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걱정도 팔자`라는 말이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아니하여도 될 걱정을 하는 것을 농조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최근 주한 미국 대사관측에서 덕수궁터 지표조사 결과를 두고 `희한한 걱정`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이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덕수궁터 전체를 문화구역으로 지정, 복원계획을 세운다면 한국 기업체 건물들은 물론 러시아대사관, 영국대사관, 캐나다대사관도 모두 이전해야 하고 엄청난 비용이 들 것이다."

옛 덕수궁터의 일부인 경기여고 자리에 미 대사관(지상 15층, 지하2층)과 직원용 아파트(8층 54가구), 군인용숙소(4층)를 짓겠다는 미국측의 요청으로 실시된 문화재 지표조사 결과 이곳이 옛 덕수궁의 `가장 신성한 영역`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미 대사관측이 `걱정`하며 하는 이야기다.

지표조사 결과, 이곳이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라면 자신들의 계획을 철회하고 대체부지 마련을 촉구하면 될 터인데 엄청난 비용까지 걱정하는 것을 보면 참 `걱정도 팔자`라면 팔자다.

그러나 속사정을 알고 보면 미국이 우리 사정을 진정으로 걱정해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유독 미국대사관만 그곳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지당하신 말씀이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된다면 형평성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상대가 화날만 하다.
그런데 이번 일의 경우에는 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먼저 힘센 미국이 `형평성`을 강조하고 나서니 뭔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형평성은 대체로 약자가 강자들에게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들고 나오는 개념이다.
한미간에 체결한 SOFA나 `용산미군기지 이전 합의각서` 같은 경우에 우리가 불평등하다며 시정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대체로 그러하다.

그런데 힘이 센 쪽에서 형평성을 제기하면 약한 쪽에서는 압력 내지는 협박으로 들리기 마련이다. 미국이 제기했던 한국산 철강에 대한 보복관세나 쌀 수입 개방요구 같은 것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또 하나의 궁금증은 이번 지표조사 결과 보존 가치가 있는 문화유적지로 지정될 가치가 있다고 판명되었다면 신축건물부터 제한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굳이 기존 건물들에 대한 철거나 보상비용까지 거론하는 것은 `걱정도 팔자`를 넘어서 `못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속담이 더 적절해 보인다.

차라리 우리 정부더러 `4대문 안`에 좋은 대체부지를 확실히 마련해달라고 정중히 요청하는 것이 옳을 일이다. 사실 `4대문 안`에 마땅한 대체부지가 거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거기에다 `4대문 안`에 적절한 대체부지가 없다면 경기여고 자리에 예정대로 문화재 손상을 최소화해서 건물을 신축할 용의가 있노라고 살짝 덧붙여 놓는 것만으로도 미국측은 본심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고 상당한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대사관측이 비판여론까지 무릅쓰고 이런 논리를 강변하고 나서는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이다.

미국측은 용산미군기지 이전협상에서 유엔사 등 일부 부대의 용산 잔류와 함께 부족한 숙소문제 등을 한꺼번에 해결하려는 계산으로 28만평의 잔류 부지를 한국측에 요청했다.
당초 우리가 생각했던 규모보다 훨씬 큰 규모다.

28만평을 남겨둔다면 서울 도심에서 미군기지가 옮겨간다는 상징성은 빛이 바랠 것이 분명해지자 우리 정부가 반대해 나섰고 결국 미군측은 용산의 모든 기지를 옮기기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번 대사관 신축부지 문제의 근저에는 파병문제와 주한미군 재배치 등 한미동맹의 변화가 깔려있고, 미국측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아니 그만큼 미국측이 초조해진 탓이다.

물론 예전 같으면 미국측이 이 정도로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면 우리 정부가 알아서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몸을 낮췄을 법하다. 실제로 노 대통령도 고건 총리에게 긍정적 검토를 지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만은 않다는 것을 미국측도 우리 정부도 알아야 한다.
미국의 형평성을 앞세운 압력이 많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반발심을 키우고 더구나 우리 정통 문화유산, 그것도 민족 자긍심의 상징인 왕궁터에 대한 무시로 비춰지게 되면 사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미국측과 우리 정부는 한미관계의 역사를 돌아보고 진정한 형평성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더 깊이 고민해야할 때가 되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