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욱(연합뉴스 기자)


2002년 10월 미국이 일으킨 `북핵 소동` 이 6개월만에 해소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의 이라크침략이 종결되는 시점에 북(조선)이 `대화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고(4월12일) 이로부터 나흘 뒤 한-미 양국이 `북, 3자대화 수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중국은 외교부 대변인 논평에서 "북-미 양국이 대화에 나선 것을 높이 평가한다"고 밝혔고 북측 외교부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와의 문답에서 "이번 회담은 북-미 직접회담"이라며 중국은 장소제공자일 뿐이라고 쐐기를 박았다.(4월18일) `3자회담` 성사의 시말과 전망,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침략 이후 전개될 세계정세 흐름을 조망해 본다. (필자 주)

1. 북(조선)은 다자대화를 수용했나

북(조선)의 외무성 대변인이 4월12일 조선중앙통신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강조한 것은 `북-미 직접대화`였다. 4월9일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가 북한에 대한 어떤 조치도 내놓지 못했음을 언급하면서 북측은 이미 핵확산금지조약(NPT)의 규정에 따를 의무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압살정책을 포기할 정치적 의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북(조선)은 `다자대화`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대북 `선(先) 핵 포기` 주장을 철회하고 대북 적대시정책을 포기하는 수순을 밟도록 추동(推動)한 것이었다. 또한 북측은 이미 3월초 미국에 `플루토늄 재처리` 사실을 통보한 상태였다. 3월말 잭 프리처드 미 대북교섭 담당대사가 뉴욕 유엔주재 북측 대표부를 찾아가 한성렬 차석대사와 연 3일이나 회담을 가진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미국은 북측의 `플루토늄 재처리 사실 통보`에 놀라 중국이 개입하는 형식을 전제로 직접 대화 수용한 것이고 북측은 미국의 이런 입장을 파악한 뒤 "대화의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밝히면서 미국의 대화 수락을 압박했다.

류젠차오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17일 정례 브리핑에서 북핵 해결을 위한 다자회담과 관련해 "중국은 미국과 북한이 대화를 통해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고 밝힌 것이나 북측 외교부 대변인이 18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문답에서 "베이징 회담은 북-미 양자대화"임을 강조한 것은 미국이 북-미 양자대화를 수용했음을 말해준다.

이라크전쟁에 때맞춰 북한이 다자대화를 수용한 것은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을 의식한 때문이라며 `바그다드 효과`(Bagdad Effect) 운운하는 것은 이런 전후 사정을 이해하지 못한 소치이다. 실상은 미국이 이라크전쟁에 때맞춰 대북 적대시정책을 포기할 의사를 내비치면서 북(조선)과의 대화에 나선 것이다.

미국이 핵이나 미사일 문제를 앞세워 국제 여론 몰이에 나서면서 북(조선)을 압박하다 결국 미국 스스로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고 북측이 요구하는 대로 대화 석상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1년 부시 행정부(1기) 시절 핵 소동이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와의 안전협정 체결로 이어진 과정이나 1993년 클린턴 행정부 출범 직후 정치외교적, 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을 압박하려다 같은 해 6.11 북-미공동성명과 이듬해 북-미 제네바기본합의(1994.10.21)로 마무리된 것, 1998년 8월 금창리 지하핵시설 소동이 페리보고서로 종결된 것 (1999.9) 등의 전례가 있다. 이 모두 미국의 일방적 대북 압박과 북한의 강경한 대응으로 한반도 전쟁 위기가 고조되다 결국 미국이 북(조선)의 요구를 수용한 예들이다.

한반도 평화통일의 프로세스에서 북측은 언제나 추동자(mover)였고 미국은 항상 추종자(follower)였을 뿐이다. 미국은 지난 반세기 동안 북측이 주도하는 평화와 통일의 프로세스를 방해하고 제동을 걸어왔다. 미국은 수없이 많은 북측의 대화 제의를 이런 저런 핑계를 앞세워 거부하면서 한반도 분단체제를 유지해온 것이다. 2003년 4월의 한반도 정세 역시 이런 `추동`과 `반동`의 역사성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2. 미국의 북핵 입장 변화

지난해 10월 미국의 일방적 핵 소동과 북측의 불가침조약체결 제안 이후 미국의 태도 변화가 처음 감지된 것은 11월 중순이었다. 바로 미국의 압력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12월 대북 중유 공급을 중단(11.14)한 직후이다.

이 달 18일 리처드 루가 미 상원의원은 "지금 우리는 북한이 (대량파괴)무기를 추가 생산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틀(construct)이 필요하다"면서 핵 위기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결책`으로 "창조적인 외교적 해결"(creative diplomatic solutions)을 강조했다.

이보다 하루 앞서 지난해 11월17일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도 제네바 기본합의문이 "북한의 핵무기 위협을 제거하는 한 방법이었다"고 강조해 이 합의의 파기 가능성을 우려했고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도 루가 의원의 발언이 있던 날인 지난해 11월18일 한 회견을 통해 북한이 제임스 켈리 미대통령 특사에게 제시했던 ▲자주권 인정 ▲불가침 확약 ▲경제 발전 장애 불용 등 3가지 사안을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미국 신문 유에스에이 투데이(USA Today)는 지난해 12월3일 인터넷판에서 한 미 행정부 관리의 말을 인용해 "북-미 양국간 적대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협상테이블로 향할 것"이라며 "미국은 은밀히 대북협상의 길을 여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또 "북한이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핵 개발을 포기할 경우 석유와 식량 또는 다른 지워 등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부시행정부는 2003년 시한의 제네바합의 불이행의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핵 소동을 일으켰지만 불과 한 달만에 북 핵 공방에서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고 결국 강압적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대북 협상의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북측은 이어 2003년 1월10일 예고했던 대로 NPT에서 탈퇴하는 조치(1.10)를 취했고 이후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이 잇따라 `불가침 문서 보장`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이에 북측은 `의회가 비준하는 불가침조약`을 요구했고 부시행정부는 `불가` 입장을 고수하는 듯 했지만 이미 미국 조야에서는 북(조선)과의 불가침조약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중국과 러시아 등이 계속 북-미 대화를 강조하고 안으로는 의회와 빌 클린턴 전 미 대통령과 클린턴 행정부에서 북 핵 문제를 다뤘던 이들이 모두 나서 `불가침조약 수용`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핵 문제는 유엔으로 이관(2.12)됐고 미국은 곧바로 베를린주재 북(조선) 대표부로 사람을 보내 타협을 시도했으며(2.20) 북측은 2003년 3월초 역시 예고했던 대로 핵 시설 재가동을 위한 조치를 미국에 정식 통보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 정부 내에서는 북측이 핵 시설 재가동에 들어갈 경우 대북 군사적 응징에 나선다는 분위기였다. 이른바 금지선(red line)이었다. 리처드 마이어스 미 합참의장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 검토발언이 보도되고 언론은 경제제재 및 항공기와 선박 나포, 해안봉쇄 등 소위 `맞춤 봉쇄`(tailored containment)에 대한 설을 유포하는데 몰두했다.

그러나 3월4일부터 미국 정부와 언론에서는 `북 핵 개발 용인`을  시사하는 언급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USA 투데이가 이날 `미국, 북핵사태 기다리기 전략` 이라는 제목의 1면 머릿기사에서 "부시 행정부 관계자들은 북한이 앞으로 며칠 후 아니면 수주 후에 폐연료봉 재처리에 돌입함으로써 미국과 핵 대치 국면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며 "그러나 미국은 이에 군사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도 같은 날 "미국은 북한이 원자로를 재가동하고 미국 정찰기에 대한 위협 비행을 하는 등 일련의 긴장조성 행위를 통해 미국의 관심을 끌려고 하나 의도적으로 이를 무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의 원자로 재가동 소식에 대해 애써 모른 척 하겠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3월5일 애리 플라이셔 백악관 대변인 기자회견은 `금지선`에 대한 미국의 인식에 변화 있음을 시사했다. 북측이 미국에 플루토늄 처리 준비 사실을 정식 통보한 시점은 바로 3월4-5일 사이일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는 "북한이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시작하면 `금지선`을 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금지선이 무엇인지 말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말했고 `제재`나 `응징`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하루 전날인 3일 리처드 바우처 미 국무부 대변인이 정례브리핑에서 "그런 사태는(금지선을 넘는 것) 그들에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고 사뭇 강경한 발언을 했던 것과 비교된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전을 시작한(3.20)지 열흘만에 뉴욕 주재 북(조선) 유엔대표부에 잭 프리처드 대사를 보내 북측과의 접촉을 시도한 것(3.30)은 바로 북측의 플루토늄 재처리를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로부터 다시 열흘 여만에 북측이 `대화 형식 불문`을 시사하면서 `시간이 얼마 없다`고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했고(4.12) 곧바로 미국은 중국을 포함한 북-중-미 3자 회담에 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4월14일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이 핵 문제의 한 당사자이긴 하지만 주도권을 가진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라고 말해 이미 한-미 간 남측을 배제한 북-미-중 3자회담이 확정된 상태였음을 시사했다.

3. 이라크전쟁과 북-미 대화

미국의 이라크침략전이 마무리되는 가운데 북-미 대화가 동시에 시작되는 것을 두고 `바그다드 효과`라고들 평가한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대로 북측이 미국의 다자대화를 수용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양자대화를 수용한 것이며 따라서 이라크전쟁 종결 시점에 맞춰 북한이 대화에 나섰다는 주장은 억지 아니면 무지의 소치이다.

외무성대변인이 18일 회견에서 "이번 베이징회담이 이라크전쟁이 벌어진 시점에서 열리게 되는 것으로 하여 국제적인 여론이 분분하다"고 지적한 것이나 조선신보가 19일 <데스크의 눈>에서 북측이 `다무적 틀거리`(다자회담)에 나선 것을 두고 `바그다드 효과`를 거론하는 것은 "외교정책의 목적과 수단을 가려보지 못한 엉뚱한 지적"이라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미국이 왜 이라크 전쟁을 종결하면서 북측과의 대화에 나섰는지를 이해하려면 2001년 9월30일 미 국방부가 발표한 4개년 국방검토보고서(QDR)를 다시 봐야 한다. 이 보고서는 `하나의 전쟁(이라크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을 목표로 대규모 중동전쟁을 준비하면서 `나머지 전장(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를 지향한다는 소위 `원-플러스(One-Plus) 전략`을 담고 있었다.

대규모 중동전쟁 구상은 2001년 9.11사건을 빌미로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면 한반도 분단체제 유지 및 중-소규모 전쟁 개입에 대한 구상은 2002년 10.12 발리 사건을 촉매제로 본격 실행에 들어간다. `9.11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소위 반테러연합전선을 구축해 북(조선)에 대한 고강도 압박전술을 구사했고 1년여 뒤 10.12 사건에 즈음해 북 핵 시비를 일으키면서 다시 한 번 대북 공세에 나섰지만 결국 모두 실패한다. 이후 미국은 북-미 대화에 나선 것이다.(월간 자주민보(월간 우리 전신) 2002년 11월, 12월, 2003년 1월, 4월호 글들 참조)

미국의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한 것은 2002년 10월3일부터 5일까지 사흘간이었으며 미 백악관이 켈리 방북 때 북측이 핵무기 개발을 시인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은 10월16일(미 현지시간)이었다. 켈리가 서울을 거쳐 귀국한 지 거의 열흘만에 `북 핵개발 시인`을 발표한 이유는 바로 이라크전쟁 준비와 관련이 있었다.

2002년 10월11일 미 상하원이 만장일치로 부시에게 이라크 전쟁 수행을 위한 무제한의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데 이어 `발리 사건` 이틀 뒤인 같은 달 14일 부시 미 대통령은 백악관 회견에서 "이라크와 빈 라덴이 이끄는 테러조직 알-카에다에 대해 동시 소탕작전을 벌일 수 있다"고 밝혔고 16일에는 의회가 만장일치로 승인해 준 이라크 전쟁결의안에 서명했으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이라크 결의안 채택을 위한 압력을 높이기 시작한다.

`북 핵개발 재개론`은 바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이라크 전쟁과 `발리 사건`을 빌미로 하는 동남아시아 대테러전쟁의 시동을 건 이후에 발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라크 침공전쟁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 가운데 `북 핵개발 재개`를 발설할 경우 `핵이 있다고 시인(?)하면서 핵 사찰을 거부하는 북(조선)을 놔두고 `핵이 없으니 뒤져 보라`는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명분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미 지배세력은 1991년 걸프전 이후 여러 차례 이라크를 공격하면서 그 때마다 `북한에 교훈을 준다`는 주장을 폈고 이번 이라크 침략전에 즈음해서도 같은 목소리들이 흘러나왔다.  미국 조야 및 언론이 유포하는 이런 주장은 바로 미국의 `대북 취약성`을 반증하는 것으로 미국이 한사코 거부하던 북-미 양자대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를 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측은 이런 미국의 체면유지 욕구를 적절히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 준비에 한창인 가운데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2003.1.10)를 선언하고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개시될 시점에 플루토늄 재처리 사실을 정식 통보했으며(3월초), 이라크 전쟁 종결 시점에 때맞춰 대북 적대시압살정책 포기를 종용하며 `대화 형식 불문`을 발표한 것(4.12) 등은 미국을 대화 석상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외교전술이었다.

4. 미국의 한반도전략 변화

지난해 10월 부시행정부가 북 핵 소동을 시작한 이후 북-중-미 3자회담이 성사된 2003년 4월 현재까지 6개월간 미국의 움직임은 바로 클린턴 행정부가 `윈-윈 전략`을 정식화한 뒤 대규모 중동전쟁을 획책해 왔던 8년의 축소판이자 그 모든 과정을 최종 마무리하는 시간이었다. 미 핵심 세력은 클린턴 행정부 출범 이후 8년 동안 공을 들인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 구축 작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신(新)부시행정부를 출범시켰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잇따라 침략한 것이다.

미 군산복합체는 8년을 준비해 온 이 전략을 부시행정부 출범과 동시에 `원-플러스(One-Plus) 전략`으로 바꿨고 이 전략 발표(2001.9.30) 일주일 뒤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으며(2001.10.6) 곧바로 이라크 침략을 획책해왔다. 그러나 바로 그 두 개 전장 가운데 하나이면서 사실상 미 핵심세력의 주공 대상이었던 북(조선)과의 대결에서 미국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군사적 공격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이를 실행하지 못했고 이런 군사적 공격을 시도한 뒤 번번이 북(조선)과의 정치적 타협에 나서야 했다.

1990년대에도 미국은 여러 차례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미국은 한 쪽으로는 평화협상을 준비하는 이중전법을 구사했다. 1994년의 핵 위기 국면에서도 미국은 한편으로는 전쟁을 준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은밀히 추진했다. 그리고 미국은 1993년 11월초 방북한 미국측 대표단이 북측으로부터 전달받은 `북-미 대화 방안`에 따라 1994년 10월 제네바기본합의에 서명했던 것이다.(1993년 방북단의 일원이었던 케네스 퀴노네스 전 미 국무부 북한담당관은 2000년 초 출간한 <2평 빵집에서 결정된 한반도 운명>이란 제목의 책에서 북측이 건넨 문건이 `핵문제 해결책`(고려사항)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퀴노네스씨는 이후 여러 차례 미국내 매파의 대북 강경책에 이의를 제기하며 북-미 협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2001년 부시 행정부 출범후 미 연방수사국(FBI)이 그의 `수뢰 혐의`를 조사한 것은 그의 이런 행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제네바합의 뿐 아니라 한 해 전인 1993년 6.11 조-미 공동성명이나 1999년 9월 발표된 페리보고서,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의 백악관 방미 때 발표된 북-미 공동코뮈니케 등 북-미 위기 끝에 나온 성과들은 모두 북측이 타협안을 제시하고 미국이 이에 응한 결과였다.

지난 10년 기간 절정에 달했던 북-미 대결사는 `윈-윈 전략` 실현을 위한 미국의 한반도전쟁 계획과 이에 맞선 북(조선) 사이의 치열한 대결의 역사였다. 이 기간 미국은 끊임없이 한반도 위기를 조장하다 결국 북측과 타협하면서 새로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수용했고 다시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깨뜨리면서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행위를 반복해 온 것이다.

결국 미국은 이라크와 북(조선)과 동시에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는 전략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측과의 전쟁 준비 끝에 제네바합의와 북-미 공동코뮈니케 등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 나올 때마다 미국 조야에서는 `윈-윈 전략` 수정론이 대두되곤 했다. 클린턴 행정부 말년 인 2000년 10월 12일 체결된 북-미 공동코뮈니케는 북-미 대결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할 대사건이었고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쟁 구상을 사실상 무산시켰다. 미 핵심지배세력이 2000년 말 부시 행정부를 출범시키면서 동시에 윈-윈 전략을 원-플러스 전략으로 바꿔야 했던 이유는 바로 북-미 세력관계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주한미군 철수를 포함한 미국의 동북아 군사력 재배치의 주요 원인 또한 북-미 세력 관계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2002년 제2차 한반도 핵 위기는 수없이 반복된 북-미 대결사의 한 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번 제2차 한반도 핵 위기는 부시행정부가 2003년 제네바합의 시한 만료를 앞두고 이 합의 불이행에 따른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벌인 소동이었을 뿐이다.

다만 이번 제2 한반도 핵 위기는 미국이 1993년 6.11 공동성명을 무시하거나 1994년 제네바기본합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차원의 `소규모 파동`과 달리 제네바기본합의 이후 8년간 북-미 관계를 규정했던 평화프로세스 전체의 궤도를 이탈시키기 위해 미국이 벌인 `대규모 파국`이라는 점에서 그 파장과 결과가 이전 북-미 대결 국면의 해소 과정과는 질적으로 다를 것으로 보인다.

조선신보가 4월19일 평양 정부관계자들의 말을 전하면서 "미국과의 대결전은 올해 안에 결판을 낸다"고 밝힌 것은 이번 3자회담에 임하는 북측의 전략을 함축한 말로 들린다. 미국이 가공할 핵 위기를 조장했지만 결국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대화 석상에 앉은 것을 보면 북-미 대화의 전망을 대체로 낙관해도 좋을 듯하다.

5. 3자회담에 대한 북측 전략

미국은 이번 3자회담에서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과 `경제 지원`을 당근 삼아 북 핵 개발 프로그램을 원천 봉쇄할 것을 호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북측은 미국에 대해 요구하는 적대시정책 포기이다. 이번 3자회담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4월12일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대북 적대시압살정책을 대담하게 전환할 용의가 있다면 대화의 형식에 크게 구애받지 않겠다"고 밝혔고 엿새 뒤인 18일 다시 조선중앙통신과의 인터뷰 형식을 빌어 이 사실을 강조했다.

북측 당국의 공식 입장과는 좀 다르지만 조선신보 19일 보도 역시 북측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전달하고 있다. 이 신문은 "다무적 틀거리(3자회담)에서도 조선(북)은 종래의 문제해결 방식을 추구해 나갈 것"이라며 "조선은 자주권과 생존권에 대한 위협의 제거가 모든 문제 해결의 기준점으로 된다고 밝힌 바 있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이 신문은 "이것은 단순한 체제보장이 아니다.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6.15남북공동선언의 이행, 민족적 화해와 통일도 자주권에 관한 요구"라고 설명했다. 이 신문은 또 북(조선)이 미국과의 대결전을 올해 안에 결판을 내겠다고 말한 사실을 전했다.

미국과의 `판가리 싸움`을 거듭 강조해 온 북측이 이번 북-미-중 3자회담을 끝으로 미국과의 대결전을 종결지으려 하고 있다면 북측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6.15공동선언 이행과 남북통일까지를 포함해 자주권을 실현하고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런 기준에 입각해 미국과의 대결전을 종결짓는 방법은 바로 평화협정 체결과 양국관계 정상화라고 볼 수 있다.

북(조선)이 `다무적 틀거리` 수용을 시사하면서 제시한 `전제조건`도 바로 이것이었다. 북측 외무성 대변인은 12일 중통 기자 질문에 답하면서 "미국이 대북 적대시압살정책을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압살정책을 완전히 제거하는 길은 바로 평화협정 체결  뿐이다.

북측이 요구하는 것이 미국이 주장하는 `체제보장` `경제지원`이라면 북-미 협상은 이미 지난해 11월 미국측이 `불가침 문서 보장` 및 `대담한 접근`(bold approach) 의사를 내비쳤을 때 시작됐고 이미 협상은 끝났을 것이다. 북측은 말로만이 아닌 실질적인 적대시정책 포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평화협정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밖에 없다.

북측은 핵 사태가 불거진 지난해 10월 이후 같은 달 25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북-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강조했지만 이는 사실상 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수순이었다. 더 멀리 보면 북측은 1974년 3월 불가침 확약을 첫 번째 단계로 하는 4단계 북-미 평화협정 체결안을 미국에 정식 제의한 바 있다.

북측은 지난해 불가침조약 체결을 정식 제안한 지 닷새 뒤인 10월30일 조선중앙방송 이후 "정전협정이 무력해졌다"면서 불가침조약 체결의 당위성을 강조해왔고 최근에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관한 논평 등을 통해 "설사 불가침조약을 체결한다 해도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서 서서히 `불가침조약 이후`를 겨냥하기 시작했다. 북측의 이런 행보는 △불가침조약 체결 요구 단계에서 △정전협정 무력화를 강조하는 단계를 지나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대체를 요구하는 단계로 변화돼 왔음을 말해준다.

미국 또한 북측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사실상 수용한 바 있다. 바로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의 백악관 방문때 발표된 북-미 공동코뮈니케(2000.10.12)가 그것으로 당시 양국은 "조선반도의 긴장 상태를 종식시키는데 있어서 4자회담 등 방도들이 있다"고 확인하고 `한반도 평화보장체계` 구축에 합의했다.

이후 북-미 관계가 냉각기에 들어갔지만 북측은 2001년 1월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고 같은 해 5월과 지난해 1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평화보장 체계`를 강조해왔다. 그동안 북-미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은 부시행정부가 북측의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북 핵 포기라는 `상징적 성과`를 전제로 북측이 반세기 동안 요구해 온 `기본적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대북 대화에 나선 것이다.

돌이켜보면, 북측이 다자대화 수용의 뜻을 밝힌 때로부터 한반도 정세는 평화협정 단계로 이행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북측은 지난해 미국의 일방적 핵 소동 이후 핵 선제공격 및 군사적 응징을 떠벌리는 와중에 `불가침`을 앞세워 전술적으로 대응해 오다 미국의 움직임을 간파한 뒤 `북-미 평화협정`을 겨냥해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3자회담을 시작으로 한반도 정세는 북-미 평화협정 국면으로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1974년 3월25일 최고인민회의가 처음 미국에 대해 평화협정을 제안할 당시 제시한 것은 모두 4가지로 첫째가 불가침, 둘째가 무력증강 중지이며 셋째가 주한미군 철수이고 넷째는 외국 군대 완전 철수였다. 유엔사 해체를 포함한 주한미군 이미 철수 초기 단계로 진입했다고 볼 수 있다.

2000년 10월 조명록 차수의 백악관 방문 때 발표된 북-미 공동코뮈니케(10.12)는 "1953년 정전협정을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로 바꿀 것"을 언급한 뒤 "쌍방은 어느 정부도 타방에 대하여 적대적 의사를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앞으로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미국이 북(조선)과의 협상테이블에 다가서면서 교착상태에 빠진 북-일 교섭이 원상 복구될 것으로 기대된다. 북-일 수교 교섭을 교착상태에 빠뜨린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이었다. 역사적인 `북-일 평양선언`에 따라 재개된 제12차 수교협상이 결렬된 것은 바로 미국이 열흘 전 제기한 `북 핵 의혹`때문이었다.

일본이 여론의 핑계를 대면서 고수하고 있는 `납치자 문제` 역시 미국의 `북 핵 난장`에 편승한 의제였다는 점에서 일본이 더 이상 이 문제를 고수할 처지가 못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0월15일 1∼2주 일정으로 일본으로 일시 귀국한 `납치피해자` 5명이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는 가운데 4월14일 조선중앙통신이 이들 5명의 평양 귀환을 요청한 것은 이미 북-일간 접촉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한국 역시 남북대화에 나설 채비를 서두르고 있으며 4월 27-29일 평양에서 제10차 장관급회담(상급회담)이 열릴 예정이다.

북-미 관계가 풀리면 북-일 관계도 풀리고 남북관계도 다시 대화국면으로 진입하는 것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한-미-일 3국의 대북 적대공조 구조상 당연할 귀결인 것이다.

6. 한국 배제론과 다자회담

3자회담에 우리가 끼이지 못한데 대한 비난이 비등하고 있지만 한국의 다자회담 참가론은 미국이 북한의 북-미 불가침조약 요구를 거부하며 내세운 다자회담 주장에서 파생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소모적 논쟁일 뿐이다.

이번 핵 사태라는 현안과 별도로 우리가 지난 수 십 년간 주장해 온 소위 `당사자론`이라는 것 역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편승한 측면이 강했다. 소위 통미봉남론(通美封南論)이 그것이었다. `북한이 미국과 대화하면서 남한을 봉쇄한다`는 이 개념은 미국이 남북을 분단관리하면서 실질적인 남북대화가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북한 때문에`로 잘못 인식하는 것으로 한반도 정세를 미국의 의도에 맞춰 해석한데 따른 오류이다.

겉으로는 `당자자론` 이지만 이것은 미국의 대북 대화 기피 또는 거부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자기부정` 또는 `당사자 부정론`과 다름없다. 미국이 퍼뜨리는 핵 또는 미사일 개발설 한 마디면 순풍에 돛단 듯 순항하던 남북대화가 순식간에 중단됐던 일이 다반사였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던 남북대화는 미 지배세력이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평화프로세스를 뒤엎으면서 그 해 12월 4차 장관급회담을 끝으로 사실상 중단된 것인 곧이어 부시행정부가 출범해 남북대화가 한동안 냉각기에 접어든 것은 한-미 관계와 남북관계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입증하고도 남는다. 멀리 보면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12.13)과 남북비핵화공동선언(12.31) 등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다 북측 부총리가 서울을 방문하는 등 남북관계는 순항할 수 있었지만 `미국발 북 핵 위기론`으로 모두 원점으로 돌아갔다. 1991년 시작된 북-일 수교협상이 2002년 10월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으로 이어지고 다시 12차 회담을 열다 중단된 것 역시 한-미-일 3국 공조틀을 앞세운 미국의 대북 접근시간표와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도외시하면서 북측이 미국과 대화하며 남한을 봉쇄하려 한다는 자기최면 속에 헤매는 것은 상황의 오판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다. 스스로 살 길을 버리고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남북 전체의 목줄을 더 세게 죄어달라고 애걸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이 주장이 지나쳐 소위 `조화와 병행`이라는 그럴듯한 논리가 성립되면서 미국과 일본의 대북 접근을 남측이 앞장서 가로막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이후 남한 정부는 북-일을 포함한 서방국들의 대북 대화 및 교섭을 적극 지원하는 쪽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미국의 남북분단관리전략은 여전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남북이 진정한 대화를 갖고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의 길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북-미 관계가 안착된 이후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10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이 미국은 IAEA 등을 부추기면서 북 핵 의혹을 부풀린 뒤 북한을 전방위에서 압박하고 북한은 이에 맞서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 국면이 조성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북(조선)의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1993.5.29)에 놀라 미국이 6.11 공동성명에 서명하면서 북-미 관계는 급속 호전됐고 이후 남북은 특사교환에 합의할 수 있었으며 북측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교환을 제의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당시 남측은 미국의 핵 의제에 편승해 핵 문제 논의를 위한 특사교환을 고집하다 그만 정상회담 기회를 놓치고 만다. 미국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미국을 대신해, 미국의 적국인 동족을 강박하기 위한 대화를 주장하는 것은 `당사자`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2003년 4월 중순 현재의 한반도 정세 역시 이와 같다. 노무현 대통령이 14일 문화일보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북 핵 문제 해결 뒤 정상회담을 열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은 `당사자`로서의 올바른 처신이다. 3자회담의 성사는 바로 한반도 해빙의 시작을 알리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에 `남(한국) 배제`니 `다자회담 예비회담`이니 하는 비논리적이고 소모적 논쟁에 휩쓸리는 것이다.

한국이 포함된 다자회담의 예는 바로 7년전 시작된 4자회담이 있었지만 이 회담의 성과는 지극히 미미했다는 사실도 상기해야 한다.
   
김영삼 정부 시절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제주도를 방문해 정상회담을 갖고 3자회담 발표일과 같은 날인 4월16일 4자회담을 발표했지만 무려 1년 8개월만인 1997년 12월9일에야 첫 회담이 열릴 수 있었다. 4자가 만나서 뭘 논의할 지를 놓고 여러 차례 `설명회`를 열고 몇 차례  예비회담을 열고서야 가까스로 본 회담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 회담을 시작하고도 회담은 진척되지 않았다. 바로 미국과 북(조선) 사이의 동상이몽 때문이었다.
   
북측은 `북-미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철수`를 전면에 내세웠고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 불가 입장을 고수하며 `남북평화협정 체결`을 줄곧 강조했다. 네 차례 회담을 이런 식으로 허송한 뒤 98년 4월 5차 본회담때 북측은 아예 `여건이 조성될 때까지 4자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뜻을 내비쳤고 1999년 8월 5∼9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6차 회담을 끝내면서 `회담 종결`을 선언해 버렸다.
   
사흘 뒤인 같은 달 12일 북한 외무성대변인은 조선중앙통신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6차 4자회담에서는 미국의 비이성적인 태도 때문에 아무런 진전도 없었다"면서 "우리측은 미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을 제안했으나 미국측은 우리의 정정당당한 요구를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들의 사악한 목적만을 드러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만약 미국이 미군철수와 평화협정체결에 관해 토론할 준비가 돼  있다면 우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에 즉각 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3자회담에서 북측이 미국에 요구할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진다.

7.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

미국은 1993년부터 2001년 2월까지 클린턴 행정부 집권 8년간 한반도와 중동에서의 `두 개 전쟁 동시 승리 전략`인 `윈-윈 전략`을 앞세워 북(조선)을 압박했다. 미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미 군산복합체는 부시행정부 1기의 `실정`을 질책하며 `새로운 세기 새로운 전쟁`을 위한 군사전략을 수립했고 이에 맞춰 새로운 정부를 구성한 것이 바로 클린턴 행정부였다.

부시 행정부 1기의 실책은 바로 걸프전을 전면전이 아닌 제한전(limited war)으로 치르면서 조기에 끝마친 것과 주한미군 3단계 철수 및 남북 화해 협력 프로세스를 허용한 것이다. 세계를 화약고로 만들고 군산복합체를 살릴 기회를 날려버린 조지 H.W.부시는 1992년 선거에서 당선될 수 없었다. 실제로 조지 H.W.부시는 1992년 선거를 앞두고 `스스로 넘을 수 없는 어떤 벽`에 대한 `실체`를 고백하면서 패배를 자인하는 태도를 취했다. 미 대통령은 그 자체로서 권력이 아니라 미 파워엘리트가 창출하는 권력의 표상일 뿐이다. 부시 행정부 1기가 클린턴으로 넘어간 과정이나 클린턴 정부가 2기로 연장된 것, 클린턴 정부 2기를 끝으로 다시 신 부시 행정부로 권력이 이양되는 것 모두 이들 미 파워엘리트의 농간일 뿐이다.

미 파워엘리트는 구 소련을 대신할 `새로운 적`을 찾기 시작했고 이라크와 북한을 두 개 적으로 하는 새로운 군사전략을 세운 것이다. 미 군산복합체는 이런 세계전략 구도에 따라 이슬람문명과 유교문명을 기독교문명의 양대 적으로 삼고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를 구축해야 한다는 소위 `문명충돌론`을 고안해냈다. 부시 행정부 1기 시절 구 소련이 패망하면서 한동안 위세를 떨치던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론`은 서둘러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새뮤엘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부시 행정부 1기말인 1992년부터 초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해 클린턴 행정부가 출범한 1993년 `포린 어페어스`(Foreign Affairs) 여름호 논문으로 정식화됐다. 바로 이 해 `윈-윈 전략`이 수립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지배해 온 미 군산복합체가 구 소련 붕괴 이후 새로운 세계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윈-윈 전략`이라는 군사전략과 문명의 이름으로 포장된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은 미 군산복합체라는 한 뿌리에서 출생한 일란성 쌍생아로 하나는 미국의 세계지배를 위한 선전전이며 다른 하나는 구체적 계획서라고 할 수 있다.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서 문명 또는 문화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 책을 읽고 문명 또는 문화를 이해했다거나 새로운 시각에서 세계체제를 설명한다는 따위의 평가는 모두 위선이었다. 미국은 전 세계 각국 학계와 출판계 문화계 및 언론계를 동원해 문명충돌론을 설파하면서 이슬람권과 유교권을 `악마시`했고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정당성을 설명해왔다. 각 나라 언론과 학계 및 전문가들은 미국의 이런 치밀한 전략에 속아 자국민과 세계 대중을 우민화(愚民化)해 온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2003년 2월13일과 4월17일 녹색평화당 아카데미 강연 원고를 통해 밝힌 바 있다.)

미국을 스승이자 은인으로, 우리의 형제국인 북(조선)을 악마로 인식하는 것도 바로 이런 미국의 치밀한 우민화전략에 따른 것이다. 북(조선)과 미국의 치열한 대결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강-대-하-고-선-량-한 미국이 북(조선)을 힘으로 제압했다며 `바그다드 효과` 운운하는 것은 분단체제 50년 동안 남녘 주류 사회의 이성이 철저히 마비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언론과 학계 등을 통한 미국의 전방위 우민화전략(mocking-bird project)은 지금도 계속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8. 이라크 종전 후 세계질서

미국의 일방주의가 횡행하는 불안한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이라크 침략전에 따른 전 세계적 저항과 반미기류가 형성되고 있지만 미국의 일방주의적 흐름을 막아내는데는 역부족이다. 미 군산복합체는 10년 전부터 구상해 온 세계대전쟁 계획을 이제 막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반면 미국의 악마적 본성에 대한 이해는 이제 막 싹이 트는 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현 부시 행정부가 날마다 떠벌리는 `새로운 세기-새로운 전쟁`은 미 권력 의 배후인 군산복합체가 이미 10년전부터 구상해오던 것이었다. 2001년 9.11 사건은 이들이 이미 10년 전부터 꿈꿔오던 새 세기 질서를 창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사건이었다. 1993년 클린턴 행정부 중앙정보국(CIA) 국장에 임명된 제임스 울시가 그 해 2월2일 인준청문회에서 한 말은 바로 미 군산복합체의 새 세기-새 질서에 대한 욕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는 큰 용을 죽여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종류의 독사들이 갈곳 몰라 방황하며 우글거리는 정글에 살고 있다"(we have slain a large dragon, but we live in a jungle filled with a bewildering variety of poisonous snakes)고 주장했고 "용이 없는 세계는 더 위험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돌이켜 보면 무시무시한 예언이었다. 그가 `미국이 소련을 무너뜨렸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slay`라는 단어는 무작위로 사용된 말이 아니다. 흔히 `죽이다`, `무너뜨리다`, `패배시키다`의 뜻이 아니라 `파괴` `근절` `절멸`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사용자의 의지가 강조되면서 필연과 당위성을 시사하는 말이다. `독사`란 바로 이라크와 북(조선), 이란과 시리아, 리비아, 쿠바 등 미국이 `테러지원국` 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들임은 물론이다. 성경의 선악(善惡) 개념에 따라 이슬람 및 유교권 적대국들을 `뱀`에 비유한 것은 미 핵심세력이 이들 나라를 `근절` `절멸`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이 이들 나라를 `테러지원국` `깡패국가`(rogue state) 또는 `반동국가`(backlash-state) 등으로 부르는 것은 바로 미국을 문명국 또는 정상국가로, 이들 나라를 비문명국 또는 비정상국가로 구분짓기 위한 것임은 불문가지다. 2001년 출범한 2기 부시 행정부가 기독교 근본주의에 휘둘리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이들 나라들을 가리켜 "갈 곳 몰라 방황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미국이 주창하는 허울좋은 민주주의시장경제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데 대한 불만과 적대감을 표현한 것이다. 그의 `목적성을 띤 예언`이 나오고 나서 얼마 안가 미국은 테러지원국에 `수단`을 추가했고 매년 4-5월이면 이들 7개 나라들의 명단을 되풀이 암송하고 있다. 그리고 신 부시 행정부가 2002년을 `전쟁의 해`로 규정하고 북(조선)과 이란, 이라크를 가리켜 `악의 축`이라고 규정했다(2002.1.29).

울시의 이런 발언은 그 자신의 생각이었다기보다는 미 군산복합체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 또한 중앙정보국장으로 재직하면서 북(조선)과 이라크를 두 개 타깃으로 하는 전쟁 구상에 앞장섰으며 북(조선)이 미국의 전쟁 상대에서 제외된 이후에는 이라크 공격에 몰두했다.

클린턴 행정부 1기인 1993년부터 1995년까지 국가안보위원회(NSC) 동북아 및 남아시아국장을 지냈고 클린턴 정부 2기부터 신 부시행정부 초기인 1997년부터 2002년까지 국가정보위원회(NIC) 부의장을 지낸 엘린 라입슨(Ellen Laipson)은 2003년 1월 `포린 어페어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1990년대 내내 미 외교정책팀은 단순하고도 중차대한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며 `울시의 예언`을 인용했다. : "냉전의 용을 척결한 지금 미국의 발 밑을 기어다니는 많은 뱀들 가운데 어느 놈을 지목해야 한단 말인가?"(Now that the Cold War dragon had been slain, which of many snakes at America`s feet deserved the most attention?) 미 지배세력은 1990년대 내내 이 화두를 물고 늘어지며 새로운 세기- 새로운 전쟁을 구상한 것이다.

이라크는 이후 10년 내내 미국의 공격 대상이었다. 울시는 2001년 `9.11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그 배후는 이라크라며 이라크 침공을 주장했고 후세인 이후 새 지도자로 미국이 내세우는 찰라비는 바로 울시가 키운 `미국의 꼭두각시`이다.

울시는 2003년 이라크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2003년 4월2일 자신의 10년전 예언을 상기시켰다. 그는 "우리는 지금 4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다. 이 전쟁은 40년 계속된 냉전(3차대전) 보다 오래가지는 않겠지만 1.2차 세계대전보다는 길어질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라크 군정 배후에서 이란과 시리아 등을 붕괴시키기 위한 공작을 총지휘할 것으로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울시의 예언적 발언이 이미 10년 후에 치를 이라크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미 핵심 세력은 이런 세계대전쟁을 촉발하기 위한 빌미가 필요함을 역설해왔다. 미 군산복합체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가 1994년 유엔의 한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한 말이다. : "우리는 현재 지구적 규모의 변혁의 문턱을 넘고 있다. 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당하면서도 주요한 위기이며 이를 통해 전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일 것이다."(We are on the verge of global transformation. All we need is the right major crisis and the nations will accept the New World Order.)

세계 모든 나라들을 미국이 지배하는 질서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위해 `가공할 위기` 가 필요하다는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미 군산복합체가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중대하고도 정당한 위기`(right major crisis)를 구상해왔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있다. 이미 케네디 행정부때인 1962년 이들은 `오퍼레이션 노스우즈`(Operation Northwoods)라는 작전명으로 자국 비행기 또는 배를 이용한 자작테러를 벌이려 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쿠바를 침공할 빌미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라크침략의 시나리오가 부시행정부 출범 전인 2000년 9월 이미 마무리됐다는 사실도 뒤늦게 밝혀졌다. 부시 행정부내 강경파들이 관여하는 신보수주의 싱크탱크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 프로젝트`(PNAC)가 2000년 9월 작성한 <미국의 방위 재건 : 신세기를 위한 전략, 군, 자원> 보고서가 그것이다.(중앙일보 2002.9.22)

"클린턴 행정부 2기가 출범한 1997년 초 미국기업연구소(AEI) 5층 사무실에서 출범한 PNAC는 세금 감면 등 경제적 이슈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클린턴 행정부를 압박해 전세계를 대상으로 미국의 일방적 정책을 강요하기 위한 군사력증강을 목표로 삼았다."(대한매일 2003.4.23 <美제국 움직이는 `장막뒤의 新保守>) 현재 부시 행정부에서 `보수강경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물론 앞서 논한 제임스 울시와 프란시스 후쿠야마, 새뮤엘 헌팅턴 등 이름 있는 교수들이 모두 이 PNAC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오늘날 부시 행정부 주요 각료들이 한결같이 미 군산복합체 주요 임원 출신이거나 석유재벌의 경영자 그룹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그저 `돈 욕심` 정도로 지나칠 일이 아니다. 미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고별연설에서 "군산복합체를 조심하라"고 경고했지만 미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권력을 창출한 것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1913년 미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은 1차 세계대전에 나서면서 "민주주의를 위하여"를 외쳤다. 이 전쟁을 통해 미국은 패권국가로 발돋움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전쟁을 벌인다"는 구호는 1993년 클린턴이 유엔 연설에서 인용했고 2001년 9월, 미국에게는 실로 `역사적인` 9.11 사건이 발생하면서 부시 행정부는 이를 `21세기 새로운 전쟁론`으로 각색했다. "보다 안전한 세계를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치른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의 역사는 바로 전쟁과 살육의 역사였다.

현재 미국의 이런 세계대전쟁 구상은 미국 시민들을 포함한 전체 인류에게 있어서 그네들이 매일 들고 왼다는 성경의 `아마겟돈`(대환란)과 다름없다. 인류는 실로 끔찍한 `적 그리스도`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인들은 미국의 인류 멸살 기도에 대해 경계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역정은 이런 새로운 각성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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