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미(범청학련 남측본부 후원회 `통일청춘` 회원)


어렸을 적 `가보고 싶은 나라`라는 질문사항에 항상 적었던, 이북에 간다는 사실에 밤새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다 출발해 공항에 도착하니 집결시간인 오전 7시보다 이른 6시25분이다. 같은 핏줄, 같은 언어를 쓰는 한민족인데 환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씁쓸해 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갑자기 비행기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딱 서울에서 제주만큼의 시간이 걸려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를 환영하는 북측의 선생님들과 여성동무들, `평양`이라는 두 글자, 김일성 주석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볼을 꼬집어보니 꿈은 아니다.

버스로 이동하면서 평양시내를 눈에 담고자 정신 없는 사이 어느덧 우리들이 4박 5일 동안 묵게 될 청년호텔에 다다랐다. 1978년에 김일성 주석이 조국의 주춧돌인 청년들을 위해 지어주었다고 하니 남북의 청년들이 만나기에 이보다 더한 곳이 있으랴.

"어린이들은 우리나라의 보배들입니다. 앞날의 조선은 우리 어린이들의 것입니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 건물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글에는 이들이 어린이를 얼마나 위하는가, 어린이 교육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알 수 있다.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서 아이를 품에 안는 모습을 형상화한 학생소년궁전에서는 하루 5000여명의 학생들이 학교수업이 끝난 후 바둑, 체조, 컴퓨터, 무용 등의 소조활동을 무료로 배우면서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나가는 학생들을 위한 궁전이었다.

북측 안내원 선생님들의 노래솜씨와 대화에서 풍겨져 나오는 풍부한 감성과 여유에 놀라곤 했는데 이런 자발적인 소조활동 때문이리라. 소년예술단의 공연이 끝나고 일어서는데 옆에서 관람하던 학생들 속에서 누군가가 "조국통일"을 외치자 너나 할 것 없이 조국통일을 외쳤고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함께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만경대의 백양나무

김일성 주석이 구한말 의병활동을 하셨던 할아버지와 항일운동을 하신 아버님의 영향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만경대 고향집은 (생각보다) 작고 소박했다. 그러나 존경심과 그리움의 눈물을 머금은 채로 설명을 하는 북측 안내원 선생님들과 북측 관계자분들의 경건함과 숭고함에 그곳을 방문한 우리들도 숙연해질 수밖에...

생가 뒤에는 하늘에 닿을 것 같은 백양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의 아버님이 세 아들이 태어날 때 이 나무들이 커 있을 때에는 조국이 해방되어 있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사실을 알고 일제가 두 그루의 나무를 잘라버렸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분에 한 개의 선물을 본다 해도 일년 반이 걸린다는 국제친선관람관

세계 5대박물관은 침략과 약탈로 모아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비해 이곳에는 오로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보낸 선물들로만 전시되어 있다고 하는 국제친선관람관.

그래서인지 설명해 주시던 안내원 선생님들은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수백 나라의 대통령에서부터 일반 시민들까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국보에 이르는 선물까지 수십만 점의 선물이 보관되어 있었고 김일성 주석 사후 지금까지도 선물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측에서도 꽤 많은 선물을 보내왔는데 보천보전투에서 승리한 김일성 주석의 기사를 보낸 것도 있었다. 아주 작은 선물이라도 보관하고 후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북동포들의 마음이 읽혀진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민족만이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다
                                      
남측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이북은 혁명유적만 중요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데 실상 가서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릉이나 고구려의 시조인 고주몽을 모신 동명왕릉, 일제의 침략으로 거의 폐허가 된 역사유적을 국가차원에서 발굴하여 복원해 놓고 보존하고 있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은 북측 동포들이 우리 민족의 역사를 얼마나 중요시하며 자긍심을 갖고 있나를 보여 주었다.

동명왕릉 옆에는 400년~600년 된 제주산 소나무들이 3000여 그루 있었는데 한국전쟁시기 미군의 폭격으로 반정도 소멸되었다고 한다.

활쏘기를 잘하고 무예를 숭상하였으며 중국과 대등하게 어깨를 겨루었던 고구려의 힘찬 기상은 북의 `선군사상`으로 이어진다고 하니 `자기 민족을 자기 힘으로 지켜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꿈에도 그리던 민족의 영산 백두산

끝이 보이지 않는 백두밀림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천지, 사진기로 백두산을 담으려 했던 어리석음에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한결같으리라.

이들이 백두산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무료야영각을 지어 소년들부터 대학생들까지 일주일정도 야영을 하면서 백두산의 정기와 혁명역사를 배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참을 달려서 그 다음에 도착한 곳은 항일유격대의 사령부기지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났다는 고향집, 그리고 대원실이 있는 밀영이었는데, 당시에 사용하던 물건들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작고 소박한 건물들이지만 우리나라 전도와 세계전도 아래 유격대를 지휘하던 김일성 주석과 유격대원들이 만들어준 장난감을 갖고 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모습, 학습으로 자신을 단련시킬 것과 사령부를 사수하자는 항일유격대원들의 삶을 그대로 복원해 놓았다.

눈에 띄는 것은 30년대에 국방위원장의 어머니께서 나무에 썼다는 `천대받고 홀대받는 조선여인들아 모두 일어나 항일전에 참가하자`라는 구호는 당시 여성들까지 당당하게 주체로 항일투쟁에 함께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항일유격대들의 활발한 활동과 삶을 엿볼 수 있는 곳은 삼지연이다. 무산지구진출을 앞두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대원들이 책을 읽고 사향가를 부르면서 조국사랑을 표현한 동상과 진격의 나팔을 부르면서 진군하는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동상, 조선민중들이 `김일성 장군`을 맞이하는 기쁨과 환호를 형상화한 동상은 실제 살아있는 사람을 보는 듯 하였다.

이런 혁명유적을 보존하면서 혁명을 겪지 않은 후대들에게 혁명역사를 전하는 당당한 북측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북이 세계 어느 나라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느낄 수 있었다.

청년이 만든 기적을 달려 세계의 기적 남포 서해갑문으로
 
청년영웅도로는 북측의 청년들이 오로지 마대자루와 정만 가지고 목숨을 내놓으면서 건설한 42,216km의 10차선 도로이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쉬는 날이면 영웅도로 건설현장으로 달려나갔다는 청년호텔 기념품점의 28살 접대원 선생님의 말과 표정이 아직 생생하다.

서해갑문은 대동강물에 소금기가 많아 농업용수, 공업용수로 쓸 수 없는데다가 큰물 피해를 막기 위해 지어졌는데 북측 동포들이 돌격대로 지원하여 5년이라는 짧은 기간만에 건설되어서 세계의 건축가들조차 놀랐다고 하였다.

굳게 잡은 손에 뜨거운 동포애와 조국사랑이 흐르고

나는 남북청년학생들의 상봉모임을 가장 기대하고 있던 터라 청년문화회관에 북측의 청년학생들의 손을 잡고 입장할 때의 그 감동을 어찌 설명할 수 있으랴. 이렇게 만나기 위해 피 흘리고 쓰러져간 선배들과 지금도 투쟁하고 있는 벗들이 먼저 생각났다.

나보다 먼저 이곳에서 이들을 만나야 하는 그들이 생각나면서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평양외국어대에 다니는 내 짝과의 한시간 반이 금새 지나가고 진옥이와 나는 꼭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눈물을 뒤로하며 헤어졌다.

그리움에 마음은 돌아올 줄 모르고.. 짧은 만남에도 심장에 남는 사람들!

우리에게도 유명한 <벗>의 백남룡 선생님의 따님 백리향 접대원, 화장실에 잠금장치가 없어 처음에는 당황했다는 나의 말에 더욱 놀라던 기념품가게 접대원 선생님, 이웃집 수다쟁이 아줌마 같은 책방 접대원 선생님의 구슬 굴러가는 듯한 웃음소리가 아직 귀에 생생하다.

누구보다도 답사마다에 상냥하게 설명해 주시던 사회과학원 로철수 선생님, `계속 전진, 계속 혁신`하는 천리마동상에는 말고삐가 없다면서 헤어질 때 눈에 밟힐 것 같다던 김일성사회주의 청년동맹 전창일 선생님, 평양 도착부터 떠나올 때까지 항상 웃음으로 실무를 담당하시던 범청학련 북측본부 최성준 선생님, `자칭` 북측의 `놀새`라며 <심장에 남는 사람>을 부르셨던 김철호 선생님, 헤어질 때 울면 다시 못본다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며 내 손을 꼭 붙잡아주시던 인민문화궁전 지도원 강경순 선생님, 아직도 생생한 묘향산에서 너나없이 "밀지 말라우. 밀지 말란 말이야", "나도 남조선에 나가 보자우"며 얼굴을 내밀던 모자까지 개구쟁이답게 옆으로 돌려쓴 예닐곱의 아이들...

분단이후 처음 대규모로 진행된 이번 북녘유적답사는 사상과 정견, 종교의 차이가 틀린 각 단체의 청년학생들이 북녘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북측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이었고 우리 민족이 하나임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그리움과 기억이 더해가지만 우리는 하나이기에, 우리가 같이 불렀던 노래처럼 통일된 조국에서 다시 만나기 위해 6.15공동선언을 실현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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