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태(의학박사, 치과의원장)

이 기고는 지난 10월6일부터 3박4일간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기념식 참관을 비롯한 평양 개성 육로관광에 관한 소감을 적은 방북기입니다. - 편집자주


1. 일인은 만인, 만인은 일인을 위하여

평양에는 동포들이 활발하게 살고 있었다. 개성은 고려의 역사가 잔존하고 있어 더욱 친근감을 느꼈다. `3박4일간 다녀온 주제에 뭐 그리 안다고 말하는가?` 이런 질문에는 부끄러운 감정을 가지면서 글을 시작한다.

▶인민대학습당 6층 베란다에서 바라본 김일성광장과 주체사상탑.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나는 6.25전쟁 때 초등학생이었고 선친께서는 왼쪽 발목이 골절되는 부상을 당하셨다. 무엇보다도 나는 먹을 것이 없어 먹지 못하여 배가 부풀어오르는 증상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기사회생하였다.

그리고 나이 서른일 때는 치과군의관으로 전방사단 의무중대장으로 복무하면서 백마고지가 보이는 비무장지대도 출입하면서 발치를 하고 응급처치를 하면서 북녘 땅을 지척에 둔 적도 있다. 이제 나이 육십을 넘어 백발이 성성한 세월을 맞아 이런 글을 쓰다니 인간적 고뇌와 만감이 소용돌이친다.

`일인은 만인을 위하고 만인은 일인을 위한다`라는 표어아래 독일에서 시작한 신용협동조합은 어디까지나 사회주의 제도 중 하나이다. 나는 서울에서 `서울 치과의사 신용협동조합`을 결성(1979년)하는데 앞장섰고 지금은 40여 명의 직원이 활약하고 있다. 많은 치과의사들이 혜택을 받고 나 또한 큰 혜택을 누리고 있다.

남과 북을 위하여 뭔가는 조금을 하고싶은 생각이 있어 행동은 하고 있지만 여의치 않다.

2. 내가 본 개성-평양 고속도로

개성을 빠져나와 만수다리를 앞에 두고 우회전하면 곧 개성-평양간 고속도로에 진입한다. 1987년 12월 개성직할시에서 착공하여 김일성 주석 80회 생일인 1992년 4월15일에 완공한 북한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고속도로의 3대조건은 (1)고속으로 달릴 수 있을 것 (2)중앙분리대가 있을 것 (3)입체교차로가 있을 것 등이다.

이 도로는 총연장 170km, 노폭 24m 정도의 왕복 4차로인 시멘트 포장 도로이다. 내가 탄 일제 버스는 80km로 주행하였고 중앙분리대는 가슴높이 정도의 측백나무로 일관하여 자연친화적이지만 정면충돌 위험이 있다. 10년이 지난 포장은 군데군데 마멸되어 타이어 마모도 클 것으로 보였다. 차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 차량통행이 그리 빈번하지 않은 것을 직감할 수 있다.

평양에 들어와야 차선이 나타난다. 중소도시로 진출입하는 나들목은 12개, 육교도 두세 군데 있고 비교적 일직선인 관계로 굴(터널)이 많다. 짧은 것부터 긴 것은 1km가 넘는 것까지 18개(통일굴, 삼거굴, 계정굴, 례성굴, 옥천굴, 룡궁굴, 주포굴, 부흥굴, 삼룡굴, 문암굴, 서봉굴, 충효굴, 양암굴, 가창굴, 삼봉굴, 정방굴, 대동굴, 장천굴)가 있다. 임시 장터로 마련했던 휴게소 `서흥찻집`이 한 곳 있고 주유소는 보이지 않았다.

▶개성-평양간 고속도로 중간에 있는 휴게소 `서흥찻집`. 여기서 남측 참관단을 위한
임시 매대가 설치됐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개성에서 평양으로 달리자면 멸악산 줄기와 정방산을 넘을 때는 제법 경사진 곳도 몇 군데가 있다. 강과 하천을 통과하는 크고 작은 다리가 90여 개 있다. 그 밑에 흐르는 물이 깨끗하기 그지없다.

이 고속도로는 1992년 9월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때 남측 대표단이 통과했고 민간인으로는 1998년 6월16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 500마리를 실은 트럭을 몰고 역사적인 질주를 하였다. 이때만 해도 김윤규 부사장 등 7명은 베이징을 통해 정 명예회장과 합류했는데 이번에는 김 사장이 앞장서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 갔던 것이다. 남측 민간인이 무려 1천1백여 명이 분단 58년만에 통과하는 것도 또한 최초였다.

이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는 110km이고 이정표는 4km마다 서있다.

3. `조강대교`를 놓자

나는 `2천년대를 향한 교통백서`라는 원고청탁을 받고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을 쓴 적이 있다(<굴렁쇠> 1990년 봄호, 한국타이어 사보, 10~13쪽). 거기에 인천공항-강화도-개성 또는 김포와 개성을 잇는 다리를 놓고 이름은 경기도의 경(京)과 황해도의 황(黃)자를 따라 `경황교`를 놓자고 꿈 아닌 꿈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인천공항은 이미 운용되고 있으며 개성공단이 실현단계에 있다. 나는 개성 주변은 `통일수도`로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개성공단이 실현되면 옛 나루터였던 북의 개풍군 조강리와 남의 김포시 조강리 사이에 `통일대교`를 놓아야한다는 낭만적인 그림을 그려보았다. 지금 이는 그냥 꿈이라거나 막연한 주장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38선이 남북을 가르고 있을 때만 해도 개성은 이남이고 설악산은 이북이었다. 그러나 1953년 휴전후 한강하류는 남북의 군사분계선이 되어 그 좋은 지형적 장점을 살리지 못한 채 남북은 서로 큰 발전을 놓치고 사는 형편이 되었다.

▶개성시내 풍경.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밀물과 썰물을 이용하여 한강 하류 조강나루터ㆍ서강ㆍ여의나루ㆍ노량진ㆍ보광나루ㆍ개포ㆍ잠실을 거슬러 가면 충주까지 오르내린 그 물길은 사라진 듯하다. 후손들은 물길로 된 통로를, 사라져버린 전설처럼 전혀 모르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백제를 쳤고 이에 백제는 다시 남하하였다는 것도 모르니 말이다.

한강 하류의 조강리는 남과 북으로 분리(分里)되는 비극에 처해있다. 개성인삼이 강화인삼으로 유명해진 것도 개성과 김포 그리고 강화가 일일 생활권이었고 아주 이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조강리ㆍ전유리ㆍ고막리ㆍ군하리 등 월곳면의 나이든 노인들은 새벽 일찍 나서서 개성장(場)을 보고 국밥 한 그릇 먹고 북 조강나루터에서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인삼 뿌리를 씹으며 강을 건너 집으로 와서 피곤을 풀었노라고 회고한다. 또 개성사람들도 군하장을 보고 강화장을 보았다는 것이다.

남측 조강리는 이토정이 지난 유적도 있고, 바로 애기봉이 있고, 물이 빠지면 강폭이 좁아 남북을 잇는 다리를 건설하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본다. 나는 현대건설 광화문 사옥 지하상가에서 20년간 치과의원을 했기 때문에 현대가 맡은 국내외 건설이나 건축에 관한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자주 들어왔다.

치의학도 이공학적이며 기계적인 면이 많아 늘 들어온 이런저런 짜투리 건축상식이 늘었다. 그리고 <가로수를 누비며>(진행), <푸른신호등>, <명랑교차로> 등 교통방송에 고정출연하여 부전공 같은 이력이 있어서 특별히 남북교통에 관심이 많다. 예를 들면 `조강대교`건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개성의 생산품이 인천공항으로 가면 바로 세계로 퍼지기 때문이다. 개성공단 - 조강대교 - 김포 - 인천공항. 이제 이것은 꿈이 아니고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4. 빨강 넥타이와 홍령건

내가 빨강에 눈을 뜬 것은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치성 때문이다. 낳아주신 어머니라고 한데는 이유가 있다. 생모께서는 고등학교 일학년 때 돌아가시고 새어머니를 모시게 됐고 지금 이 글에 등장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수양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다. 어려서 한번은 나에게는 어머니가 세 분이라고 했다가 혼쭐난 적도 있다. 내가 고추를 달고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워낙 몸이 허약해서 부모께서는 별의별 일을 다하셨고 드디어는 굿도 하셨단다.

어느 날 나는 발등과 발가락 사이가 놀랍도록 뜨거워 눈을 떴더니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고 순간 붉은 단청과 오색찬란한 천장 그리고 밝은 햇볕과 함께 보면서 그만 까무러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절이 아니면 무당 집이었고 수양어머니를 맞아드리는 의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때가 8.15전이므로 나는 유년시절에 이미 빨강과 파랑 노랑에 익숙하게 되었고 특히 빨강을 좋아하게 되었다.

1960년 대학에 들어와 산악활동을 하는 데도 목긴 노랑 양말에다 십자실 무늬(빨.노.파.보.흑.백) 상의를 입고 우이동 골짜기에 나타나면 `기생오라버니` 라거나 `촐랑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당시 등산복은 군복을 탈색하거나 검정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다. 동네마다 염색탈색 영업집이 있었던 것도 6.25 이후의 한 시대적 상황이었다. 그런 시절이어서 나는 시쳇말로 너무 `튀었던 것`이다. 나는 당시 유럽 알프스 등산지를 보고 총천연색의 산악인과 그 장비들을 꿈에 그리고 있던 때였다.

인턴이 되어 병원생활을 하면서 깔끔해야 한다는 원내규율에 따라 주로 빨강 넥타이를 맸다. 우리에게는 `빨갱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듯한 느낌을 가지기도 하였다.

중국과 북측에서는 깃발 휘장 구호 등에 온갖 것을 붉은 색으로 하기 때문에 빨강 넥타이를 매면서도 남을 의식할 때는 묘한 마음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빨강은 승용차에서도 나타났다. 첫 승용차였던 제미니는 자주색, 맵시와 스텔라는 벽돌색, 소나타는 자주색이었다. 그러나 그랜저에는 빨강계통이 없다고 하여 흰색 차를 타고 다니고 있다.

이번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및 통일농구대회`에 참관하면서 공식행사 외에는 체크무늬 남방과 개나리 노랑 겉옷을 입고 다녔는데 이 또한 튄 모양이다.

▶류경정주영체육관 개관 기념식.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중국에서 빨강 넥타이가 집단으로 생겨나기는 1974년 8월3일이었다. 베이징 초등학생들 전체를 매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을 `홍린진`(紅領巾 홍령건)이라고 하는데 국가에 충성한다는 뜻이고 전투교육을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이 홍린진은 국어(중국어, 한어), 수학, 역사 외에 군사과목을 넣어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을 하기 위한 조처였다.

내가 매는 빨강 넥타이는 전투나 군사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그는 말했다. "이 박사 선생님, 빨강 넥타이 매서 그런 줄 알았더니 그렇지 않아."

5. 북측 태풍명칭 `매미`

북측 안내자 李선생. 그는 처음으로 내게 질문을 했다.

"지난번 태풍피해가 대단했대지?"
"음 엄청났어. 큰배가 육지로 밀려 올라오고 산이 부서져 내리고 집 떠내려가고 강이 넘치고..."
그는 듣고만 있었다.

"텔레비젼으로 부서진 항구, 통곡하는 수재민을 낱낱이 다 알려주니까... 앉아서 다 볼 수 있지. 지난 9월 추석 연휴 때 중국 길림 연변 제2인민병원에 갔다가 인천공항에 내리는데 비행기가 몹시 흔들렸지. 비행기에서 내려 버스로 광화문에 도착했더니 초등학교 2년생 큰 손자녀석이 묻는 거야. `할아버지, 매미 알아?` 이렇게 묻기에 매미에 대해 뭘 묻는 거야 했지. 그랬더니 이 녀석이 하는 말이 `할아버지, 매미가 북한에서 지은 태풍이름이래` 하는 거야."

듣고 있던 李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야아, 그거 참으로 안됐다."
그는 동포로써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6. "교제도 조절했지 뭐"

나는 그의 가족상황이 궁금했다. 오히려 내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여보 李선생, 나는 아들 셋, 손자 둘, 손녀 하나 이렇게 있는데 자식이 몇이오."
달리는 차창 앞만 보고 있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평양체육관에서 오전 일과를 마치고 무리지어 나오는 소학교(초등학교) 학생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긴게 아니구. 내말야."
"긴게 아니구 그딴 소리 그만하고 빨리 얘기하라구."
"야아, 이거 좀 안그런 줄 알았더니 그렇구만. 내 얘기 좀 들어 보라우. 여자한테 쓰지 말라하고 내가 교제도 조절했지 뭐. 그걸 쓰면 여성동무가 아파한단 말야. 근데 말이야..."

"잠깐, 교장선생님(일행), 이사장님(무역업). 두 분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내가 그의 말을 막고 두 일행에게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설명하죠. 지금 안내 李선생 말은 산아제한 방법으로 부인에게 루프(loop)를 사용하지 않게 하고 잠자리로 불임을 조절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통역 아닌 설명을 하자. 모두들 웃었다. 그는 이야기를 이었다.

"야아 듣고보니까 그렇구만. 얘기를 들으라우. 근데 셋째 아이는 내 긴 출장을 가겠는데..."
"아니 여보 그럼 세 명야? 당에서 하나나 둘만 두게 했을 텐데. 선생은 반동이야 이거. 그래 장기간 출장간다고 했지."
내가 농담삼아 소리치듯 했더니 주위도 웃고 그는 손짓을 해가며 말을 이었다.

"아, 이 여성동무가 가까이 하자는 게야."
"여성동무가 마누라라는 뜻이지?"
"마누란지 뭔지 얘기 들으라우. `날짜 괜찮은가` 했더니 일없다는 게야. 그리구 출장을 갔다가 왔더니 배가 불러 있더라구."

우리 일행은 조용해졌다. 이것은 음담패설도 아니요, 그 자신의 부부관계와 가족에 관한 지극히 인간적인 토로였다.

"야아, 이거 말을 못하겠구만. 저 배속에 남의 새끼가 들었으면 억하나(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도 피뜩피뜩 들더란 말야. 게두(그래도) 난 암말(아무말) 않았지. 그치만 궁금한 게야."

평소 말수가 적고 과묵하던 그가 지금 우리들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다.

"결국은 애를 낳았지. 근데 나를 닮았더라구. 크면서 나하고 똑같애."
숨죽이며 듣고 있던 우리는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이 `야아`하는 괴성을 질렀다.

"저 李선생 괴짜군. 자식이 셋이라는 것을 아주 넉살좋게 정당화하는군."
"그케(그렇게) 됐지. 딸은 29살, 큰아들 26살 그리고 막내가 22살이지."
"막내는 지금 뭐해."
그는 `찔러 총` 자세를 했다. 군복무중이라는 뜻이다. 큰아들도 군인이다.

"근데 이박사 선생은 빨간 넥타이를 매기는 했는데 빨갛지가 않은 것 같애. 공안 시켜 붙들어 갈까."
"야아 이젠 겁주는구나."

그는 어지간하면 못하는 농담을 했다.

"이박사 선생은 다재다능한데 다재무재(多才無才? 多才無財?)란 말이 있지. 내 막내 야는 뽈을 잘 차더니만 트럼펫도 불고 기타도 치고, 이선생님도 손톱 긴 것 보니까니 좀 치갔구만."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고 가족 구성이 비슷해서인지 누가 들으면 아주 험악해 보이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에게서 인간적임을 확 느꼈다.

7. 개성 성균관에서

개성.
은사, 선배, 친구, 이웃에 개성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김포 문수산에 오르면 송악산이 보이고 삼각산 인수봉에 올라도 보인다. 지척의 거리이기 때문에 정겨운 곳이다.

▶개성에 있는 성균관. 이 안에 고려박물관이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내가 탄 버스가 개성에 진입했다. 주민들이 손을 흔들고 학교에서는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아, 개성. 저 송악산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김포의 문수산에서도 보인다. 문수산은 내가 잠자는 뒷산이다.

수백명이 모여 들다보니 나는 선죽교가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했지만 나도 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찍었다. 선죽교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있던 고려 성균관 앞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동서남북을 가늠해 보았다. 평생 `치의학 사전` 편찬을 하고 있어 성균관이라거나 팔만대장경 같은 이런 존재는 나에게 한량없이 크나큰 실존과 형상으로 부각돼있다.

비록 내가 서울대학교를 나왔지만 이따금 성균관이야말로 역사적인 국립이고 민족적인 대학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실제 성균관이 아닌 한두 대학에서 이런 내용을 강연한 적이 있다.

8. 왕건왕릉 숲속에서

고려 태조 왕건왕릉을 참배하다니......

▶개성에 있는 왕건왕릉.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나는 6.25때 경주로 피난하여 경주친구들과 `박혁거세 오능`을 들러 놀던 적이 있다. 거기서 어느 누구로부터 설명도 듣지 못하고 그냥 신라의 첫 임금이라는 말만 듣던 옛 추억이 떠올랐다. 다만 격리되고 고요했던 느낌은 확실하다. 그런데 여기서도 그와 똑같은 감정을 가졌다.

경건한 마음으로 선조들의 생활을 되짚어보면서 여기저기를 사진에 담았다. 역사에서 터득해야 할 과제가 하나둘이 아니기 때문에 계획에 없던 고려 태조 왕건왕릉 참배는 내 일생에 큰 사건이다.

한 두 치과대학에서 의학역사를 강의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인류, 과학, 왕권, 민생 등을 공부하고 있는 터라서 더더욱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정신 없이 사진을 찍고 내려왔다. 줄을 서서 북측에서 제공하는 곽밥(도시락)과 맥주, 물을 각각 한 병씩 받아 들고 주위를 살폈다.

`그래 나 혼자 물 마시고 밥 한술 뜨고 반찬 집어먹고 맥주 한 모금 먹고 그리고 고려를 생각하고 신라도 생각하자. 오늘은 집으로 간다. 이런 일을 엮어보자.`

그런데 바로 오른쪽 숲속에서 나를 보며 손짓하는 사람 둘이 있었다. 안내인 李선생과 동서 이사장, 그 옆에는 활짝 웃고 있는 교장선생님도 있었다. 그들은 이미 반쯤을 먹고 있었다.

"야아, 청주 李씨(필자), 성주 李씨, 공주 李씨, 종친회 하는구만."
내가 이런 말을 하면서 앉자 李선생은 내게 맥주를 부었다. 부었다기보다는 내가 말했다.

"여보, 맥주 따르라. 그리고 희망의 잔을 마시자."
비록 종이컵이지만 내가 제기해서 그와 나는 이른바 `러브 샷`을 했다.

그가 내가 하는 이런 제의에 따르다니 정말 세상은 오래 살고 봐야 할 일이라고 한 어른들의 말이 새삼스럽다.

9. 사나이 눈물

"18호 버스를 타십니까?"
"네."
국교수립 전 중국에 들어갈 때처럼 긴장감이 엄습했지만 그때와 같은 절박감은 없었다.

"이리 오시오."
지나놓고 보니 그는 3박4일간 나를 데리고 다닐 안내인 李선생이었다.

내가 탄 버스에는 북측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에서 나온 두 사람이 동승했다. 나는 별나게 그들과 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북측 어느 누구에게도 절친하게 접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반대로 하자면 북측의 누구와도 함께 말하고 싶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두문불출 식의 행동을 했다.

그는 나이가 꽤 들어 보였다. 일과후에 그와 말하고도 싶었지만 3박4일 동안 저녁 일과후 밤에 어느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사실 그와는 얘기를 좀 나누고 싶었지만.

오로지 왕건왕릉 숲속 야외에서 점심으로 곽밥을 먹는 것이 그와의 호젓한 시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단 한잔. 그것도 종이컵에 따른 거품뿐인 맥주 한 컵이다. 행사계획에 따라 우리는 버스에 올라 남쪽으로 달려 북측 통관지역(야외)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린 우리들은 각자 짐과 북녘에서 산 선물꾸러미를 챙기고 남으로 가야할 순간이다.

▶참관단이 북측 CIQ를 건너 비무장지대에 대기중인 남측 버스로 갈아타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이계환기자]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다.

바로 내 옆에 안내원 李선생이 있다. 안경 속의 실눈 같은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여보, 李선생, 건강해야 돼. 오래 살면 또 만날꺼야. 저 이사장은 개성에 공장을 꾸릴꺼야."

농담이었지만 그는 동명성왕능 옆에 내 묘지를 마련해 놓겠다고까지 했다. 나는 화장하기로 했다고 했지만, 안경을 벗고 우는 그를 뒤로 하고 내려오면서 나도 울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3여년 만에 처음으로 흘린 눈물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내게 늘 `저리 가라는 듯한 손짓`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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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약력>

의학박사, 치과의원장
<월간치과연구> 편집인
대한치과의사협회 회사편찬 위원장
중국 길림 연변 제2인민병원 명예원장
남북치의학교류협력위원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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