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안기부 본관건물. 지금은 서울시 종합방재센터로 쓰이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고문과 의문사로 얼룩진 군사독재시절의 대명사인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옛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본부가 자리했던 서울 중구 예장동 산 4-5번지.

철늦은 단풍에 묻힌 이곳은 그저 평범한 남산 초입 야트막한 동산에 불과하고 지금은 서울시 종합방재센터로 사용되고 있어 높다란 안테나탑 만이 예전의 악명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서울시는 이곳을 유스호스텔로 리모델링할 계획이지만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죽어나간 이들의 가족과 동지들은 망자들의 한을 승화시키고 욕된 역사를 영원히 잊지 말자며 인권공원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상 처음으로 옛 안기부터에서 정치집회가 열렸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1일 오후 4시 25분경 옛 남산 안기부터 앞에서 `의문사 진상규명과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추모기념 옛 안기부터 보존 및 인권공원 추진을 위한 해원(解寃) 문화제`가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계승연대)와 `남산옛안기부터 역사보존 및 인권공원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주최로 열렸다. 옛 안기부터에서 정치집회가 열리기는 역사상 처음이다.

사회를 맡은 한충목 집행위원장은 당초 옛 안기부 본관건물인 종합방재센터 건물 앞마당에서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이틀전 불허통보를 받아 옛 안기부 정문 안쪽 공터에서 행사를 진행할 수 밖에 없었다며 아직도 `문턱`이 남아 있음을 규탄했다.

오종렬 계승연대 상임대표는 "이곳은 날씨도 좋고 낙엽도 구르고 로맨틱해 보이지만 선배 열사들과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무지막지하게 당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길을 떠난 곳"이라며 "인간의 머리로는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하고 잔인했던 현장"이라고 말했다.

▶이날 같은 시각 다른 곳에서 열린 집회들 때문에 문화제 참석자가 많지 않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오종렬 상임대표는 "지금도 대학로, 서울역 앞에서 집회가 있고 함께 해야할 분들이 여기 오기 민망할 정도로 정세가 긴박하다"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며 "민족문화공원으로 옛 안기부터를 바꿔야 하고, 어떻게 조국통일과 민중들이 행복하게 살 것인가가 이 자리에서 담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제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행사장에는 민중생존권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숨진 열사들의 사진과 약력을 담은 천들을 전시해 행사장을 길게 에워쌌으나 숨진 열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 더 걸 곳이 없어 뭉텅이 채 남겨지기도 했다.

노래패 꽃다지의 여는 공연을 시작으로 천지인, 우리나라의 노래공연이 진행되었고 사이사이에 유가족들의 증언과 호소가 이어졌다.

▶연극패 `한텅`이 허원근 일병 의문사를 소재로한 연극을 선보여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특히 군대에서 의문사한 허원근 일병을 소재로 한 울산지역 연극패 `한텅`의 `20년 진상규명, 부자간의 끊을 수 없는 사랑`이라는 연극은 참석자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었다. 상관들이 총기로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했던 이 사건은 아버지 허영춘씨의 20년간의 집념어린 노력으로 의문사진상조사위원회에서 1차로 타살로 판명된 바 있다.


"숨진 허원근 일병의 누나를 찾습니다?"

연극패 한텅의 연극을 지켜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하던 고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는 아직도 하고픈 이야기가 많았다.

▶사망한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 허영춘씨가 연극을 보며 눈물짓고 있다.
허씨는 있지도 않은 누나의 학비를 위해 허 일병이 군대에 갔다는 발표를 부인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허씨는 "1기 진상규명위에서 사건 결과 발표를 하면서 허 일병이 군대에 간 이유를 `누나 학비가 부족해서`라고 발표했는데, 있지도 않은 누나 학비를 위해 군대에 갈 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허씨는 "제발 허일병 누나를 찾아주는 사람은 후사 하겠다고 광고를 내달라"며, "이것은 군인들 민심을 평정하려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허씨에 따르면 "아직 진상규명이 제대로 안됐다"는 것.
허씨는 아들이 군대에 끌려간 이유가 시국관련 `지도휴학`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사건 당일 술자리가 만들어진 동기와 휴가 하루 전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 상급부대가 그렇게까지 발포자를 두둔하고 비호하는 이유 등이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극이 끝난 뒤 출연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허영춘씨는 "연극이 잘 됐다. 고문당하다시피 보았다"며 "그러나 누가 죽였느냐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아들 하나가 아니고 5공 8년동안 6천 5백명이 죽었다. 왜 아군의 총에 죽었는가 밝혀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해원문화제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을 간직한 두 명의 미망인이 무대에 올라 참가자들에게 진상규명을 절절히 호소해 특히 눈길을 끌었다.

지난 74년 사형판결 17시간 만에 8명을 처형해 세계적인 인권유린 사례로 기록된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하재완씨의 부인 이영교씨와 지난 87년 115명의 승객을 태운 채 실종돼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폭파되었다고 발표된 KAL858기 사건의 피해자 박명규씨의 부인 차옥정씨가 이들.

▶소위 `인혁당` 사건으로 처형당한 하재완의 부인 이영교씨가 진상규명을 호소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이영교씨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자신의 장기집권의 제물로 삼아 자행한 민주인사들의 학살음모에 억울하게 처형당한 인혁당사건의 희생자 가족을 대신해 남편들의 억울한 죽음을 감내하고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며, 이 사건을 "가장 비열하고 추악한 고문으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단죄했다.

[관련자료] "인혁당이란 너울을 쓰고"(전문) 보기

이영교씨는 전기고문 등 심한 고문으로 사건이 조작되고 군사재판 역시 "최소한의 상식을 벗어난 무법과 불법, 폭력 그 자체"였으며, 당시 중앙정보부는 "여덟 명의 유언조차 조작한 자들이며, 그분들의 묘비마저도 뽑아간 자들"이라고 성토하고 "이 사건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바른 평가를 받고 제대로 정리되어야 할 사건"이라고 호소했다.

특히 이씨는 "이 날을 이 자리를 언제나 기다렸"다며 "인혁당이 아내들은 이제 60을 넘어 76세 가까운 늙은 몸이지만 인혁당 진상규명에 마지막 힘을 모을까"한다는 의지를 밝히고 "저희마저 한줌의 흙이 되기 전에, 마지막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힘이 되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16년전 115명을 태운 채 사라진 KAL858기 가족을 대표해 차옥정씨가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KAL858기 가족회 차옥정 회장은 "저희 가족들은 정부의 발표를 전혀 믿지 않"는다며 "정부는 그동안 책임있는 답변은 한 가지도 내놓지 못하면서도 피해자들인 희생자 가족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이 사건의 의혹을 제기하는 뜻있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에만 골몰해 왔"다고 규탄했다.

[관련자료] “진상규명의 절대절명의 순간이 다가왔다”(전문) 보기

차 회장은 "이제는 의혹 속에 쌓인 KAL858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내고야 말 절대절명의 순간이 다가 왔다고 믿고 애써 일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우리 가족들의 희생도 지난 정권 시기 발생했던 여러 가지 의문사 사건들과 맥락을 같이하는 사건으로 생각한다"며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을 호소했다.

2시간여 동안 진행된 해원문화제는 김채원 박사와 민족춤패 출, 풍물반주단 소떼가 함께 공연한 `해원 굿`을 통해 망자들의 원을 달랬으며, 강경대 열사의 아버지 강민조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전 의장의 발언으로 마무리됐다.

▶해원문화제의 하일라이트 `해원굿`을 진행하고 있는 김채원 박사.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강민조 전 의장은 "여기 오면서 세월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며 "이곳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곳이냐. 이곳은 죽음의 장소로 정권에 기생하는 자들이 모든 것을 만들어 선량한 국민들을 고문하고 죽음시킨 곳이 바로 이 곳이다"고 소회를 밝혔다.

강민조 전 의장은 "87년 KAL기 사건에 대한 조명도 서서히 돼가고 있다"며 "이제는 새롭게 모든 것이 태어나고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여기 모인 사람이 얼마되지 않지만 우리가 앞장서서 모든 것을 만들어내자"고 호소했다.

이들은 오는 12월 5일 국가보안법 제정 55년을 앞두고 11월 29일 이곳에서 다시 집회를 갖기로 하는 등 이곳이 `인권의 터전`이 되도록 만들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다"
KAL858기 가족회, 16년만에 유가협 만나

옛 안기부터에서 열린 해원문화제에 낯익은 얼굴들이 속속 도착했다. 평소 의문사 진상규명 활동 등을 통해 서로를 위로하던 유가족들.

그러나 이날 행사장에 새롭게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었다.
KAL858기 가족회 차옥정 회장과 임옥순씨가 그들.

▶KAL858기 가족회 차옥정 회장(왼쪽)과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가 손을 맞잡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차 회장은 그간 이 사건의 진상규명을 도와온 심재환 변호사의 소개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눴으며,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와 두 손을 꼭 잡고 서로의 아픔을 나눴다.

87년 115명의 승객을 태운채 사라진 KAL858기 사건은 김현희와 김승일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폭파시켰다는 안기부의 발표에 따라 그간 `반공캠페인`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곤 했다.

실제로 KAL85기 가족회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을 폭파사건의 배후조종자로 고소하고 매해 11월 29일 열리는 위령제에는 이철승 등 보수우익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왔다.

그러나 2001년 기존 KAL858기 가족회 회장단의 행보에 반대입장을 취해온 차옥정 현 회장을 중심으로한 세력은 통일연대 등 재야단체들과 함께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규명 활동에 박차를 가했다.

2002년 3월 집행부 선거에서 차옥정씨가 회장에 선출되면서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고소를 취하했고, 오히려 2001년 위령제때 폭력을 행사한 이철승씨를 폭력행위 등의 혐의로 고소한 상태이다.

"여러분들께서 일찍부터 각종의 의문사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희생되신 영령들의 한을 풀고 그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애써오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들의 희생도 지난 정권 시기 발생했던 여러 가지 의문사 사건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사건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차 회장의 이날 발언은 16년 만에 KAL858기 가족들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가족들과 `아픔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말이었다.


[이모 저모]

▶행사장을 에워싸고 민중생존권과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산화한 열사들을 모셨지만
공간이 좁아 준비한 게시물을 모두 걸 수 없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민족자주평화통일 대구경북회의에서 마련한 `2003 민족문학 통일시화전`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락 그룹 천지인의 공연.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 원로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해원 굿`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노래패 `우리나라`의 공연 모습. [사진 - 통일뉴스 김치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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