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작년 6월 15일 남북의 두 정상이 공동선언으로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고 발표했을 때, 미국의 조야는 깜짝 놀라 이제 주한미군철수를 검토해야 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물론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견해가 우세하였다. 그러나 보수의 선봉인 제시 헬므즈 상원 외교위원장은 "만약 그것이 참말이라면(if it`s for real) 우리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는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

북한은 남한에게 외세의존 및 한미일공조 포기를 주장

6.15선언 이후 7개월 동안, 남북간에는 장관급회담, 국방장관회담, 실무자회담, 적십자회담 등이 연달아 열려 투자보장, 이중과세방지, 상사분쟁해결, 청산계정설정 등 경제협력의 핵심문제에 관한 합의를 보는가 하면, 경의선과 병행도로 연결공사에 관련된 군사협력문제에도 합의했다. 또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과 이산가족 상봉 등도 소규모로나마 이루어졌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식량 비료 등의 원조도 제공되었으며 전력문제에 관한 협력도 협의중에 있다. 그러나 미국의 조야를 놀라게 했던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이란 말이 참말이라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뚜렷이 입증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의 신년 공동사설은 6.15선언의 계속 이행을 다짐하며 경제.문화교류의 활성화를 표방함과 아울러 "외세의존 및 공조포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1월 10일 발표한 "7천만 겨레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북한은 통일문제의 자주적 해결과 민족의 존엄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받들 것을 역설한 다음, "외세와의 공조를 배격하고 민족공조로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 자체의 힘에 의거하여 해결해 나가자"고 제의해 왔다. 이것은 정상회담을 마치고 평양에서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이 6.15선언 제1항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계속주둔과 한.미.일 3국 공조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계속 주장한데 대하여 대체로 침묵을 지켜오던 북한이 새해 들어서는 마침내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해야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같은 1월 11일 연두기자회견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긴장완화를 강조하면서 이를 위한 구체적 조치로서는 남북국방장관 회담을 통해 군사직통전화 등을 설치하고 북의 김 위원장의 서울방문을 추진한다고 했을 뿐, 남북문제의 자주적 해결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북관계의 성공을 위해서 한미관계에 추호의 차질도 없이 긴밀하게 부시 행정부와 충분히 대화해 공동대응해 나갈 것"이라며 기존의 한.미.일 3국공조의 틀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임을 강조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물론 남한에는 자주통일원칙을 당장 적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있다. 대북화해정책에 대한 국민의 일반적 지지는 있다. 하지만 반북 일변도로 치닫던 군사독재의 잔재들이 아직도 국회의 제1세력으로 버티고 있다. 또 지역감정이 여전히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군은 아직도 북을 주적으로 못박고 있는가 하면 야당의원이 여당을 북한 노동당의 제2중대라고 매도하고 있다. 청와대 오찬에 초대받은 퇴역장성 200여명은 대통령을 맞대놓고 보안법개정 반대를 주장했다 한다. 그리고 미군이 나가면 안된다는 사람들이 아직도 더 많다고 여론조사는 밝히고 있다. 북한은 아직도 우리의 적이요 미국이 우리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문제만큼은 미.일과 상의할 것이 아니라 남북간에 협의해서 해결해야

남한이 미국의 은혜를 입고 일본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뚜렷한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북한에게 큰 해악을 끼친 나라들이라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즉 미.일 두 나라들과 대북정책의 공조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문제를 남북이 자주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도무지 성립될 수 없는 이론이다. 다른 어떤 문제들은 몰라도 남북간의 문제, 특히 통일문제만큼은 미.일과 상의할 것이 아니라 남북간에 협의해서 해결해야 할 것이며 그것이 바로 6.15선언의 제1항이 천명한 자주통일의 대원칙이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생명은 자주통일의 원칙을 밝힌 그 제1항에 있다. 김 대통령이 남북교류협력과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를 강조하면서도 한미군사동맹과 한.미.일 3국 공조체제의 유지를 고집한다는 것은 6.15 공동선언의 껍데기만 취하고 그 핵심은 버리는 것과 같다. 핵심이 빠진 껍데기만의 교류협력에 북한이 응하고 있는 것은 우선 당장의 필요에 따른 것으로 그런 관계는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을 때 북한은 6.15선언을 아낌없이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6.15 선언의 파산은 그 선언으로 인해 김 대통령이 얻은 모든 영광을 한 순간에 오욕의 나락으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임기 2년 밖에 남지 않은 김 대통령의 정치적 용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워싱턴에서는 이제 공화당의 새 정권이 들어섰다. 부시 대통령 자신은 대외문제에 문외한이라 한다. 그러나 그 주변에서 외교.군사문제를 다룰 인사들은 대부분 지난날 냉전시 대소 강경정책을 다루던 인물들이며, 그들은 한결같이 클린턴의 한반도정책을 비난해 왔다. 따라서 민주당정부 말기에 타결 직전까지 가는 듯 했던 북.미관계가 공화당의 새 정권하에서 언제,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진전될 것인지, 또 워싱턴의 전반적인 대한반도정책은 어떤 기조에 따라 입안 추진될 것인지, 남과 북에서는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러나 6.15선언으로 자주통일의 대원칙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미국 새 정부의 대한반도정책의 윤곽을 알아야만 남북관계의 장래를 설계할 수 있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남한이 한.미.일 공조체제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과의 공조관계를 이룩하고 자주통일의 대원칙을 밀고 나간다면, 남북이 각각 미국 새 정부의 대한반도정책의 향방을 읽으려고 그토록 부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이 통일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는 말이 "참말"임을 깨달은 미국쪽에서 오히려 남북관계의 새로운 진전에 맞도록 그들의 대한반도 정책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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