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우(독도본부 일꾼)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 한국표준시는 그때나 지금이나 일본 표준시에 맞추어져 있으니 시간은 같다 - 일본 관동지방을 7.9도의 강력한 지진이 강타하였다. 점심시간을 앞두고 불피워 밥지을 준비에 분주하던 식당, 집들이 모두 무너지고 갈라지면서 사방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 이 지진으로 죽은 사람 근 10만, 부서진 집이 47만 채이니 참으로 끔찍한 재난이었다. 지진속에서 나고 죽는 일본사람들도 이렇게 끔찍한 재난은 일찍이 격은 일이 없었던 엄청난 재앙이었다.

새로운 사조로서 사회주의가 등장하고 식량조차 모자라 항상 폭동을 걱정하던 일본경찰 수뇌부는 경악할 지진피해로 폭동이 일어날까 두려웠다. 이들은 먹고 살 일거리를 찾아 동경거리를 찾아온 조선인을 일본인들의 불만 해소 창구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방책으로 이른바 유언비어를 창작하여 퍼뜨리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지낸 내무대신 미즈노(水野鍊太郞)와 역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을 지낸 경찰청 총감 아까이께(赤池濃)는 협의하여 전국 경찰에 긴급전문을 내려보냈다.

"동경부근 조선인들이 지진재앙을 이용하여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지며 좋지 않은 목적을 이루려 하는 바 조선인 행동에 대하여 엄중한 취조가 있기 바람." 또 이런 전문지시도 내려보냈다. "조선인들의 습격우려가 있다. 조선인이면 죽여도 좋으며 사회주의자는 두들겨 패도 무방하다. 남자는 무장하고 여자는 피하라."

이런 전문 지시는 경찰망을 타고 순식간에 전국에 퍼졌다. 삽시간에 3천6백89개나 되는 자경단(自警團)이 만들어졌다. 자경단은 조선인이면 무조건 잡아죽이기 시작했다. 군부에서는 이런 포고문도 내걸었다. "이번 불순 조선인들의 행동 뒤에는 사회주의자와 소련 과격파가 있다." 경찰과 군부의 지시는 신문을 타고 전국에 순식간에 퍼졌다.

신문은 유언비어를 자세하게 실어 알렸다. "각처 우물에 독약을 넣고 이재민 자녀에게 주는 빵속에 독약을 뿌려서 준다고 하니 기가 막힌다." "어떤 마을은 조선인 무리의 습격으로 마을 전체가 거의 전멸되었다. 그들은 계획을 세워놓고 미리 시기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시내의 중요한 건물은 지금 와 생각하니 이전부터 화살표 위에 두 줄기 불빛 같은 표를 찍어둔 듯하다." "2천명이 팔을 끼고 다니며 부녀자 20-30명씩을 붙들어 놓고 강간한다."

유언비어는 끝이 없었고 신문은 신속하게 이 말을 옮겼다. 신문배달부들이 표시해 두었던 여러 부호는 전부 조선인들이 사전에 찍어둔 습격표시로 둔갑되었다. 꼬마들이 엄마 따라와 장난삼아 우물가에 분필로 한 낙서가 조선인들이 독약을 푼 표시로 선전되었다.  

모든 곳에서 조선인 색출이 시작되었다. 우선 일본어 발음조사부터 시작하였다. 발음이 약간 이상한 일본인은 조선인으로 분류되어 맞아 죽는 사태도 벌어졌다. 만삭의 조선여인은 일본인에게 붙잡혀 배를 갈렸다. 임산부는 혼절하여 쓰러지고 뱃속의 태아가 창자와 함께 쏟아지면서 울음을 뱉었다. 그러자 일본 자경단원이 시끄럽다고 어린아이를 발로 문질러 죽였다. 여자들은 잡히면, 대부분 옷을 벗긴 채 성기에 대나무 창이나 나무말뚝을 박아 죽였다. 남자들도 잡히면, 옷을 벗긴 채 성기를 자르고 팔다리를 자르고 목을 찢어 끊어 죽였다.

동경시내를 가로지르는 아라가와 냇물 양쪽에 큰 나무들이 서 있었는데 그 나무에 줄을 매어 사람을 묶어 그네처럼 밀어서 무서움에 졸도하여 숨지게 만들기도 했다. 심지어는 일본인 기업주가 사태를 우려하여 경찰서 유치장에 맡겨놓은 조선인 인부들을 자경단원 수백명이 들이닥쳐 때리고 찔러 죽이기도 했다. 이렇게 죽은 조선인이 줄잡아 7천명으로 추산된다. 아직도 정확한 숫자는 누구도 모른다. 한번도 진상을 바르게 캐려는 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경시내를 흐르는 아라가와는 죽은 조선인 시체로 뒤덮였다. 그 많은 시체는 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도 동경 먼 곳 땅속에 떼로 묻혔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사람들은 시체 썩는 냄새에 숨을 쉬기 어려워했다.

식민지 제나라에서 먹고 살수 없어 그 종주국에 가서 종노릇이라도 하면 굶어죽는 일은 피하지 않을까 해서 건너갔던 조선인들은 끔찍한 학살전의 주인공이 되어 영원히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사태가 가신후 일본인들이 벌인 공방전을 통하여 모든 유언비어는 그야말로 유언비어로 밝혀졌다. 굳이 따지자면 유언비어가 아니라 경찰과 군부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 퍼뜨린 지시가 그 원인이었다는 점이 밝혀졌다는 정도이다. 

올 9월1일은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 80주년이 된 해이다. 그러나 한국내에서는 이 처참한 학살극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이 지나갔다. 몇 언론에서 일본에서 평생을 관동학살 자료구하기에 보낸 강덕상 선생의 주문으로 기사를 쓴 정도이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자식을 삶아 죽이던 극악한 학살극이 엄청나게 빚어졌지만 무엇하나 시원한 내용이 밝혀지지 않은 채 세월 속에 묻혀 버렸다. 그런 학살극의 내용을 캐려는 어떤 체계적인 노력도 없었다. 힘없는 개인들이 인생을 받쳤을 뿐.

이제 이런 암살의 기억을 묻어버린 채 새로운 우호적 일.한관계를 소리높이 외치고 있다. 정부나 기업은 그렇다 치자. 문화단체는 물론이고 사회운동 단체도 언론에 한 줄 나기 위하여, 아니면 새로운 일.한우호를 위하여 일본인이나 일본단체와 공동행사를 벌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최근 일본국 총리대신 고이즈미는 2005년까지의 개헌을 공식 언급했다. 식민지배 최대의 피해자인 한국이 일본의 영토팽창, 과거정당화 노선에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으니 이제 장애물 없이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의 재무장 노선에 대해 어떤 신문은 아무런 걱정할 일이 아닌데 어떤 한국인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좌담기사까지 꾸며 내보내는 사태를 빚었다. 이런 오늘을 평가해 줄 미래는 있을 것인가. 미래가 있기는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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