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반인가, 안방극장 TV에서 <도망자>라는 미국 영화 연속극이 방영됐었다. 아내 살해의 누명을 쓴 `도망자` 리처드 킴블은 독사같은 제럴드 형사의 끊임없는 추적을 받는다. 그래도 그 `도망자`에겐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 진짜 범인 외팔이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 한국사회의 `도망자` 정치수배자에게는 탈출구가 없다. 스스로 무고함을 입증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부모들이 나섰다.

◆ 지난 6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 가족들과 수배자들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한지 나흘째를 맞이하고 있다. 특히 어버이날인 어제 단식농성장인 연세대 정문 앞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부모님들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담아 한총련 수배자들이 어버이날 행사를 가진 것이다. 삭발한 어머니의 모습도 보였다. 174개의 카네이션이 준비됐지만 `도망자`들은 올 수 없었다. 장내는 숙연했고 눈물바다를 이뤘다.

◆ 기록에 의하면,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된 지난 1997년 이래 6년 동안 한 해에 400여명씩 정치수배자들이 양산되었고 현재에도 174명의 한총련 관련 정치수배자들이 있다. 이들은 학교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면서 주로 각 대학 학생회관 등에서 숙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들은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지 못하거나 수배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등 여러 증상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 3월 2차례에 걸친 `한총련 정치수배자 공개건강검진` 결과, 한 사람당 평균 1.7개의 질병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 `정치수배` 문제가 이렇게 비화된 데는 정부당국의 책임이 크다. 노무현 대통령은 수배 해제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으나, 관련부처는 지난달 양심수 특별사면.복권과 관계없이 수배 학생들을 계속해서 연행하고 있다. 해제할 듯하면서 계속 잡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지난 7일 민변 주최로 열린 `한총련 문제해결을 위한 공개 간담회`에 한총련 담당 부장검사가 참석해 `일괄 수배 해제와 일괄 불기소 처리는 법적 절차상 곤란하다`고 밝혀 수배자 가족들을 애태우게 한 바 있다.

◆ 자식들이 수배생활을 하고 있으면 부모들은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자식들은 도망자이고 부모들은 삭발을 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광경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정도(程度)를 말해준다. 바른 결단은 빨리 내릴수록 바람직하다. 새 정부에 거는 기대가 아직 크다. 국민들이 새 정부가 역대 정부에 비해 달라지길 바라는 게 있다면 바로 이같은 부모와 자식간의 생이별을 허용치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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