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임시인민위원회의 탄생

1946년 2월 8일 평양에서는 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및 5도행정국 인민위원회 대표협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이날 김일성은 [목전 조선정치정세와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조직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하게 됩니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해방후 인민정권의 발전과정과 북조선에 중앙 주권기관을 세워야 할 필요성, 수행해야 할 당면과업에 대해 밝힙니다.

회의는 김일성의 보고를 그의 그대로 수용해 임시인민위원회 수립을 결정하게 됩니다.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신민당 당수 김두봉, 서기장에는 강량욱이 선출됐으며, 보안국장에는 빨치산 출신의 최용건이, 조직국장에는 국내파의 오기섭이 결정됐습니다. 세력 안배를 한 셈이지요. 이밖에도 산업·교통·농림·상업·체신·재정·교육·보건·사법 등의 국장들과 기획·선전·노동·총무 등의 부장들을 비롯, 총 23명의 위원이 결정됐습니다.
북한의 현대조선역사는 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의 의의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방에 새로운 정권기관들이 수립되고 더욱 발전함에 따라 우리 앞에는 각 지방인민위원회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만한 중앙기관을 창설할 과업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중앙적인 국가기구를 창설하여야만 인민정권기관들의 산만성과 지방할거주의적 경향을 퇴치하고 조국과 인민 앞에 나선 절박한 정치경제적 과업들을 더욱 원만히, 통일적으로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됨으로써 5도행정국의 결성에도 불구하고 지방인민위원회에 의해 분산적으로 진행하던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해방후 조직되기 시작한 인민들의 자치조직이 발전돼 가는 필연적 경로였던 셈입니다.

그렇지만 임시인민위원회가 과연 그런 성격만 가지고 있었을까요? 남북이 분할 점령돼 있는 상태에서 북한에서 단독으로 비록 임시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중앙행정조직을 결성한다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습니다.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던 소련으로서는 북한 지역에서 소비에트화를 추진한다고 비난받을 수 있는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 소련 군정측에서는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5도 행정국이 과도 역할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완전한 정권기관을 갖춘 인민위원회를 만드는 데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셈이지요. 심지어 허가이나 이동화 같은 소련계 공산주의자들도 5도 행정국을 그대로 유지하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면 임시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들은 과거 항일운동의 경험과 북한 정세 등을 고려해 임시적이지만 정권기관 형태를 갖춘 인민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미·소 공동위원회가 가동되고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될 때 대비해 미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이 임시 인민위원회를 주장했던 것은 그들 나름의 정세인식과 전략적 판단이 전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이 입북 직후부터 제기했던 `민주기지노선`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세가 조성된 상황에서 조건이 유리한 북한 지역에서 민주개혁을 통해 혁명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혁명을 확대해 갈 수 있다는 것이 민주기지노선의 핵심 내용이었습니다.

민주기지노선은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당 건설과 정권 수립 및 군대 창설 등 제반 문제를 포괄하는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의 핵심노선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후 정국의 변화에 따라 크게 3단계로 진행됩니다.

첫째 1945년 12월까지 당 건설에 치중하던 시기로서 이를 `민주기지 건설의 잠행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이 미국의 모호한 태도와 남한 반탁세력의 반대로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고 민주개혁을 실시해 가는 때로서 `민주기지 건설의 기초공사 시기`로 부를 수 있습니다.
셋째 1948년 초부터 1950년 전반기까지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1948. 2. 8), 인민경제계획을 수립·실천해 군사부문에서도 민주기지노선을 추진한 시기로서 `민주기지 건설의 완성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3단계를 거쳐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50년 초반에 민주기지 건설이 완성단계에 이른 셈인데, 이런 과정에서 북한은 남한과는 완전히 다른 사회주의 사회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과 항일빨치산 세력이 아무리 민주기지노선을 주장하더라도 소련 군정이 동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임시 인민위원회는 미국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했던 소련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김일성과 그 일파들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는 것은 미국이 모스크바 협상 결정을 지키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때문이었습니다.

소련은,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한 것은 소련이라는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계속하자 공식적으로 해명을 요구하는 등 강력히 반발합니다. 한편 소련은 미국이 남한의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처할 뿐 아니라 심지어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미군정은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의 이름으로 군정 산하 한국인 관리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고, 아예 반탁운동을 정권 접수로 발전시켜 가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지만,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는 중에도 남한에서는 반탁운동이 벌어졌지만, 미군정은 이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했습니다. 이것은 미군정이 지역 인민위원회를 파괴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정판사 사건을 계기로 강력한 좌익 탄압에 나서는 것과는 지극히 대조적이었던 것입니다.

소련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미국이 과연 모스크바 협정을 지킬 의사가 있는지 근본적인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소련은 미국이 오히려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뒤에서 부추기고 있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반탁운동을 통해 반소반공 의식을 조장하면서 미국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소련의 불신이 북한 지역에서 임시인민위원회 결성을 가능케 해준 또다른 요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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