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역사와 문명은 사람의 생활을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다. 자연은 생활의 환경이고, 역사는 생활의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이다. 강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통일체이다. 모든 수도는 강과 함께 발전한다.

한강의 자연이 주는 의미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중에서 두 번째로 큰 강이 한강이다. 나일강이 가장 크고 한강이 그 다음이다. 강으로서는 너무 크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한강은 문명적으로 호수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한강 양쪽에 철책선이 쳐져 있고 이것은 한강이 비무장지대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사회과부도에도 군사분계선이 한강을 가로질러 백령도까지 그어진 것을 봤다.

비무장지대가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러나 다시 한번 놀래야 했다. 한강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란 사실이다. 한강을 말할 때 이 사실을 기본 전제로 염두에 두어야한다. 한강이 문명사적으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강을 너무 모른 채 살아왔다. 한강을 제대로 아는 것만으로도 통일에 기여한다. 

한강의 자연이 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한강은 한강하구부터 용산까지 감조구간感潮區間에 든다. 감조구간이란 밀물 때 조수가 하천으로 역류해 들어오는 지점까지의 구간을 일컫는다. 하루에 두 번씩 물의 흐름이 바뀐다. 이를 기수역이라고도 한다. 민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는 기수역은 민물과 바닷물이 대립하여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점령하지 않고 서로 변이되어 제3의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낸다.

자연에서의 변증법칙이 여지없이 적용되는 것이다. 때문에 기수역에 사는 생물체는 다양하고 풍부하다. 잉어·붕어·숭어·웅어·뱅어·은어·누치·게·쏘가리·뱀장어·바가사리·모래무지·피라미·메기 등이 살았으며, 조개류로 우렁이·다슬기·달팽이·말조개·칼조개·펄조개·재첩 등이 있었다. 겨울철에 고깃배가 한강에 와서 정박하면 청어는 즉시 온 시내에 두루 퍼지며 생선장수들은 거리를 따라 청어 사라고 소리쳤다 한다.

한강의 역사가 주는 의미

한강의 역사가 주는 의미는 어떤가?

한강하구는 원래 수심이 깊기도 하지만 하루에 두 번씩 수면의 유로방향이 상류쪽으로 바뀔 때면, 규모가 크고 배 밑바닥이 깊은 바닷배라도 항행할 수 있었다. 감조구간은 바닷배가 운행할 수 있는 상한점이었던 셈이다. 한성이 감조구간 내에 위치함으로써 조선은 삼남지방 및 황해 평안도 일대의 세미를 포함한 어염 곡물 임산물 등, 수운할 수밖에 없는 막대한 물량을 강배로 옮겨 실을 때 발생하는 추가 물류비용 없이 수도까지 직접 수송할 수 있었다.

겸재의 한성경승첩에는 동작진에 쌍돛배가 정박해 있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시대까지 외돛배는 강을 중심으로 한 수로용이라면 쌍돛배는 바다연안용이었다. 때문에 강에서 바다로 나아갈 때는 외돛배에서 쌍돛배로 짐을 옮겨 실어야 한다. 동작진에까지 쌍돛배가 올라와 정박해 있었던 것은 한강이 강과 바다를 구분할 필요가 없는 강이었음을 말해준다.  한강은 강으로서의 성격과 바다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근대이전까지 한강은 교통로로서의 기능을 했다.

고구려가 백제 수도를 함락시킨 후, 금강권으로 도주하는 백제를 쫓아 남진하지 않고 돌연히 남동쪽의 신라를 향한 것, 당시 백제가 애초의 여주 대신 공주로 천도한 것, 임란 당시 일본군이 죽령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승리하자 일사천리로 한성까지 진군한 것 등의 역사적 사실은 한강의 교통로적 기능을 잘 반영해 준다.

한강 수로를 이용한 교통은 17세기 후반에 증가하였다. 숙종 원년(1675)에 강화부(江華府)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서울에 오다가 마필을 잃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에서는 반드시 수로를 이용하도록 하였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천수운(內陸水運 河運 江運)의 존립기간은 고려시대 조운제부터 따져보아도 천년을 넘는다. 그러나 조운과 조선후기 상업발달에 의한 수운은 그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수운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 왔다. 강화도 시선뱃노래는 바로 이런 배경을 대표하는 문화였다. 시선배는 옛날에 강화도에서 한강을 거슬러 충청북도, 강원도까지 가서 서울사람들이 쓰는 오곡이나 땔감을 실어오는 배로 대개 강화도 사람들이 시선배를 탔다. 남한강의 끝 목계에서 쌀, 콩, 좁쌀 같은 것을 사서 시선배에 싣고 서울에 와서 팔고 인천까지 내려가 새우젓이나 해물을 사서 다시 돌아갔다.

한강에는 수참제도가 있어서 배의 안전을 위해 안내와 경호를 맡았으며 관할구역 내의 강물에 토사가 쌓임으로서 수심이 얕아져 수로가 막히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한강 하류는 우수참, 한강 상류는 좌수참이 담당하여 한강을 관리하였다. 지금도 김포에는 동수참마을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역사가 흐르는 동안 한강은 국가의 역사에서 관의 역사로 관의 역사에서 민의 역사로 서로 교섭하며 전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강의 문명이 주는 의미

한강의 문명이 주는 의미는 어떤가?

아담 스미스의 이론에 따르면 봉건제하에서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자본주의 출현의 맹아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소유관계가 바뀌지 않으면 자본주의로 전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봉건적 상업과 도시의 발달은 봉건세계를 거대하게 통합했지만, 자본주의의 도래를 가져올 만큼 소유관계를 바꾸는 데로 나가진 못했다. 이것은 조선조 한강문명사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상품유통경제의 발달에 따라 늦어도 18세기 후반에 정기시장은 전국적인 분포망을 갖추게 되었는데, 당시 한강 유역에는 100여 基 이상의 장시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를 전후하여 나타난 문명적 변화는 경화사족의 등장이다. 경화사족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로, 그전까지는 재야의 향림사족들이 주자학을 중심으로 사상계를 이끌어 갔으나 한강의 발달은 경화사족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된다.

다산은 유배지로부터 생생한 민중의 삶을 접촉하며 사상의 혁신을 이루었지만 가족들이 강진으로 이사할 것을 청하자 반대하며 `사대부는 서울의 정세에서 멀어져 있으면 안되며 불가피하면 근처에서라도 살아야한다`고 했다. 중심은 서울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노론으로부터 개화파까지 사대부세력은 한강의 상업문화에 빚을 지고 있었던 셈이다.

18세기 경 한성의 인구는 거의 20만에 육박하는, 당시로도 세계적인 대도회에 속했다. 서울은 국내 뿐 아니라 외국 문물의 수입 또한 가장 왕성하고 빨랐다. 때문에 조선후기 상업 발달로 인한 지역간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한성의 문화적 중심성은 더욱 공고해졌다. 한강 유역은 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북부지방과 남부지방의 문화적 점이지대이기도 하였다.

즉 한강 유역은 하나의 등질지역의 성격을 띠는 동시에 전국적인 차원에서 보면 남부 및 북부지방의 문화속성이 확산, 혼재되어 있는 지역이다. 예를 들어 남부지방의 세습무와 북부지방의 강신무가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섞여 있는 등의 민속문화권, 남부지방의 간이 센 음식과 북부지방의 싱거운 음식이 섞인 음식문화권, 폐쇄형과 개방형의 중간 형태인 가옥권, 남부지방의 답작중심과 북부지방의 전작중심의 중간형태인 농업권 등 점이지대적 성격을 띠고 있다.

결국 한강은 봉건적 보편성의 문명은 창조했으나 새로운 질의 문명을 만들어내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은 소유관계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갑오농민전쟁처럼 다시 지방으로부터 기대해 볼 일이었다. 한강은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이질적인 요소가 긴장, 대립하면서도 새롭게 통일 발전함으로서 민족성의 중요한 핵을 창조해 온 동맥이었다.

한강하구수역은 비무장지대도 중립지대도 아니다

한강하구수역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다.

신문이나 국방부자료에서 휴전선은 155마일 625리이고 동쪽의 명호리부터 서해의 말도까지로 표시했다. 그러다가 강화도의 제적봉 OP를 방문해보니 거기에는 `중립지대`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었다. 중립지대는 비무장지대와 어떻게 다른가하고 묻자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것 아니겠냐고 대답했다.

나는 당연히 한강하구도 비무장지대라고 생각을 했다. 휴전선이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서울의 목전에 있다는 사실은 내게 충격이었다. 나는 무슨 황금송아지라도 본 양 이 사실을 말하고 다녔다. 분단은 서울의 문제라고.... 그러자 사람들은 `그게 정말이냐` 하며 나처럼 놀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불안감을 한번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국회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눈이 충열되며 찾아낸 한강 철책선의 정체는 분단에 사고마저 지배당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한강하구수역은 비무장지대가 아니다. 중립지대도 아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의 지리모형에는 전망대 앞 두물머리 한 가운데로 선이 지나가고 그 선 위에는 `군사분계선`이라는 설명판이 세워져있다. 그러나 밖으로 나오면 `없어져야할 군사분계선`이란 제목의 게시판에 군사분계선은 고성부터 장단까지 155마일이라고 적혀 있다. 강에는 군사분계선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것이 맞는 걸까? 후자가 맞다.

정전협정상의 군사분계선은 육지에만 존재한다. 지리모형에는 또 임진강과 합수되어 흘러가는 한강하구지역에 `중립지대`라는 설명판이 세워져있다. 그러나 정전협정상에는 이 강줄기에 애초부터 군사적 의미의 어떤 `선`이나 `지대`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방부나 통일부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날조한 것이다. 

한국전쟁중 정전협정에서 장단면 정동리의 임진강 하안에서부터 한강하구는 어떻게 해야할지 아무런 결정도 나지 않았다. 3달째 접어들던 10월3일. 한강하구에 관한 부속합의서가 체결된다. 여기서 `한강하구`라는 명칭이 공식화되었다. 한강하구는 남북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지만 군사분계선도 비무장지대도 없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나서 두 달 뒤 10월3일 군사정전위 제22차 회의에서  비준되었다는 한국정전협정에 따라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채택된 후속문서 [한강하구에서의 민용 선박 항행에 관한 규칙 및 관계사항] 여섯 번째에는 이렇게 쓰고있다.

민간에서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사용하여 온 한강하구수역내에 성문화되지 않은 항행 규칙과 습관은 정전협정의 각항 규정과 본 규칙에 저촉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쌍방 선박이 이를 존중한다.

정전협정 규칙에 저촉되는 것이란 군용선박이나 무기나 탄약을 실은 배의 출입 같은 것을 말한다. 그런 것을 제외하고는 남북 쌍방이 오랜 동안 한강하구를 이용하던 관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한강하구수역은 그냥 한강하구수역이다

한강하구수역은 말그대로 그냥 한강하구수역이다. 굳이 해석을 붙이자면 남북민간공용수역이다. 비무장지대는 오두산 전망대 위쪽 사천강 근처 장단면 정동리에서 끝난다. 즉 비무장지대는 육지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도가 아니라 우도와 예성강 끝이 전쟁전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선으로만 존재한다. 이는 군사분계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도에는 현재 군부대만 존재하기 때문에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으며 그래서 그 아래쪽에 있는 말도가 엉뚱하게 휴전선의 끝점으로 둔갑해 버렸다. 말도에 있는 군사정전위가 제공한 평화호라는 배가 조류에 밀려 북쪽으로 가끔 들어가도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은 정전협정상 보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하구의 하도河圖가 없다. 일제때 측량한 아주 투박한 하로도가 전부이다. 물론 이 하도는 현재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분단 때문이다. 한강하구는 아주 묘하게 되었다. 남과 북이 교류하지도 점령하지도 못하는 자연과 역사와 문명의 공백으로 되었다.

폴란드와 독일의 국경을 이루는 오데르-나이세강과, 베트남을 갈라놓았던 번하이강엔 DMZ와 군사분계선이 있었다. 그러나 한강만은 달랐다. 한강하구에 대한 규정은 다른 나라의 조약과 비교해도 독특한 규정이다. 이는 전쟁도 자연, 역사, 문명의 통일체로서의 한강의 존재를 인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보다 분단이 더 지독하다. 분단은 한강을 조용히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했다. 금강하구, 낙동강하구는 친숙한데 한강하구가 어떤지를 알거나 관심 가져 본 사람이 많지 않다.

그사이 한강은 공고한 군사시설이 되었다. 곡릉천앞 국방부가 설정한 어로한계선의 장애물은 배가 닿으면 파괴되도록 하는 군사시설이며, 잠실 수중보가 수위조절용인데 비해 김포대교 밑의 수중보는 간첩침투방지용 시설물이다. 또한 전방지역의 지뢰들이 장마나 홍수에 의해 유실되어 한탄강 임진강을 거쳐 130KM가 넘는 거리를 거쳐 강화도에 퇴적되는 유실지뢰의 통로가 되었다.

서울정도 600년을 즈음해서 한강개발에 대한 폭발적 관심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한강개발계획안이 제출되었다. 그러나 분단인식 없는 한강개발계획은 공허한 것이다. 아무리 귀찮고 급해도, 숭늉을 먹으려면 벼부터 심어야한다.

숭늉부터 찾으려는 조급함의 대표적인 사례가 한강과 영종도를 연결하기 위한 경인운하건설 계획이다. 현재 한강하구만 분단이전상태가 되면 엄청난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영종도와 서울을 연결하는 수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전협정에서도 보장된 것이다. 분단에서 생긴 왜곡된 인식만 바꾸면 되는 일이다.

두 차례 시도

한강에서는 이런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한 소중한 경험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991년과 2000년에 두 번 있었다. 91년은 자유로 공사를 하는데 한진해운소속 바지선이 50년만에 처음으로 한강하구를 통과했다. 당시의 통일열기에 힘입어 유엔사에 근무하던 한국인 이문항 선생의 노력으로 성사되었다.

국방부는 유엔사에, 유엔사에서는 이문항 선생에게 자문을 구하는 상태였는데 이문항 선생은 북방한계선과 한강하구에 대한 일반적 인식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유엔사를 설득해서 이 일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불행히 이 사건은 너무 쉽게 잊혀졌다. 민간의 참여가 없었기 때문이다. 2000년 6월 25일 남북정상회담 직후 예술인들이 중심이 되어 한강에서 서해로 평화의 배띄우기라는 행사를 가졌다.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고, 역사는 생활의 과정이며, 문명은 생활의 결과라고 했다. 때문에 강의 역사와 문명을 살려내기 위해서 먼저 할 일은 한강하구수역에 사람의 생활을 되살리는 일이다. 그러자면 우선 이곳이 배가 자유롭게 다녔고 다닐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됐다. 그래서 나는 배를 타고 갈 결심을 했다.

평화예술인국제연대의 임옥상 선생은 이 말을 듣고 만약 군인이 막으면 헤엄을 쳐서라도 가겠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배는 선단으로 키우자고 했다. 민예총의 김용태 부이사장은 북과 함께 하기 위해 북경으로 떠났고, 동국대 윤명철 교수는 배 대신 뗏목을 타고 가자고 제안해서 정말 선단을 이루는 게 가능해졌다. 누구에게 얘기해도 막힘이 없었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런 환호 뒤엔 단순히 배를 띄우는 이벤트에 대한 관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해교전이후 1년 동안 극한으로 치닫던 서해 5도의 북방한계선이 한강하구수역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간의 긴장상태를 완화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행사를 추진하던 중 기적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고 생각지도 않았던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다. 남에서 허용할 수 있는 오두산 통일전망대 앞 곡릉천 어로한계선까지는 가도록 허가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2000년 6월25일 `한강에서 서해로 평화의 배띄우기` 행사가 실현됐다. 민간행사로서는 처음으로 대대적인 인원이 한강 철책선이 시작되는 김포대교 밑의 수중보를 넘어갔다. 남북정상회담 의제가 될 것이라던 예상도 적중하여 한강하구수역 문제에 관한 비공식 토의가 있었다는 문화일보의 보도가 있었다.

남북이 만나 자유로운 선박왕래가 될 때까지 우리는 더 많은 사람과 배를 띄워야 할 것이다. 한강하구의 뱃길이 복원되면 경인운하를 따로 건설할 필요가 없고, 서울은 원래대로 국제적인 항만성 도시로 바뀔 것이며, 서해는 동아시아의 지중해로 변할 것이다. 배가 지나간 길을 따라 역사가 살아나고 문명이 움틀 것이다. 그때쯤이면 조선시대까지 한강과 임진강이 어떤 강이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며, 오두산 전망대는 안보관광지가 아니라 통일의 등대가 될 것이다. 강에는 물결이 흐르고, 민족엔 숨결이 흐르게 될 것이다.    

강이 처음부터 어디로 흐를지 방향을 정해 놓았을 리 만무하다. 강이 흐르자 방향이 생긴 것이다. 민족의 운명도 정해져 있을 리 만무하다. 사람이 변화하기에 운명도 점쳐볼 수 있는 것이다.

한강하구의 민통선

한강하구에서 사람의 생활을 복원하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일이 있다. 한강하구지역에 설치된 민통선의 해체이다. 관광객들은 강화도와 김포에 민통선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북과 코를 맞대고 있는 강화도 북부지역이 송해면 월곶리부터 양사면 인화리까지, 김포는 하성리까지 모두 민통선이다.

역사적으로 강화는 군사요충지여서 봉건시대에도 둔전을 두었던 곳이다. 둔전은 주둔지의 군인들이 식량과 경비해결을 위해 지급된 토지인데, 민통선의 토지도 군에 묶여 있으니 분단은 이 지역을 봉건시대로 돌려놓은 셈이다. 그러나 한강하구지역의 민통선은 불법이다.

군사시설보호법에 따르면 "민간인통제선"이라 함은 `고도의 군사활동보장이 요구되는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지역에서 군 작전상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하기 위하여 국방부장관이 군사분계선의 남방에 설정하는 선`을 말한다. 그러나 한강하구지역은 북과 가까이 하고 있을 뿐 개풍군 사이의 바다에는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곳은 정전협정상 고도의 군사활동보장이 요구되기 이전에 전쟁이전부터 유지되어온 민간의 자유로운 어로활동을 보장해야 하는 곳이다. 때문에 군사분계선 인접지역에 설정하는 민통선이 강화도와 김포에 있는 것은 정전협정을 잘못이해 한 것이며 헌법상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므로 위법이다.

2001년 말에 군사보호구역을 일부해제하면서 강화도에도 두 군데 지역의 통제가 풀렸지만 민통선자체를 법에 따라 해제시켜야 할 것이다. 이는 고조되어가는 전쟁의 위험을 현저하게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강화도의 어업도 살아나고, 한강도 살며 서울이 항만도시로 영종도와 함께 동북아의 중심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강하구에서의 평화행동은 민족문명의 힘으로 전쟁을 예방하는 민간의 평화통일전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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