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란(서울 석관중학교 교사)


중간 고사 끝나고 아이들과 `통일`에 대해 자유 토론을 한 적이 있었다. 남북한의 언어가 달라 통일이 힘들지 않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자 한 아이가 흥분하며 일어섰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몇 백 만원씩 들여 어학 연수까지 가는데 그까짓 북한말 배우는 게 뭐가 어렵습니까? 영어보다 북한말 배우는 게 훨씬 쉽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영어는 완전히 다른 나라 말이지만 북한말은 뿌리가 같은 우리 나라 말입니다. 남한말과 다른 점보다는 비슷하거나 같은 점이 더 많을 겁니다."

오메, 기특한 녀석! 내가 할 말을 지가 다 하고 있네.

또 한 친구가 사상의 차이 때문에 통일이 어렵다고 했다. 그러자 다른 친구가 일어나 말한다.

"그럼 지금 우리 나라 사람들은 다 같은 사상을 갖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텔레비전 토론을 봐도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 다르고, 우리 반에도 저와 생각이 다른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함께 지내는 데 별 문제없습니다. 꼭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생각, 같은 사상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사상이 같으면 좋겠지만 사상 차이가 통일을 반대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아이들을 보며 떠오르는 부끄러운 과거가 있다.

중학교 다닐 때 일이다.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탄 것이다. 이른바 `반공 글짓기 대회`였다. 상품으로 받은 책은 순수한 사랑을 간첩 활동에 악용한 어떤 공산주의자를 비판하고 있었다. 어렴풋이 글짓기 내용도 생각난다. 똑똑한 사람 치고 20대에 공산주의자 아닌 사람 없고 30대에 계속 공산주의자인 사람 없다, 북한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하고 있는 대학생들은 빨리 정신차려야 하고, 온 국민이 일치 단결, 멸공 통일하여 나라를 발전시켜야 한다, 뭐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남달리(?) 애국심이 강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자주 꾸었던 꿈이 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고 위급한 상황에서 인민군을 죽이고 나도 죽는 꿈이다. `문학 소녀`를 꿈꾸며 `순수`나 `아름다움`이란 단어만 들어도 가슴 설레던 그 시절에, 찐 옥수수와 읽을 순정 만화 몇 권 있으면 마냥 행복하던 사춘기 시절에 어이없게도 나는 `사람` 하나 죽이고 내가 죽으면 국가적으로 손해날 것 없다는 참 황당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모든 게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러웠던 시절에 다시 꿈을 꾸었다.

또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이제 논개처럼 끌어안고 죽어야 할 적장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숱하게 죽였던 그 인민군이 이제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우리가 끌어안아야 할 반쪽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과 아`가 구별 안 되는 전쟁... 12년 동안 받은 철저한 반공 교육으로 갖게 된 절름발이 정신 세계의 후유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반공 교육 12년보다 더 긴 13년 교직 경력의 교사가 되었다. 어느 날 나를 흥분시킨 메일 하나가 왔다. 교사 평양 방문단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대학 시절 학생회장 후보가 내건 구호가 생각났다. 처음 이 구호가 나온 날 대학가 술집에서 또는 카페에서 북의 청년들과 인생에 대해 그리고 민족의 운명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 나누는 모습을 상상하며 얼마나 설레었던가. 그런데 그 꿈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가슴 벅찬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북한 가기엔 내가 너무 부족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더 훌륭한 사람들이 가야 통일 운동에 보탬이 되지, 혹시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 준비해서 가자, 는 핑계를 대며 신청을 포기했다.

도대체 무슨 준비가 필요했을까. 신청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꿈속에서 죽였던 그 인민군이라도 만날까 두려웠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90년에 교사가 되었다. 80년대 대학생의 눈으로 본 90년대 현실은 혼란스러웠다. 당혹스러운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다. 소련이 붕괴되고, 김대중이 대통령 되고, 엉뚱한 사람들이 북한 다녀오고...  

급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나를 유혹한 것이 `우리 반, 우리 가족`이라는 울타리였다. 꽤나 안정된 울타리였고 그 속에서 주고받는 작은 사랑에 만족하며 10년을 살았다. 혼란스럽기만 한 밖의 세계는 외면하면서.  

하지만 마냥 그렇게 외면하며 살 수는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잠에 취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어느 순간 벌떡 일어나 세수하는 자신을 보고 감동 받듯, 나는 그렇게 지금 자신에게 감동 받을 뿐이다. 외면했던 밖의 세계에 다시 관심을 갖고 정직하게 살자고 마음  먹었더니 `통일`이 내 앞에 서 있다.

하여, 북한 동포와 함께 살기 위해 기꺼이 북한말을 배우겠다는 아이들 앞에 제대로 서기 위해, 또 남북 통일로 강대국 되어 미국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는 아이들 야심을 이루기 위해, 여섯 살 딸아이가 커서 만나는 세상이 지금과는 다르게 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내년에는 꼭 방북 신청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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