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용마중학교 교사)


2003년 5월 26일 오후 6시, 퇴근길 전철역 앞 사거리에서 낯선, 아니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익숙했던 플랭카드를 하나 발견했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
마치 대학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사망한 열사를 애도하는 플랭카드인 양 당당히 걸려 있었건만, 왠지 그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좌경세력 척결하여 사회안정 이룩하자!"

그날은 2003년 5월 26일이었다. 근래 간첩단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왜 좌경세력 운운하는 플랭카드가 나붙었을까? 그 플랭카드를 내다 건 사람들에게는 지금이 "좌경세력이 활개를 치는 불안정한 사회"로 보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 좌경세력은 도대체 누구를 의미했을까?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돌아섰다.

누가 그들을 불안하게 했을까? 이후, 줄곧 이 생각이 머릿속에 머물렀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린 나의 판단은 요즘 우리 사회의 갈등이 이전과 달리 좀더 많이(?) 표출되고 있는데, 그러한 갈등의 당사자들 중의 일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물차 노동자들이 경유세를 인하하고, 운송료를 인상해 줄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 불법단체가 아닌 합법단체로 새롭게 거듭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던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미국 방문 이후 대통령의 언행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하려다 경찰과 마찰이 있었다. 교육부에서 마련한 NEIS라는 교육행정 정보시스템에 대해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9개월여 동안 문제제기를 지속적으로 하여 교육부의 정책이 전면 재검토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10여년 이상 정부가 추진해온 새만금 간척 사업을 중단시키기 위해 종교계 지도자들이 전북 부안에서 서울까지 60여 일의 긴 시간동안 삼보일배(三步一拜)의 고행을 하였다.

최근 우리가 자주 접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 사례들이다. 이러한 갈등을 우리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게 된다. 사회적 갈등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를 보면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갈등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주어도 좋겠다. 그러나, 우리의 언론은 갈등을 증폭시키는데 일가견이 있다. 국민들은 그 와중에 불안감에 휩싸인다. 

언론이 자주 사용하는 "물류대란", "입시대란"이라는 말속에는 "난(亂)"이라는 글자가 공통적으로 있다. 난리, 난동 할 때의 그 `난`자이다. 이러한 말잔치 속에서 국민들은 갈등의 본질을 이해하기보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갖게 되거나, 불안을 일으킨 주모자(?)들을 증오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한다.

화물차 노동자들이 우리 경제에 악영향을 끼쳐서라도 파업을 결심했다면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인지?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그걸 참지 못하고 자신들의 합법화에 찬물을 끼얹는 행동을 한 한총련 소속 학생들은 어떤 사정에서 그러한 행동을 했는지?

수업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가 연가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한 전교조 소속 교사들은 과연 어떤 이유에서, 어떤 마음에서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인지?

갯벌을 살리겠다고 하루종일 걸으며 2000번 이상이나 엎드려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님, 그리고 고행자들은 왜 그러한 행동을 하는지?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안타깝다.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 갈등은 국민들을 그냥 관람객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다시 새로운 갈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한다. 결국, "좌경세력", "빨갱이"까지 등장하게 된다.

해방 이후 50여년 동안 우리 사회가 일천하게 발전해 온 과정에 갈등의 본질을 왜곡하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지만, 또 잊어버린다.

정말 갈등은 사회불안을 조성하고 갈등을 일으킨 사람들의 배후에는 어떤 불순한 음모가 스며들어 있는 것일까? 우리가 갈등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 것은 갈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조건 반사적인` 어떤 분위기 때문은 아닐까?

프랑스식 민주주의를, 민주주의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들 부러워한다. 그러나 우리가 부러워하는 그 민주주의가 갈등 없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그들의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는 갈등이 없을까?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여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없었더라면 그것은 불가능했다. 우리는 프랑스의 과거 18세기로 돌아가 그 상황에서도 `갈등은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니까 없어져야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갈등이 없는 사회! 지극히 이상적이고 우리가 바라는 사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조금만 삐딱하게 들여다보면 갈등 없는 사회는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인간의 다양성을 말한다. 인간의 다양성은 곧 갈등이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는 곳에 언제나 생각의 차이에 의해 크고 작은 갈등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지 않는가?

문제는 언제, 어디서나 생성될 가능성이 있는 갈등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갈등을 삶의 한 과정으로서 인식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으로서 받아들인다면 우리 사회는 한층 성숙될 것이다. 갈등의 당사자들도 침착하게 그 문제를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갈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는 쉽게 정착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가 받아들인 민주주의가 우리사회에서 자생한 것이 아니라 입양해온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최근 발생하고 있는 사회적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 국민들의 민주적 의식도 한층 더 성숙될 것이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10년 전에 비해 `좌경세력` 얘기가 덜 나오고 있는 것도 나름대로 긍정적이라 할 수 있을테다. 그러나, 좀더 욕심을 부린다면 이러한 사회적 성숙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무척이나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언론인들의 자아성찰을 간곡히 요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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