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
북한의 토지개혁은 1946년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에 관한 법령]이 선포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3월 5일 발표된 [토지개혁법령]과 [토지개혁 실시에 대한 임시조치법], 3월 8일 발표된 [토지개혁법령에 관한 세칙]은 기존의 토지소유 관계를 전면 부정하고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을 결정했던 것입니다. 그것의 핵심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첫째, 일제의 소유토지와 친일파, 민족 반역자들의 소유지 및 5보정보 이상을 가진 지주의 토지, 계속 소작을 주고 있던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여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한다.
둘째, 농가의 가족 수와 노력자 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며 분여된 토지의 매매와 저당, 일체 소작제도를 금지한다.
셋째, 몰수한 산림, 관개시설, 과수원 및 농민들이 경작하기에 불리한 일부 토지는 국유화한다."

농민들의 토지에 대한 숙원을 김일성은 `세기적 열망`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농민들은 토지를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니 토지개혁이 농민들에게 안겨준 기쁨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는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것은 `천지개벽`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농민들의 황홀한 심정을 소설가 이기영은 [개벽]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토지를 농민들에게 값없이 나눠준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까? 실로 이것은 고금에 처음 듣는 말이다.
하건만 사실로 그렇다는 데야 어찌하랴! 그것도 내년이나 그 후년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당장 실행을 하여서 올해 농사부터 짓도록 한다니 더욱 희한한 노릇이다. 이게 과연 정말일까. 참으로 그들은 황홀한 심정을 걷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땅을 빼앗기는 지주에게는 이와는 정반대였습니다. [개벽]에는 지주의 심정이 이렇게 묘사돼 있습니다.

"이놈들 어디 보자! 이렇게 악을 쓰는 지주도 있었지만 그것은 이불을 쓰고 활갯짓하는 격이었습니다. 그들은 홧김에 술을 먹거나 그렇지 않으면 머리를 싸매고 누웠었다. 기껏해야 땅바닥을 치며 애고지고 저 혼자 비통할 뿐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땅덩이가 떠나갈 줄은 몰랐다. 천지개벽을 하기 전에야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었는데, 토지개혁이란, 정말 눈에 안 보이는 개벽을 해서 하룻밤 사이에 이 세상을 뒤집어엎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3월 5일 처음 토지개혁을 발표한 이래 26일만인 3월 31일 토지개혁 완료를 선언했습니다. 토지개혁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초단기간에 마무리될 수 있었던 것은 치밀한 사전 계획과 준비, 그리고 농민들의 열광적인 지지 때문이었습니다.
해방 직후 북한에서는 전체 농가의 4%에 불과한 지주가 총경지면적의 58.2%를 차지하고, 농가의 56.7%에 달하는 빈농이 경지면적의 5.4%를 나눠 가질 정도로 땅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였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농지개혁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며, 농민들은 투쟁을 통해 3·7제를 관철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1월 말부터 토론을 시작해 2월 20일 토지개혁안을 마련하고, 3월 5일 임시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법령을 공포하게 됩니다.

토지개혁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에서 토지 전문가 박문규와 법학자 최용달을 초청했고, 북한의 사회경제학자 김광진과 안길·김책·주영하 등 당 인사가 참여하는 토지개혁법령 작성위원회를 조직합니다. 법령 작성위원회가 조직된 뒤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위원들이 몇 차례나 농촌을 돌아보고 농민들과 좌담회를 개최하는 등 현장조사을 거쳤습니다. 특히 김일성의 열의는 대단해 한달 이상이나 농민들과 살면서 그들과 담화하고 의논했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봉건의식에 젖어 지주에게 대항하지 못하고 있던 농민들의 혁명적 열의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달이 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에 100만 325정보의 토지가 몰수되어 72만 4,522호의 농민들에게 98만 1,390정보의 토지가 무상으로 분배되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과히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북한 사회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토지개혁은 우선 농업 발전에 질곡이었던 봉건적 토지 소유관계를 청산하였으며, 북한에서 공업이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식량과 농산물 원료를 공급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공산당은 토지개혁 과정에서 빈농과 고농 가운데 많은 당원을 흡수하여 농촌에서 당의 기초를 세웠으며, 당의 성분을 바꿔 당을 확대시킬 수 있었습니다.

북한은 토지개혁의 성과를 토대로 계속해서 다음 개혁작업을 추진해 갑니다. 북한이 다음 단계로 추진한 개혁 작업은 8시간 노동제에 기초한 노동법령(46. 6. 24)과 남녀평등법(46. 7. 30)의 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46년 8월 10일에는 주요 산업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국유화 법령에 의해 일본 국가와 일본인 소유 또는 민족반역자 소유의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은행, 상업과 문화재 등이 국유화됐습니다. 그 결과 북한 지역의 90%에 달하는 공장과 기업소 1,034개가 전면 무상몰수 되었으나, 개인 소유는 특별한 경우에만 인민재판소나 임시인민위원회의 결정에 의해 몰수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의 민주개혁이 반제반봉건 혁명노선에 의해 진행됐는데, 소자산가와 민족자본가를 건국에 참여시키기 위한 민족통일전선 원칙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북한은 1946년 3월 초 토지개혁 법령을 발표한 이래 6개월 남짓한 기간동안에 주요한 민주개혁을 완전히 마무리 짓게 됩니다. 제도가 변한다고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북한은 민주개혁의 추진으로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로 발전해갈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의 토지개혁과 민주개혁은 미군정이 지배하던 남한 사회에 강력한 자극제가 됐습니다. `북풍`이 매섭게 몰아친 것입니다.
미군정의 지지 부진한 개혁과 친일파의 득세는 북한의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법령 제정, 그리고 친일파 제거와 대비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남한 민중들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으며, 농민들의 토지개혁에 대한 요구는 더욱 거세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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