 소녀들은 거의 일치하지 않고 있으며, 얼굴 형태 구분에서도 소녀들은 북방형, 김현희는 남방형 얼굴로 분석결과를 내놓고 있다. 특히 김현희의 귀는 칼귀에다 귓바퀴에 돌기가 없는 특이한 귀(수만 명 중 1명밖에 나오지 않는 희귀한 귀라고 함)로, 소녀들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고 밝혔다.

 (2)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에서는 마유미의 신원사항에 대해 “평양의 하신초등학교와 중신중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예과 1년을 수료하고, 평양외국어대학 일어과 2학년에 재학중이던 80년 2월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으며 “아버지 김원석은 현재 앙골라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 수산대표로 근무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에 즉각적인 성명을 통해 그런 경력을 가진 여성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앙골라 대사관을 겸하고 있는 짐바브웨의 일본대사관에서 한 조사에 의하면 앙골라 정부가 발표한 명단에 김원석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수산대표란 직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표하였다.

 (3)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에 의하면 김현희가 노동당 조사부에 들어간 지 2년 뒤 조선노동당에 입당하였다고 하였으나, 북에서는 당원이 아닌 사람을 당중앙기관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4)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1985년 8월 15일 조국해방 40주년 기념 공로 메달을 받고 1987년 4월 15일 국기훈장 3급을 수상하였다고 하였는데, 북한에는 그러한 메달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발행된 것은 ‘기념훈장’과 ‘기념 메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서 ?기념 메달?로 수정 기재하였다.


- 기자회견과 관련하여

 (5) 기자회견 당시의 김현희의 목소리를 분석한 일본 성문분석 전문가인 스즈키 마스미 소장에 따르면 “감정의 기복이 없이 목소리 톤이 차분한 것으로 미뤄 준비된 시나리오를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스즈키 마스미 소장은 “인간의 감정이 격앙했을 땐 반드시 음성주파수에 반영되어 기복을 보이지만, 김현희의 기자회견시의 주파수는 200Hz 전후, 울먹거리는 장면에서도 변치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그 기자회견이라는 것이 안기부의 연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6) 당시 안기부의 기자회견에서 공개된 김현희의 자술서에는 김현희의 서명이 없으며, 진술서 내용에서도 언뜻 보기에 북한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100여 군데에 이른다.

 (7) 1988년 1월 15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김현희의 자필 맹세문과 다음날인 1월 16일 「조선일보」에 실린 맹세문은 종이 자체가 백지와 편지지로 다를 뿐 아니라 사용된 단어도 다른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우선 전날 중앙일보에 실린 맹세문에 ‘규율’이란 단어가 북한식 표기가 아니라는 지적을 받자 다음날 조선일보에 실린 맹세문에는 북한식 표기법에 맞게 ‘규률’로 수정한 것으로 바꿔치기를 한 것이다. 또한 북에서 사용하지 않는 단어가 더 발견된다. ‘적후(敵後)’라는 단어는 북한에서는 ‘적구(敵區)’로 사용한다고 하며, `3대혁명규률‘이란 용어도 그 당시 거의 사문화된 표현이라고 한다.

 (8) 안기부는 기자회견 당시 김현희가 심한 평양 사투리를 썼다고 주장하나 1988년 1월 18일자 조선일보의 ‘만물상’ 기사에 의하면 김현희는 기자회견 내내 또박또박 서울 표준어를 썼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김현희의 말투가 조선족 말투와 유사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다.

 (9) 기자회견에서 외신기자들에게는 자유로운 질의, 응답과 일체의 질문 기회를 허용하지 않았고, 김현희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특정한 한국 기자들 몇 명만 질문을 하도록 허용된 채 회견은 종결되었다. 이것은 안기부의 수사발표와 달리 김현희가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거니와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제기되던 각종 의혹에 관한 질문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술책이 아닌가.

 

- 정예공작원으로 볼 수 없는 김현희의 행적

 (10) 김현희의 수기에 의하면 1984년에 김승일이 가르쳐준 암호방식을 그대로 썼으며, 이는 일본 경시청의 수사발표에 의하여 1985년에 검거된 신광수가 사용하던 암호방식으로 밝혀졌다. 공작원들의 암호표기법은 수시로 바뀌며, 특히 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 이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볼 때 이미 밝혀진 암호표기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은 김현희가 공작원으로 꾸며진 인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대목이다.

 (11) 김현희의 진술서에 의하면 범행 다음날인 11월 30일 저녁 호텔방으로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에 대해 질문하는 전화가 걸려오고, 김정기 주바레인 대리대사가 호텔 방을 방문하는 등 자신들이 용의선 상에 올랐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에야 호텔 방을 나섰다. 또한 증거를 인멸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문서나 암호가 기재된 수첩, 사진, 행적을 알려주는 항공권들 등의 증거를 파기하지도 않았다.

 (12) 안기부의 수사발표에 의하면 김현희의 검거 당시 유류품이 무려 495종에 이른다. 공작원이 공작지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공작원의 철칙임에도 7년 8개월의 훈련을 받은 김현희가 공작지에서 사진을 찍고, 결정적 증거가 될 맹세문마저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 기타

 (13) 당시 안기부는 수사발표를 통해 ‘김현희는 1981년 4월부터 83년 3월까지 2년간, 평양 동북리에서 일본인 여자 공작원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일본어, 일본풍습, 생활예의 등 일본인으로 위장키 위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김현희는 일본측 수사에 그의 이름이 이은혜라고 밝혔으며, 1991년 일본 경찰은 그가 1978년 일본에서 행방불명된 술집종업원 출신의 다구치 야에코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은혜와 김현희의 관계는 철저히 김현희의 진술에 의한 것일 뿐, 그녀가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였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아무데도 없다. 정부당국은 최대한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은혜의 북한에서의 행적, 특히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 여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14) 당시 안기부는 수사발표에서 김현희가 체포 당시 독약 앰플을 깨물어 음독자살을 기도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녀를 진단했던 바레인의 야코비안 박사는 기자회견을 통해 “김현희는 음독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위에서도 독극물이 검출되지 않은 사실들을 미루어 볼 때 음독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던 바, 김현희의 음독소동은 연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5)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한국에 온 지 단 8일 만에 자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서울시내 거리 여행과 TV 시청 등을 통해 그동안 북한에서 받은 교육이 허구였다는 것을 느꼈으며, 여 수사관들의 인간적인 정에 감동하여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김현희가 진짜 공작원이라면 자본주의 세계나 한국의 실상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받고 그에 대한 비판의식을 확고히 가진 자로서 비행기 폭파공작까지 맡을 정도로 신임을 받던 자라고 할 수 있는바, 8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평생 가지고 있던 기존의 신념체계를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설명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2. 김승일의 정체와 관련한 의혹

 (16) 당시 안기부는 김승일은 조선노동당 조사부의 특수공작원으로서 일본어?영어?중국어?러시아어에 능통하며, 특히 전자기술 부문의 전문가로 장기간 해외에서 공작활동을 해온 정예공작원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1월 30일 호텔 방을 찾은 바레인 한국대사관의 김정기 대리대사는 “신이치와는 한자로 필담했다”고 증언하였으며, KAL858기 교체승무원인 박영길, 박은미는 기자회견에서 영어와 한국어는 잘 알아듣지 못했으며 일본어를 했을 때 반응했다고 증언하였다.

 (17)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김승일을 부검한 결과 키 1m71cm, 몸무게 45.95kg에 위 수술과 담낭 수술을 받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위의 대부분이 수술로 절제되어 있어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승일의 이러한 건강상태는 바그다드에서 KAL858기 탑승시 목격한 승무원의 진술에서도 확인되며, 1991년 출간된 김현희의 수기 내용을 종합해보면 김승일은 ‘곧 죽을 것 같은 환자’였다. 이런 건강상태인 자가 과연 정예공작원으로서 비행기 폭파공작의 책임자 역할을 할 수 있는가.

 (18) 최근 공개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김승일 시신에 대한 부검감정서에는 김승일의 젊었을 때 사진으로 추정되는 의혹의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김승일의 소지품 중에 젊었을 때 사진은 없었으며, 여권사진과도 다른 사진이다. 이에 대해 부검을 담당했던 부검담당 의사와 담임 검사도 이의 입수경위에 대해 아무런 답변을 못하고 있다.

 (19) 당시 안기부는 김승일에게 위조여권을 만들어준 인물은 미야모토 아키라(본명 이경우)라는 북한 간첩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일본 경시청은 1985년 북한의 스파이망을 적발(니시아라이 사건)했을 때 미야모토라는 인물을 즉각 감시했으나 조금 있다가 잠적하였다는 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이경우가 북한 스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니시아라이 사건 자체가 실체가 없는 사건일 뿐 아니라 그 당시 미야모토라는 이름 자체도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 경시청은 미야모토가 KAL기사건 발생 2년 전 간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결국 그가 북한공작원이며 위조여권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방법은 사라진 것이다.


3. 김현희, 김승일의 행적과 관련한 의혹

 (20) 당시 안기부 수사발표에서 제시된 김승일, 김현희 일행의 사진을 보면 가로사진이 세로사진으로 바뀌는 등 사진의 일부가 잘리고 편집됐으며, 그중 김현희를 찍은 사람의 위치를 유추했을 때 누군가 주변 건물에서 몰래 찍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들 일행 외의 제3자가 몰래 찍은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승일과 김현희의 행적을 다년간 추적한 일본인 저널리스트에 의하면 여행자는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 밝히고 있다.

 (21) 당시 안기부 수사발표와 김현희의 진술서, 그리고 이후 김현희가 직접 쓴 수기에서 김현희, 김승일의 행적은 너무나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다.

   ① 모스크바에서의 행적 : 김현희가 모스크바를 경유했다는 것은 김현희의 진술만 있을 뿐 증거, 증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김현희는 자신의 진술서에서 일행이 묵은 곳이 ‘모스크바 북한대사관 초대소’라고 하였지만 이후 수기에서는 ‘대사관 행사과장 사무실을 겨우 빌려 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② 부다페스트행 비행기편 : 김현희는 자신의 수기에서 모스크바 주재 지도원이 알선해준 자정에 출발하는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쯤 지나(11월 13일) 새벽 4시경에(시차 때문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했고, 진술서에는 밤 12시가 좀 지나 소련 비행기를 타고 새벽 4시쯤 도착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1987년 11월 12.13일 모스크바발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는 13일 오전 2시 35분에 출발하는 아에로프로트 432편밖에 없었다.

   ③ 부다페스트에서의 행적 : 김현희는 자신의 진술서에서 “모스크바에서 연락이 있었으므로 주재지도원이 마중 나와 그의 자동차를 타고 조사부 초대소에 가서 휴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수기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최 과장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차를 부르고, 새벽길을 몇 시간 동안 고생고생하며 헤맨 끝에 대사관 직원 집에 도착했다”고 서로 엇갈린 진술을 하고 있다.

   ④ 빈에서의 행적 : 김현희는 당시 진술서에서 부다페스트에서 빈에 도착한 곳은 빈의 남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의 끈질긴 현장조사를 통해 이들이 도착한 곳이 빈의 남역이 아닌 서역이라고 밝혀졌다. 그러자 김현희는 이후 수기에서 남역을 서역으로 슬며시 바꾸어놓았다. 또한 안기부의 수사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이 빈에서 묵은 호텔은 빈의 암파크링 호텔 603호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603호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에 김현희의 수기에는 322호로 수정되었다.

   ⑤ 베오그라드에서의 행적 : 김현희 수기에 의하면 김현희 일행은 빈에 체류할 때 항공사에서 항공권을 구입하면서 메트로폴리탄 호텔을 예약하였으며, 호실은 811호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호텔 리셉션매니저 자릿츠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예약 없이 갑자기 왔으며 묵었던 호실은 806호라고 한다.

 (22)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 일행이 1987년 11월 12일 평양을 출발, 모스크바 → 부다페스트 → 빈 → 베오그라드 → 바그다드 → 아부다비 → 바레인을 여행했고, 빈 입국 이후 기존의 북한여권을 넘겨주고 위조여권을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위조여권에는 베오그라드(유고슬라비아) 출국 스탬프가 찍혀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안기부 수사관은 당시 일문일답에서 “북한의 여권을 사용해서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이는 빈 입국시 북한여권을 돌려주었다는 발표와 완전 모순되는 것이다

 (23) 김현희의 수기에 의하면 일요일인 11월 29일에 도착해서 항공사가 휴무였기 때문에 로마행 비행기를 갈아타는 일은 포기하고 3일간 통과비자를 발급받았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국가인 바레인의 휴일은 금요일로, 일요일에는 모든 곳이 정상 업무를 한다.

- 여권과 관련한 의혹

 (24) 당시 안기부 수사발표에서는 김승일과 김현희가 소유한 “위조여권은 개인이나 테러 단체는 제작할 수 없고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정부기관에서 만든 것”이라 하여 은연중에 북한과의 연계를 드러내고 있으나, 김현희의 경우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 고유번호의 여권을 사용하는 등 위조여권임이 쉽게 확인될 정도로 조악한 것이어서 “현지 일본대사관의 긴급 확인과정에서 위조여권임이 드러나 체포했다”는 같은 안기부 발표와 모순을 보이고 있다.

 (25) 김승일의 경우 그 이름이 이미 간첩과 연루됐다고 알려진 ‘신이치’라는 이름을 그대로 여권에 사용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임무를 띤 전문적 공작원이 이미 알려진, 일본 공안당국 등의 기관에 의해 체크되고 있는 위조여권을 갖고 활동했다는 것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4. 폭파사실과 관련한 의혹

 (26)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에 의하면 김승일이 비닐백에 폭발물을 들고 기내에 들어가 좌석 위칸에 올려놓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무장 박길영과 스튜어디스 박은미는 당시 바그다드에서 탑승하던 김승일은 짐이 없었고, 김현희는 초승달 모양의 숄더백만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27) 김현희의 진술서에 의하면 27일 베오그라드에서 최 과장으로부터 폭발물을 인수받았으며, 베오그라드 공항과 바그다드 공항의 검열을 통과하여 폭발물을 기내에 설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베오그라드 공항당국은 안기부의 수사발표 후 1월 16일 즉각 성명을 내어 공항당국의 완전한 검사를 뚫고 폭발물을 반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항공회사 사원은 “갈아타는 여객의 짐은 특히 주의하라”는 것이 항공테러 방지대책의 요체라며 안기부의 수사발표를 전면 부정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

 (28) 김현희의 진술서에는 바그다드 공항에서 라디오 배터리가 문제가 되어 김승일이 라디오를 켜며 항의하자 이를 돌려받았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실제 C-4 350g의 양은 라디오의 부품을 모두 빼내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양으로서, 그 상태에서 라디오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29) 당시 안기부의 수사발표는 “김현희가 쇼핑백에 넣어 소지하고 있던 시한장치 폭발물을 좌석 선반에 올려놓은 채 휴대품만 들고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도중에 내리는 승객이 있으면 테러 방지를 위해서도 그냥 두고 간 짐이 없는가 확인하기 위해 선반을 열어보는 것이 항공회사의 철칙이라며 여객의 짐에 대한 체크가 엄격한 KAL기에서 체크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일본 항공회사 직원의 증언은 안기부의 수사발표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30) 당시 안기부가 이들이 범행에 사용했다고 밝힌 폭탄은 파나소닉 RF-082형 라디오를 개조한 것에 넣은 C-4 350g과 술로 위장한 PLX 액체폭탄 700cc뿐이며 이로 인해 비행기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평론가인 오가와 가주히사 씨가 진술한 바에 의하면 이 정도의 폭약으로는 고도 1만m를 나는 비행기를 공중분해시킬 수는 있지만 폭발에서 공중분해까지는 약 5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또한 1983년 사할린 상공에서 영공 침범으로 소련에 의해 격추된 KAL기의 경우,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여 명중되었어도 긴급발신을 했던 경험에 비추어 순간폭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1)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정필 총기분석실장(당시 잔해 분석 담당)에 따르면 모든 858기 잔해에서 컨퍼지션-4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김승일의 복띠에서 컨퍼지션-4가 아닌 TNT 성분이 나왔다고 한다.

 

5. 정부의 수사와 관련한 의혹

-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32) 사건 직후 정부는 사건 진상 규명의 첫걸음인 수색을 매우 형식적으로 하다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시작 10일 만인 1987년 12월 9일 수색조사단을 철수시켰다. 사고 전 날 인도양의 모리셔스 해에서 추락한 남아프리카의 점보기는 1년에 걸쳐 항공기 잔해와 승객의 유품이 발견됐고, 소련의 미사일에 요격된 KAL007기의 경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됐는데, 사고발생 단 10일 만에 현지조사단을 철수시키고 기체잔해, 탑승객의 유체, 유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작업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33) 또한 정부는 기초적인 블랙박스 회수작업에도 소홀하였다. 비행기의 블랙박스는 바닷속에서 1,000도의 온도와 중력의 100배를 견디면서 30일 동안 반경 2마일에 계속해서 발신음을 보낸다고 하는데, 블랙박스 회수에 필수적인 ?수중공명위치탐지기?조차 갖추지 않은 채 수색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항공기사고 역사상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한 최초의 사고가 되고 말았다.


- 사고지점이 불명확하다.

 (34) 수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최종 교신지점조차 불분명한 상태이다. 당시 정부에선 최종 교신지점을 어디스로 파악했으며, 이를 근거로 태국과 미얀마 국경지대에 대한 수색작업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1987년 12월 5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 등에는 어디스보다 훨씬 서쪽인 토리스라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 수색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한 ‘확인작업중’이라는 언급만 있을 뿐, 이후 이에 대한 확인보고는 발견할 수 없다.

 (35) 정확한 시한폭탄 작동시간은 사고지점 파악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안기부의 수사발표와 김현희의 수기는 이 부분에서 엇갈리고 있다. 안기부의 수사발표에서는 김승일이 바그다드 공항에서 KAL기에 탑승하기 전 11월 28일 23시 05분경에 작동시켰다고 적시하고 있으나, 김현희의 수기에서는 탑승 20분 전인 22시 40분쯤에 작동시켰다고 되어 있어 무려 25분이나 차이를 보인다. 안기부의 수사발표대로라면 사고기는 보잉707 평균 순항속도, 최종 교신지점 등으로 미루어 사고지점은 태국, 미얀마 국경 산악지대의 동부 상공으로 되나 김현희의 수기대로라면 사고지점은 이보다 서쪽인 미얀마 남쪽 안다만 해역 중앙 상공으로 어디스 상공 부근이 된다.


- 발견된 기체에 대한 의혹

 (36) 당시 수색작업을 통해 발견된 잔해들 중에는 승객과 승무원들의 유류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모두가 비행기의 유류품들뿐이다. 그 수많은 승객과 승무원들의 유류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은 채 오로지 항공기 잔해들만 발견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37) 1987년 12월 13일 어디스에서 10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25인승 구명보트가 발견되었다. 구명보트 안에서는 13종 50여 가지의 물품이 나왔으나 이중 공기압축 펌프의 파손을 이유로 이를 KAL기 잔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비행기의 사고지점을 안다만 해역으로 확정지었다. 그러나 당시 미 해군이 작성한 안다만 해역의 해류도를 보면 하루 22Km씩 서쪽 대양으로 해류가 흘러간다. 안기부의 발표대로 사고지점이 안다만 해역이라면 사고 15일 만에 발견된 잔해는 육지 근처가 아닌 서쪽바다 쪽에서 발견되었어야 이치에 맞는다. 또한 이 구명보트는 말려 있는 상태에서 50종의 물품 중 공기압축 펌프만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겉이 멀쩡한 채 속만 탈 수는 없는 것이다.

 (38) 중앙일보 1988년 1월 15일자 보도에 의하면, 당시 이성언 태국 대사관 공보관은 858기 추락지점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카렌족 게릴라들이 858추락으로 인한 시신 15구와 실종자들의 사진을 갖고 있었고 이를 대한항공 직원에게 전했으며, 현장 안내 대가로 2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한항공측이나 정부측의 확인은 없었다.

 (39) 1990년 3월 안다만 해역에서 태국 어부가 건진 사고기 잔해가 1990년 5월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기체잔해 부분은 태극 마크와 88올림픽 공식항공사라는 의미의 ?Official?이라는 문자가 두 조각으로 쪼개져 있어 그 조각을 맞췄을 때 Official이라는 단어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정부 발표대로 사고기의 잔해라면 공중폭파된 잔해조각이 3년 동안 해류를 따라 흘러갔거나 바닥에 박혔을 텐데, 두 부분이 어떻게 함께 발견될 수 있었을까. 그 수많은 잔해들 중에 꼭 맞는 두 조각만이 발견될 확률은 극히 낮다.

2003. 11. 29.

김현희 KAL858기 실종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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