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공동취재단/통일뉴스 김익흥기자
▶고 최용건 부주석의 아들로 밝혀진 최운주 국제부장(우측)이 부문별 만남에서 한상렬
통일연대 상임의장의 잔을 받고 있다. [사진 - 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최용건 북한 전 국가부주석의 아들, 최운주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국제부장
`점잖게 잘생긴 인상에 커다란 뿔테 안경, 반백의 머리에 말수 적은 근엄한 몸가짐...` 기자들 입장에서는 참으로 접근하기 어렵겠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인사다.
최용건 북한 전 국가부주석의 아들로 알려진 최운주 국제부장은 작년 8.15 민족통일공동행사에 이어 두 번째로 서울을 방문했다.
두드러져 보이지 않아 스치듯 인사만 나누었지만 기자에겐 낯익은 인사였다. 이번 3.1민족대회에서 만난 최운주 국제부장은 구면인지라 다소 부드러워 졌다.
작년에도 그랬듯이 이번 3.1민족대회에서도 그는 화제의 중심인사는 아니었다.
최 국제부장은 남측과 특별한 접촉을 시도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단순하게 조선사회민주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문병록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수행하는 듯한 분위기였고 공식석상에서는 한번도 회의를 이끌지는 않았다. 실제로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을 남측 민주노동당과의 비공식 회동도 문 부위원장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민주노동당과 북측 사회민주당과의 협의에 문병록 부위원장(우측)과 함께하고 있는
최운주 국제부장. [사진 - 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본인은 사실확인 꺼려
`최운주 조선사회민주당 국제부장의 아버지가 최용건 전 북한국가 부주석`이란 내력을 대회 행사관계자로부터 듣게 된 것은 대회 둘째 날 부문상봉 모임 직전이었다.
최 국제부장에게 직접적으로 사실을 확인하려하자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손사래를 친다. 함께 대회에 동행한 북쪽의 인사들로부터도 간접적으로나마 사실을 확인하려 했으나 이들 역시 모른다는 대답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행사관계자들을 만나 `최 국제부장의 부친이 최용건 부주석임`이 분명히 정확한 사실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였다.
하여튼 본인으로부터 사실을 알아내야 했지만 결론적으로 말하면 최운주 국제부장으로부터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고 추정할 수 있는 정도의 말만 들었을 뿐이다.
최용건 전 국가부주석은 어떠한 인사인가? 인터넷 인물조회에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평북 태천출생. 1921년 오산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윈난[雲南]군관학교 졸업, 황푸[黃浦]군관학교 교관, 만주에서 항일빨치산운동에 참가, 8.15광복 후 귀국하여 1945년 평남 자치준비위원회 중앙위원회 위원,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1946∼1955년 북조선민주당 중앙위원장으로 있었다. 1946년 인민위원회 보안국장, 1947년 동위원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48년에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6.25전쟁시 서울방위사령관, 1953년 인민군 차수(次帥)가 되었으며, 1954년 내각 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1955년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 재판장으로서 박헌영 사건 처리, 최고인민회의 제1∼5기 대의원,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중앙위생지도위원회 위원장,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비서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쳐 1972년에는 국가 부주석 역임.
이력만으로도 북한의 현대사를 이끈 혁명 1세대의 핵심중의 핵심이고 지금의 조선 사회민주당의 전신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한 주역이었다. 그의 아들은 현재 부친이 만든 당의 국제부장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랄까?
다음은 3월2일과 3일 동안 최운주 조선사회민주당 국제부장과의 인터뷰 시도과정이다.
▶2일 부문별 모임에서 한상렬(왼쪽) 통일연대 상임의장과 문병록(오른쪽) 사회민주당
부위원장 가운데 앉아 있는 최운주 국제부장. [사진 - 3.1민족대회 공동취재단]
3월2일 `평화통일 기원의 밤` 행사 전후
□ 작년에도 서울을 방문하셨는데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요?
■ .....(별 대답 없음) 작년은 여름이라 따뜻했지. (아마도 지금은 북미관계가 첨예해져 사용한 표현인 듯)
□ 부친이 최용건 전 부주석으로 알려졌는데요?
■ (손을 흔들며) 사실이 아닙니다.
□ 북미간의 긴장이 상당히 고조되었는데요?
■ 이 모든 게 미국의 책동이며 우리는 6.15 공동선언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민족공조로 자주통일을 일어야 합니다.
□ 부친은 어떠한 분이셨습니까?
■ .... (언성을 높이며) 그것이 여기서 무엇이 중요합니까?
3월3일 경복궁/ 고구려전 관람시
□ 조선사회민주당 당원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 한 3만명.
□ 중앙위원회 국제부장은 어떠한 역할을 합니까? 북미관계 등 외교적인 일도 풀어갑니까?
■ ......
□ 작년에는 비원을 방문하셨다가 시간관계로 둘러보지 못했는데요?
■ 경복궁과 창덕궁 중 어디가 더 큽니까?
□ 경복궁이 남북을 통틀어 가장 큰 궁궐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했다가 민심을 잃었지요. 경복궁을 복원한다고 해서 나라가 복원되는 것은 아니지요.
□ 부친의 고향이 평북 태천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 선생님은 출생지가 어딥니까?
■ ... 평양...
□ 자제분이 몇입니까?
■ ... 기자선생은 나이가 얼마인가? (가자가 42살이라고 하자) 내 사위와 연배가 비슷하네... 내가 얼마나 되어 보이나?
□ 50대 초중반쯤으로 보이십니다.
■ (기자가 지나치게 나이를 낮추어 대답을 했던지 순간 썰렁해 졌다) 남쪽에서는 고구려 역사를 잘 모르지요?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지배한 나라이고 가장 자주적인 시대였습니다.
□ 남쪽은 아무래도 신라중심의 역사해석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 신라는 당나라같은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을 억압했습니다. 신라가 백제를 치자고 할 때 고구려는 같은 민족을 치는 일는 안된다고 거절한 바 있습니다.
□ 북쪽의 국보급 유물이 전시된 고구려전을 보시는 소감이 어떻습니까?
■ 남북이 하나의 역사를 배우고 지녀야 합니다. 제나라의 역사를 잘 모르고서는 민족을 사랑하기 어렵지요
□ 오래전 역사에 대해서도 해석이 다릅니다만 최근의 역사에 대해서도 남북은 다른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용건 전국가 부주석이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한 것에 대해 남쪽은 달리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 지금 우리가 고난의 행군이다, 뭐다 어렵습니다만 그때 그 시절보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의 상황을 이겨나가는 데에는 지난 시절의 강고한 전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 부친께서는 조만식 선생과 조선민주당을 창당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 선생께서는 그 후신인 조선사회민주당을 이끌고 계시고요.
■ 사실과도 다른 데 한눈팔지 말고 기자 선생은 통일을 위해 노력해 주십시오. 6.15 공동선언을 이행해 나가는 길에 우리민족 자주통일의 길이 있습니다.
최 국제부장은 사실과 다르니 기사화하지 말 것을 당부하며 버스에 올랐다. 기자는 몇 가지 통로를 통해 최 국제부장의 부친이 최용건 전 국가부주석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했다. 독자들의 `알권리` 차원에서 이를 기사화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