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언(시민의신문 편집위원장)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를 둘러싼 논쟁은 우리 사회가 사상적으로 얼마나 경직되어 있고 시대적으로 얼마나 뒤쳐져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냉전 시대가 막을 내린지도 어언 십여 년이 지난 오늘날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도 냉전 이데올로기라는 허울을 벗지 못한 채 소모적인 이념 논쟁에 휘말리고 있다.

냉전 이데올로기란 마치 천칭의 법칙과도 같아서 한 쪽의 힘에 의해 다른 쪽이 공중 분해되어야만 하는 적대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주도권 쟁탈을 위한 전쟁의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소위 `너 죽고 나 살자`라는 전체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냉전 이데올로기는 세계를 항상 불안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에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만 했던 이데올로기였다.

다행하게도, 소련의 몰락과 함께 냉전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유물이 되었고, 그 대신에 세계화의 물결이 넘실대고 평화와 공존을 위한 대화와 타협의 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 이러한 세계 정세의 변화와 더불어 김대중 정부의 역사적인 노력으로, 한반도에도 냉전 시대가 가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개막되어 다방면에서 남북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순응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대업인 통일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과제이고, 따라서 냉전 이데올로기의 청산은 통일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첫 번째 과제이다. 어찌 냉전 이데올로기를 품은 채 통일을 꿈꿀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아직도 냉전 이데올로기에 젖은 세력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돋보기를 들이대고 조금 더 세밀히 들여다보면, 그들이 그렇게도 끈질기게 신주 모시듯 냉전 이데올로기에 집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반시대적인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것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들은 통일이 하루라도 더 지연되는 것이 그들의 안위를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다.

물론 그들의 생존전략을 일방적으로 나무랄 수만도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내세우는 냉전 이데올로기가 이제는 허울뿐인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데에 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극우에 치우쳐 있어서,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뭇솔리니의 파시즘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더욱 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로지 자기만을 내세우기 때문에 파쇼이고 독재자들이다. 그들이 들먹이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적 민주주의에 지나지 않다.

오늘날 정치 사회적으로 민주주의 체제가 실질적으로 가장 잘 구현되고 있는 나라들 중의 하나인 프랑스의 경우를 보자. 프랑스에는 장-마리 르펜이 주동하는 극우파에서 아길레트 라길리에가 이끄는 극좌파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데올로기가 공존하는 사회이다. 심지어 프랑스 공산당은 냉전 시대에도 사회당과 더불어 좌파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이었고, 1981년에는 프랑수아 미테랑 사회당 후보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프랑스가 `빨갱이` 나라인가? 이탈리아에 공산당이 있다고 해서, 가까운 나라 인 일본에 공산당이 있다고 해서, 이들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가? 진정한 민주주의 이념은 사상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적대 이데올로기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이념이다.

또한, 헌법 전문에 민주주의 체제를 표방한다고 해서,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인가? 우리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겉으로는 민주 체제임을 가장하고서 실제로는 독재 체제인 국가들은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것은 결국 이데올로기와 체제는 다른 차원의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이데올로기라도 해도, 그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정치 세력에 따라 그 결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도 그렇고, 맑시즘도 그렇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각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데올로기가 다양하면 할수록 그 사회는 다양한 목소리가 현실 정치에 반영되기 때문에 더욱 민주적인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몸뚱아리가 아니라 몸뚱아리 위에 걸치는 겉옷과도 같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른 옷을 입을 수 있고, 게다가 날씨와 상황에 따라 어떤 옷을 입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을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오로지 이데올로기만을 잣대로 삼는 것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프랑스 공산당에 동조했다고 해서, 하이데거가 한 때 나치에 협력했다고 해서, 그들이 민주주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부정한 반민주적 인사가 아니었고, 또한 그들의 철학적 업적을 폄하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이제 소모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은 더 이상 우리의 미래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반시대적 처사이다. 탈 이데올로기 시대인 만큼 더욱더 그렇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반공 이데올로기가 득세하는 한 그만큼 통일의 길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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