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북한 지역에서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해 북로당을 출범시키면서 남한에서도 좌익 정당의 합당 문제가 제기됩니다. 남한의 3당 합동은 기본적으로는 남한 내부의 정치사정에 바탕을 둔 것이었지만 북한의 양당 합동에도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민당과 조선공산당 그리고 남조선신민당이 합동 작업을 진행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남로당이 출범합니다.
그러나 남로당은 좌익 세력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는 실패하였습니다. 합당 과정에서 3당이 모두 합당 찬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합당 과정에서 조선공산당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분열과 갈등의 골은 깊어졌습니다. 그 결과 인민당과 신민당 세력들 가운데 일부가 남로당에서 배제됩니다. 3당 합동 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그 후유증은 좌익 내부의 단결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왔으며 남로당의 대중 지도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제 남한의 3당 합동과 남로당의 출범 과정을 몇 번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박헌영의 정세인식과 `3당합동`론

1946년 8월 북한에서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의 합당으로 북로당이 출범하면서 남한에서도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 합당이 추진되었습니다. 남한에서 3당 합당을 추진하게 된 배경은 북한의 양당 합당에 자극받은 바 컸지만, 기본적으로는 남한의 정세 자체가 3당의 합당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공산당(1945. 9. 11), 조선인민당(1945. 11. 12), 남조선신민당(1946. 2. 5) 등 3개 정당은 해방후 남한 지역에서 조직된 대표적인 좌익정당이었습니다. 이들 정당들은 전통과 이념, 혁명의 성격과 단계, 그리고 지지기반에서 차이가 있었지만, 당면 과제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3당 공히 모스크바 결정 지지와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임시정부 수립, 일제잔재의 청산과 중요 산업의 국유화, 토지개혁 실시 등에서 의견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들은 모두 민주주의민족전선에 함께 참가했으며 모스크바 결정을 실천하기 위한 공동투쟁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46년 5월 미소 공동위원회가 무기휴회로 중단되면서 모스크바 결정의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습니다. 또한 6월 3일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 미소 공위가 합의를 보지 못한다면 남한만의 단독정부라도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당시 남한에서 가장 강력한 대중조직력을 갖고 있으면서 좌익 3당의 중심세력이었던 조선공산당은 미소 공위를 통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면 결국 공산당이 집권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공산당과 미군정의 우호적인 관계가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인식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46년 5월 16일 조선인민보에 실린 박헌영의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다음과 같은 발언은 그런 인식의 일단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미국이나 기타 연합국에 대하여 적대적 언행을 취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행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연합국과의 협력이 없이는 조선독립이 실현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며 또한 우리가 하루라도 독립이 속히 달성되는 길은 연합국과의 특히 미소 양국과의 친선과 협조를 더욱 굳게 하는 외에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공산당의 이런 정세인식은 46년 6월 중순을 지나면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의 의도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조선공산당은 반탁운동을 펴면서 미소 공위를 거부하고 있던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에 대한 반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들 우익세력을 지원하는 미군정의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좌익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자 1946년 6월말부터 노선전환을 모색하게 되고, 드디어 7월 27일 미군정의 탄압에 강력히 맞설 것을 골자로 하는 `신전술`을 채택합니다.

이와 동시에 조선공산당은 남한 좌익 3당의 합동을 모색하게 됩니다. 박헌영은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세가 근로인민의 이익을 옹호투쟁하는 한 커다란 참된 민주주의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고 있고, 3당합동이 이러한 요구의 구체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박헌영이 말하는 `복잡다단한 국내외 정세`는 대체로 국제적으로 "미국의 반동적 정책이 노골화되고", 국내적으로는 북한 지역에서는 "민주개혁이 실시돼 모든 행정권이 인민에게 넘겨지고 있으나 남한에서는 친일파와 반동세력의 책동이 갈수록 심해지는 상황"을 의미했습니다. 특히 박헌영은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이 자신과 여운형을 갈등관계에 빠뜨려 공산당과 인민당을 분리시키고 종국적으로 좌익세력 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와해시켜 여운형을 미군정 쪽으로 끌어당기려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러한 정세인식을 바탕으로 박헌영은 3당 합동을 주장하게 됩니다. 박헌영은 3대 정당이 민주주의발전의 단계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잔존세력의 철저한 소탕과 봉건적 유제의 청산을 통한 민주주의 독립전취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3대 정당이 노동자, 농민, 도시소시민, 인테리겐챠 등 근로대중을 중심으로 하는 정당들이며, 반동배들의 민주주의 진영에 대한 이간과 중상과 모략을 봉쇄하는 의미에서도 근로인민대중의 정당이며 참된 민주주의 정당인 3대 정당의 1대 정당으로의 합동이 요청된다고 했습니다.

박헌영은 따라서 "3정당의 합작은 현단계에 있어서 그 강령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조직에 있어서나 가능한 것이며 또 오늘의 정세에 있어서는 필연적이며 정당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박헌영의 주장 가운데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근로대중의 이익을 옹호하고 모든 민주역량을 결속하여 민전의 투쟁력을 더욱 강력하게 발휘하기 위하여 합당을 결정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강력한 좌익 정당을 만들고 그 당의 지도 아래 민전을 강화한다는 방침입니다. 박헌영의 이런 발상은 기본적으로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의 인민민주의혁명 과정에 그 이론적 바탕을 두고 있었습니다.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이 민주주의 혁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회당이나 사민당 등과 합당해 대중적 기반을 강화하고 영도적 정당으로서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방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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