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제나 국제관계에 있어 언어 구사와 용어 사용은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특히 공동보도문이나 합의문처럼 공식문서일 경우 양측은 용어 하나하나에 세심한 신경을 쓴다. 공식문서 작성과정에서 용어 표현을 놓고 다투기도 하고 심지어 용어 하나로 회담이 결렬되기도 한다. 따라서 보통 외교문서에는 애매하거나 다의적인 용어를 쓰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면 자기 입맛에 맞게끔 해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 그런데 남북관계에서는 왕왕 이런 규칙(?)이 엇나간다. 남과 북은 국제관계가 아닌 민족관계이기 때문이다. 즉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나와 있듯이 남과 북은 `나라와 나라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인 것이다. 이번 제11차 남북장관급회담 공동보도문에서도 이러한 `특수관계`에 걸맞는 용어가 나왔다. `핵 문제를 적절한 대화의 방법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에서의 `적절한`이 그것이다.

◆ 이에 앞서 남북은 2000년 6.15공동선언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서울 방문 초청과 관련 `적절한 시기`에 하기로 했다. 당시 `적절한 시기`라는 용어를 둘러싸고 해석이 구구했다. `적절한 시기`는 `방문 여건과 분위기 조성`으로 해석됨과 동시에 역으로 `적절한 시기가 안되면` 서울방문을 못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사족이지만 이 해석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서울 방문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직 남측에서 그를 맞이할 분위기와 여건 조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번 남북장관급회담은 이른바 `북핵문제`의 해결방법을 놓고 북미간에 `양자회담`과 `다자회담`으로 첨예하고 맞서고 있는 가운데 열렸다. 지금 남측은 미국측의 `다자회담`을 좇고 있다. 따라서 `적절한 대화의 방법`이란 `양자회담` 아니면 `다자회담`, 둘중의 하나다. 이에 대해 남측 정부당국은 "북한의 다자회담 참여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본다"면서 "북측이 양자회담으로 오해할 소지는 없다"고 해석했다.

◆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역으로 북측 역시 `다자회담`이 아닌 `양자회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건 어떤 사안을 놓고 자기에게 유리하게끔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또 그것을 교조화하는 것을 경계하는 일이다. 남과 북의 관계는 서로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국제관계가 아니라 공생해야 할 민족관계인 것이다. 따라서 남북관계에서 자주 등장하는 `적절한`의 진정한 의미란 상대편을 위해 `적절한` 배려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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