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영(서울 대광고등학교 교사)


지난 8월 15일에 탑골 공원 앞에서 2시부터 있었던 전교조 서울지부 주최의 광복절 행사에 참석했다. 강사로 몇 분이 나와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 중 정신대 할머니께서 말씀해주시던 일이 가장 인상 깊고 가슴 아팠다.

군대에 가서 3년 복무하다가 제대해서 돌아와도 군대에서 보낸 내 젊은 시절 3년이 아깝고 서러운데 그 할머니는 꽃다운 나이 19살에 자기네 나라도 아닌 이민족 군대의 정신대에 끌려가서 25살이 되기까지 무려 6년의 치욕스런 삶을 사셨다니 어찌 이를 자기네 나라 군대에 3년 다녀온 것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할 말을 잊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 나이 19살에서 25살의 6년은 인생에서 가장 황금기가 아닌가? 그런 귀한 시절을 나도 군대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전쟁터는 가보지 않은지라 영화나 소설에서만 경험한 그 야만의 전쟁터에서 이민족인 일본군의 정신대, 더 적절히 표현해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보냈다는 것은 살아 남았다는 사실 하나 외에는 죽은 자보다 더 못할 수도 있는 극단적인 치욕이 아닐까?

그런데도 나라를 되찾은 마당에서조차 그 치욕을 위로나 보상을 받기는커녕 스스로 주위의 눈을 피해가며 도리어 죄인처럼 그런 사실을 숨긴 채 살아 왔다고 하니 이게 도대체 뭐하는 나라냐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17-8세기에 룻소나 로크에 의해 나온 사회 계약설이나 기타 국가에 대한 이론을 굳이 인용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자기 국민의 억울함만은 어루만져주고 풀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친일파 처단이 너무나 거창한 일이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할지라도 개도 낯짝이 있다고, 어떻게 하나 둘도 아닌 일본군 성노예로 전쟁터에서 치욕의 날을 보내고 겨우 생환한 이 나라의 불쌍한 그 분들을 위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는 일 없이 이렇게 오늘날까지 정부가 나 몰라라 외면한 채 살아올 수가 있는 것일까? 그러고도 어떻게 각계 각층의 지도자들은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었는가?

이런 데 눈을 뜬 이 땅의 여러 사회단체들의 활동과 권면(勸勉)에 의해 정신대 할머니들이 움츠러들며 살던 음지에서 나와 일본 대사관 앞에서 오늘까지 매일 시위를 하며 일본이 이에 대해 사죄하고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하고 계시다는데 그 때마다 일본측의 말이 `1965년 한일 회담 때 김종필과 그 문제를 다 끝냈다. 그러니 우리에게 말하지 말고 김종필을 찾아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께서 김종필을 찾아간 적이 있는데 그 때마다 김종필은 저 귀찮은 늙은이가 또 나타났다고 얼굴 찡그리며 도망가더라고 하셨다.

4.19혁명을 배반한 빅정희와 김종필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후에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생각 끝에 이를 일본과 국교 정상화를 통해 풀기로 했다. 즉 한국은 일본이 원하는 대로 일본에 대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해주되 일본은 그에 대한 대가로 3억 달러를 주기로 한 것이 그것이다. 그때 거의 구걸하다시피 받은 이 3억 달러로 한국은 국제법상 일본에 대한 모든 청구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유치한 짓거리를 했다.

그 결과가 1991년도부터 매일 정신대 할머니들이 노구를 끌고 대사관 앞에서 십년도 넘게 시위를 해도 저들은 콧방귀조차 꾸지 않고 있는 이런 사실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국가나 그 사회나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려면 그들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은 자기네 국민이요. 정신적 육체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고개조차 들고 살 수 없게된 사회적 약자 정신대 할머니들을 철저히 외면했다. 이를 보면 한국이라는 국가가 자신의 국민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있는지를 한 눈에 알고도 남음이 있다.

대한민국은 공화국이라고 했다. 공화국은 국가의 주권자가 국민 모두라는데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국가라 함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임에도 대한민국에서 실제로 모든 사람을 국가의 주인으로 대우해주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이 정말 말 그대로 공화국이라면 우선 정신대 할머니들이 저렇게 국가의 보호를 받을 길 없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벌써 12년이 넘도록 외로운 시위를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공화국은 말 뿐 실제 이 나라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특별한 계층만이 공화국 국민이었지 모든 사람이 그 대상은 아니었다.

공화국의 국민이라면 모든 국민이 평등을 누려야함에도 모든 국민이 평등하지도 않았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내게 피 토하듯이 논리도 품위도 없지만 분명히 자신의 억울함을 절규하듯 말씀해주고 계시는 하얀 모시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저고리를 입으신 저 할머니가 아닌가? 진정 이 나라가 공화국이었다면 그래서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라면 나라를 되찾은 것이 언제라고 아직도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자신의 청춘과 인생을 앗아간 일본에게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그 억울함을 아직도  호소할 수가 있겠는가?

정신대 할머니는 오늘도 우리에게 우리가 공화국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자주 독립국가로서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일깨워주고 계신다.

오늘 이 시대가 과거 일제의 식민지배 시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는 일본 대신에 미국이 우리나라에게 감놔라 팥놔라 하고 있다는 것뿐이고 우리가 그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한 채 따라야만 한다는 사실은 예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제는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를 지배하는 방식이 옛날처럼 순진하지 않아 얼핏 봐서는 구분이 잘 안 되고 있을 뿐이다. 

오늘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미국은 겉으로 말하듯이 진정 우리나라의 통일과 독립을 원하는 나라인가? 이러한 내 질문이 스스로 생각해봐도 우습다.

미국은 약 100년 전인 1905년에 카스라-태프트 밀약으로 분명히 우리를 배반한 적이 있는 나라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다. 우연인지 아니면 필연인지 미국은 일본이 군사 대국으로 나가는 것을 돕고 있으며 동북아에서 미국이 행사하던 권리를 일본에게 넘기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국제 상황이 이러함에도 언제까지 우리는 진보와 보수 반동으로 나뉘어서 국론을 통일치 못한 채 바보짓을 할 것이며 민족의 문제를 민족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남의 나라에 의지하려는가?

언제까지 배불리 먹고만 살면 노예로서 지내도 그만이라는 자세로 굴욕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는가?

지금 내 앞에서 절규하고 계시는 정신대 할머니는 너희들도 내 꼴이 되지 않으려면 정신차리라고 호소하고 계시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다가 어찌 하려는가?

지금 광복 58주년은 정신대 할머니의 절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런 화두를 분명하게 던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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