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의학박사, 치과의원장)

이 기고는 지난 10월6일부터 3박4일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기념식 참관을 비롯한 평양 개성 육로관광에 관한 소감을 적은 방북기입니다. 지난 10월16일자 <방북기 1> "교제도 조절했지 뭐"에 이어 두세 차례 시리즈로 더 연재됩니다. - 편집자주


(속) 사나이 눈물

철책선이 뻥 뚤린 왕복 4차로보다 더 넓어 보이는 비포장도로상의 북측 경계선에서 비교적 뒤에 처져서 입국절차를 마친 나는 바퀴 달린 여행짐을 끌고 북측 땅에 들어섰다. 몇 발짝이나 갔을까.

"18번 버스 타십니까?"

▶SBS텔레비전 2003년 10월 15일(水)에 방영된 `뉴스추적`에 나온 `사나이 눈물`의
주인공 안내 李선생(우측)과 필자가 러브샷을 하고 있다. [사진 - 이병태 제공]

왼쪽 가슴에 김일성 주석 배지를 단, 내가 보기에 나이가 좀 든 남성이 다가오면서 이렇게 묻던 그 사람이 알고 보니 3박4일을 같이 지낸 북측 안내 李선생이었다. 그는 공주 李씨였다.

"나는 `평양-나-09-12`(나반 9조 12번)이었지. 내가 이 글을 계속하는 이유는 청탁도 있었지만 그대와 내가 `SBS뉴스추적`의 마지막 장면을 꾸몄기 때문이네."

인터넷신문 `통일뉴스`(www.tongilnews.com )에 원고를 보낸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자 미스 정이 호들갑을 떨었다.

"원장님, 내일 밤 11시5분 `SBS뉴스추적`에 이번에 다녀오신 것을 방송한대요. 얼굴이 넓적하고 인자하게 생긴 북한남자, 원장님 나이 비슷한 사람이 우는 장면도 있어요."

나는 잊지 않고 보았다 그런데 `사나이 눈물`의 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으로 떴던 것. 그 직전, 내 옆모습이 아주 짧게 잡혀 스쳐지나갔다.

그가 눈을 훔치며 우는 그 모습이 모두를 울리고도 남았다.

나는, 그가 내가 이 `통일뉴스`에 쓴 글로 인해 어떤 불이익(不利益)이라도 당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으로 고민을 했었다. 이 일은 하찮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가 이곳 텔레비전에 떴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 몇몇이 이별하는 장면이었는데 말이다.

"여보 李선생. 이쯤 됐으니 SBS텔레비전 2003년 10월 15일(水)에 방영된 `뉴스추적`을 보면 좋겠구려. 그리고 내친김에 이 글도 좀 보았으면 하네. 나도 아버지 돌아가신 후 처음 울었다고 알려줬으니 기왕에 둘이 껴안고 실토록 울어나 봤으면...

그리고 포옹을 풀고 서로 얼굴을 바라볼 때, 느닷없이 `호외입니다`, `긴급뉴스입니다. 동포여러분 남북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낭보(朗報)가 터져 나왔으면 오죽이나 좋을까마는 하는 생각이 어디 어리석은 일이겠는가 말일세. 우리 그때까지 울지 말고 각자 열심히 살아가세.

내가 당신의 우는 모습을 본 후로는 북쪽 하늘만 보면 눈알이 젖으면서 빨개지는 현상이 생겼네. 이것이 과연 누구 책임이겠는지."


서울-평양 불꽃놀이

나는 불꽃놀이를 좋아한다. 특별한 날에만 볼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불꽃놀이를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들뜨다가 곧 흥분해버린다.

2002년 월드컵때 한국이 4강에 오르자 온 세계가 놀랐다. 서울시청 앞에는 `붉은 악마`들이 들끓었고 그 열기는 전국적이었다. 그때 내 머리 위에서 폭음, 축하의 폭음을 내면서 하늘에 그려지는 불꽃을 잊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앞에서 벌어진 불꽃놀이. [사진 - 이병태 제공]

1년이 지났다.

2003년 10월6일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 앞에서 상상외의 불꽃놀이가 벌어졌다. 참관단들이 통일농구대회와 축하공연을 보고 나올 때 칠흑 같은 평양의 밤하늘에 명멸하는 불꽃을 보고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기념식에서 국가(國歌)대신 `아리랑`, 국기(國旗)대신 `한반도`기가 걸린 것도 한 과정이겠지만 나는 한스럽게 여겼다. 그 한과 응어리가 완벽하게 까만 평양하늘에 전개되었던 불꽃이찬란하였지만 또 그렇게 완벽하게 없어지기를 두 손 모아 빌었다.


평양랭면, "사리에다 식초를 칩네다"

둘째날 점심은 옥류관에서 평양냉면을 먹었다.

`평양냉면은 물냉면이요 함흥냉면은 비빔냉면`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던 내가 평양에서 연 이틀 점심을 본고장 냉면을 먹게된 것도 대형사건이다. 전날 밤, `양각도 국제호텔` 방에서 옥류관 냉면을 위해 청춘과 일생의 모든 것을 바치는 한 젊은이의 `논픽션 다큐멘터리`를 본 것도 인상적이었다.

관광버스 20대가 넘는 인원이 한꺼번에 옥류관에 들이닥쳤으니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육수는 시원할까, 사리는 얼마나 쫄깃거릴까, 아니면 푸석푸석할까 등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진 채 나는 엉겁결에 입구쪽에 앉았다.

냉면은 비교적 일찍 나왔다. 메밀 70%와 감자녹말 30%를 섞어 이긴 반죽으로 면발을 뽑아 사려놓았다가 내오는 속도에 능숙해서인지 냉면그릇 배급은 신속하였다.

내 옆에 한 일행이 분홍색 한복을 입고 냉면을 나르는 젊은 여성에게 요청했다.

"가위 없소?"
"짤라 달랍니까(잘라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가위는 필요 없습네다."

젊은 여성은 서울서 불고기나 갈비를 구울 때 쓰는 것과 비슷한 작은 집게로 냉면 사리 전체를 들었다. 사리에서는 육수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냉면을 먹은 옥류관 2층 난관에서, 대동강은 푸르리 푸르렀다. 필자의 오른쪽 어깨
위로 능라도의 `5월1일경기장`이 보인다. 옥류관[사진 - 이병태 제공]

"이렇게 사리를 들고 사리 위에다 식초를 칩네다."

그녀가 식초를 내가 보기에 `좀 많다`할 정도로 쳤다. 이어서 젓가락으로 사리를 맷돌 돌리듯 돌렸다. 놋그릇 안에는 사리가 둥글게 언뜻 쫀쫀한 나무 나이테처럼 풀어졌다. 그녀는 설명을 계속 했다.

"그리고 사리를 너무 많이 말고 적당히 집어서 그냥 후루룩 후루룩 마시는 듯이 드시라요. 육수도 마셔가면서 드셔야 합네다. 겨자는 그냥 치시라요. 자 맛있게 드십시오."

나는 육수까지 다 마셨다. 맛이 없었으면 이렇게 비울 수 있었을까.

`아이쿠, 저 동무 남쪽에서 얼마나 배 골았으면 국물 한 방울 안 남기고 다 먹었겠나.` 이렇게 놀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서울로 돌아와서 8순이신 선배께서 하시는 말씀에 `사리와 육수가 동시에 없어지게 먹어야지, 육수가 남는다든지 반대로 사리가 남는다면 어디엔가 문제가 있다`고 하셨다.

셋째 날 점심도 냉면이었다. 고려호텔 식당의 평양냉면은 또 다른 맛을 주었다. 전식(前食)으로 내온 불고기와 녹두지짐을 맛있게 먹고 맥주도 두어 컵을 했는데 이것이 실수였다. 사리가 옥류관 것보다 조금은 부드럽고 육수도 달랐다. 육수에 맛있게 풀어진 사리를 조금 남겼다. 지금도 그 때 남긴 냉면 그릇이 눈에 선하다.


`평양쌀고추장`과 프랑스치즈

서흥휴게소 매대(간이장터)에서 평양쌀고추장을 사온 나는 서울에 온 후 삼일간 저녁밥을 그냥 비벼 먹었다. 김포밭에서 따온 상추와 신 냄새가 물씬 나는 열무김치를 넣고 비비려고 평양쌀고추장 통을 열었다. 고추장 빛깔에 너무나 친근감이 갔다. 나는 젓가락으로 찍어서 맛을 보았다.

"아니!"
어쩌면 순창고추장 맛과 그리 비슷할까. 달지 않고 조금 덜 짠 것 외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너무나도 유별난 맛을 기대했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집집마다 장들을 백화점이나 시장에서 사다 먹고 있으나 내가 청소년 시절만 해도 친구네 집에 가면 색다른 장맛에 즐겁게 먹고 놀았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내는 고추장, 된장을 담구더니 지쳤는지 거르는 해도 있다.

몇해전 서울에서 수돗물에 불소를 넣어야 한다는 치과계와 공해 때문에 반대한다는 양론이 있었다. 찬성쪽인 나는 당시 북한에서는 인민들의 구강병중 제일 비중이 큰 충치를 없애기 위해 고추장과 된장에 불소를 넣는다는 보도를 보고 더더욱 찬성에 목청을 올리기도 하였다.

갑자기 버터와 치즈 이야기를 하자니 너무나 이야기가 꺾이는 듯 하지만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치즈를 많이 대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치즈를 못 먹는다. 그래서 오래 전에는 고춧가루를 가지고 다녔으나 이제는 비행기 기내식에 고추장이 나와 아주 기쁘고 이것을 이용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치즈 책이 나오고 프랑스 치즈 지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마을마다 지방마다 각기 특색 있는 치즈를 만들어 먹고 또 팔고 있다.

그 치즈가 나에겐 고역이지만 이 치즈를 즐기는 사람들은 환상적이라고까지 하였다. 치즈 이야기의 결론은 치즈가 획일적이 아니고 맛도 천차만별하여 통일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파리의 개선문과 평양의 개선문이 다르듯이 치즈와 고추장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러나 장맛이 너무 비슷하거나 같으면 나는 이 점에서 크게 실망하는 것이다.

평양쌀고추장과 순창고추장, 이 두 고추장의 맛에 별 차이가 없다면 나는 큰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는 것처럼 그 고유한 것들이 많아야 한다. 많아야 한다기보다는 남아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특색, 그 지방색이 어디 분열일 수만 있겠는가.

나는 평양쌀고추장으로 밥을 비벼먹으면서 혀가 색다른 맛을 느끼길 원했다. 평양쌀고추장은 달지 않고 그리 짜지 않은, 그러니까 맛이 순한 그런 고추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예쁘다` 와 `곱다`

우리들이 평양과 개성에 체재하고 이동하는 모든 행사표에는 백화점이나 상점을 들르는 계획은 없었다. 일행중 한 두 사람이 안내 李선생한테 청했다.

"여보시오, 안내 李선생! 이렇게 버스로 짐짝처럼 싣고 다니지만 말고 어디 물건이나 기념품 파는데 좀 갈 수 없소?"

버스는 이미 `금강산상점` 앞에 섰다. 쇼핑할 시간은 30분이었다. 나는 한반도기가 박힌 런닝 한 장을 사들고 얼른 나왔다. 그리고 그 인접 평양거리를 둘러보면 사진을 찍었다. 얼마 전만 해도 이런 거리에서 사진을 찍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측에 변화가 일고 있음을 실감했다.

나는 평양거리를 눈에 익혔다. 12시가 다가오는 오전, 서울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빨강 스카프를 한 초등학교 소년소녀들이 줄을 지어 길을 건너와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일행들은 사진을 찍고 나도 찍었다.

▶`고운` 평양 초등학교 아이들. [사진 - 이병태 제공]

1미터 앞에서 아주 가깝게 아이들을 보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면서 웃고 있었다. 비록 햇볕에 그을린 피부였지만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순진한 얼굴들에서 내 가슴은 뛰었다.

참으로 귀여웠다.
"아유, 예쁘다. 얘들아 니네들 정말 예쁘다. 잘 가."

내가 손을 흔들자 아이들도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속도를 내서 빨리 지나갔다. 그러더니 저만큼 가서는 줄도 흐트러지고 서로 쑤근쑤근 거리면서 우습다는 식으로 재잘거렸다. 이내 그들은 담모퉁이로 사라졌다.

내 뒤에는 안내 李선생이 있었다.

"쟤네들 왜 웃고 조잘거리는 거요. 내 꼴이 이상한 모양이지?"
"게 아니구, `아유 예쁘다` 하셨지 않습니까? 하니까니 그렇지요."
"예쁘다고 했는데. 왜?"
"야아, 곱다, 이렇게 해야 듣기에 옳지요."

`브래지어`를 `가슴띠` 또는 `젖싸개`, `코골이`를 `코나발`, ``웅변`을 `화술`, `응접실`을 `접대실`, `하다면`을 `그렇다면`처럼 말의 차이가 있지만 나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사투리가 있고 제일 잘 사는 스위스는 그 언어가 5가지가 넘기도 하기 때문이다.


`류경`과 `유경`에 관하여

▶`류경정주영체육관` 기념식장에 도착하자 서쪽 하늘에는
기이한 구름이 떠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진 - 이병태 제공]

류경(柳京)은 평양의 옛 이름이다. 우리들은 `유경`이라고 하는데 북측에서는 `류경`이라고 한다. 두음법칙에 따르면 `류경`이 아니라 `유경`이 맞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도 `류경`과 `유경`을 혼용하는 것도 언어가 시대적으로 겪는 고통이라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평양을 왕검성(王儉城), 기성(箕城), 낙랑(樂浪), 서경(西京), 류경(柳京)이라고 불러왔다.

평양은 대동강과 그 지류인 보통강이 있어 아주 아름다운 지형을 가지고 있다. 한강에는 밤섬도 있지만 여의도만이 내 놓을 수 있지만 대동강에는 두루섬, 쑥섬, 양각도 그리고 능라도가 있어 아기자기하다.

오염되지 않은 대동강에는 늙은 장어와 잉어들이 들끓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민문화궁전에서 먹은 장어에서는 유난히도 흙 냄새가 확 풍겼다.

내가 `류경`과 관계된 것 중 제일 처음으로 들은 것은 `류경호텔`이다.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공직생활을 하는 조카가 1993년에 평양과 개성을 다녀왔다면서 보여준 `류경호텔` 앞의 기념사진이었다. 그때 그가 들려준 사연이 흥미 있어 희미하지만 지금도 다음처럼 더듬을 수 있다.

`124층이나 되는 류경호텔 공사는 그 골조는 다해놓고 그만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사가 끝날 때까지 건축중인 건물 밖을 나가지 않겠다면서 1년 간을 계속 일을 한 근로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타워크레인 기사였다.

당국에서는 그에게 영웅칭호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 하지만 김일성훈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 후 그는 일생을 통해 영웅대접을 받게 됐다.`

▶`류경호텔` 꼭대기에는 타워크레인이 있고 그 `류경호텔`과
`류경정주영체육관`은 직선으로 불과 300m정도의 거리에
있다. [사진 - 이병태 제공]

지금도 `류경호텔` 꼭대기에는 타워크레인이 있고 그 `류경호텔`과 이번에 개관한 `류경정주영체육관`은 직선으로 불과 300m정도의 거리에 있다.

10월 9일. 평양에서 아침을, 개성에서 점심 그리고 서울에서 저녁을 먹고 나는 그냥 깊은 잠에 빠졌다. 이튿날 나는 텔레비전 자막뉴스에 `류경호텔 공사 재개`라는 글씨가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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