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다 무어 말라 비틀어진 거야? 나라 명색이 내게 무얼 해 준 게 있길래... 난 오늘버틈 도루 나라 없는 백성이네. 제에길 삼십 육 년두 나라 없이 살아 왔을려드냐. 아아니 글쎄, 나라가 있으면 백성한테 무얼 좀 고마운 노릇을 해 주어야, 백성두 나라를 믿구, 나라에다 마음을 붙이구 살지... 독립됐다구 했을 제, 내, 만세 안부르기 잘했지.

채만식이 쓴 단편 소설 `논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한생원이 마지막으로 하는 말입니다. 한생원이 하는 말을 들으면 뭐 저런 놈이 다 있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혹시 이인국이나 이중생 혹은 윤직원 같은 놈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생원은 이인국들과 같은 인물은 아닙니다. 이들은 나라가 망한 상태에서 자기들 이익만 실컷 챙긴 자들이지만, 한생원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도 그렇고, 망한 뒤에도, 다시 찾은 뒤에도 계속 손해만 보는 딱한 사람입니다. 구한말에는 아버지가 고생 고생해서 구입한 논을 탐관오리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점에서는 윤직원과 비슷합니다. 물론 윤직원의 아버지는 고생 고생해서 땅을 구입한 사람은 아니긴 합니다만. 어쨌든 일제 시대에는 그나마 조금 남았던 논이 일본인 손에 넘어갔습니다. 해방 뒤에 그것을 다시 찾을 기대에 부풀었으나,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그 땅은 나라의 관리가 돼 버리고, 다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저런 푸념을 하는 것입니다.

해방이 된 조국을 생각하면서 `나라 없는 백성`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 한생원은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한생원처럼 어리석지만 그래도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았던 순박한 농민들이 나라가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를 등쳐먹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는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나라`라는 것은 무엇인지 역사를 통해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나라는 국가와 같은 말입니다. 나라가 순 우리말이라면 국가는 한자어입니다. 국가는 태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사의 모든 것이 그렇듯이 국가 역시 역사를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국가의 형성`이라는 단원이 있습니다. 그 단원의 개요를 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습니다.

청동기의 사용과 농사의 발달로 평등하였던 부족 사회는 무너지고, 사유 재산이 축적되고 계급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부와 권력을 가진 군장이 출현하여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국가를 이룩하였다.

이 설명에 따를 때 국가는 분명히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서 만든 것입니다. 지난 번에도 보았습니다만 청동기 시대 이후에 계급이 분화되면서 갖가지 불평등이 형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국가가 생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있어 봤자 해만 되고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한 한생원의 생각을 무조건 탓할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는 지배 계급만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국가는 계급 분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서 지배 계급을 위한 도구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동체의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를 말할 때 주로 국가라고 하고, 후자를 말할 때 주로 나라라고 하지요. 전자는 국가 기구의 의미가 강한데, 한생원이 말하는 나라는 바로 전자를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을 매국노라고 욕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애국심이라는 것이 국가 기구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온 공동체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는 단일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때의 나라를 민족과 별로 구별하지 않고 씁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는 민족과 꼭 같은 것은 아니지요.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국가 기구를 이용합니다. 그러면서 피지배층들에게 국가 기구에 대한 충성을 강요합니다. 한생원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가 일본인에게 넘긴 재산을 해방된 뒤에 나라가 관리했다고 하지만, 결국 권력과 밀착한 일부 부유한 사람들의 손에 헐값에 넘어갔습니다. 그러니 나라라는 것은 소수 특권층을 위한 도구의 구실을 한 것뿐이지요. 하지만 그 소수들이 또 우리의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고, 분단이 되게 한 자들이지요. 대다수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한생원 같은 어리석은 생각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인류의 역사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를 확대해 가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국가도 오랜 인류 역사를 통해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여지는 국가는 없습니다.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가를 움직일 때도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하는 것처럼 꾸밉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더 그 실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국가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갑니다.

하지만 국가가 계속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무리하게 움직여질 때 대다수 구성원들은 국가 기구에 대해서 저항을 하게 되고, 그것은 공동체에 대한 회의감마저 갖게 만듭니다. 그런 상황이 한생원처럼 나라를 저주하는 사태로까지 번진다면 그것은 정말 심각한 것이지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왜곡된 농산물 유통구조와 농정실패로 인해 구조적으로 농사짓는 사람만 거지가 되는 세상에 무엇을 믿고 농사를 짓겠어요. 재벌이나 은행에는 109조원이나 되는 공적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농민들이 부채 이야기만 꺼내면 폭력으로 막는 국가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이지요.

요즈음 이야기이지만 한생원 이야기와 별로 다를 바 없지요. 요즈음 농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기로 했던 전국농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서울 농민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오던 농민들은 트럭이나 버스 등을 몰며 전국의 고속도로와 국도 곳곳에서 상경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때 시위를 하던 농민 중 하나가 기자에게 한 말입니다.

나라는 정말 어머니와 같은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구성원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데는 일차적인 책임이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라를 움직이려 할 때 나라는 더 이상 그런 존재가 되지 못하지요. 그 다음의 책임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움직이는 나라라면 과감하게 그들에게 저항해야 합니다. 더 이상 그들의 손에 부와 권력이 쥐어 있지 않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와 나라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