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다룰 문제는 북한의 토지개혁과 노동법령 제정 등 제반 민주개혁에 관한 것입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남과 북에는 매우 판이한 정세가 조성됩니다. 북에서는 민주기지노선에 따라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고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이 추진되며 친일잔재가 철저히 청산됩니다. 이것은 혁명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정도의 천지개벽이었습니다.

반면, 남한에서는 탁치반대운동 과정에서 친일파가 부활하고 미군정의 좌익 탄압이 강화되면서 친일잔재 청산이나 농지개혁 등 민주적 개혁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됩니다. 때문에 남한 민중의 불만이 높아지고, 결국 10월에는 민중항쟁을 불러오고야 맙니다.

그러나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세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남과 북이 전연 무관했던 것은 아닙니다. 북에서 민주개혁이 진행되면서 그 체제에 적응할 수 없는 친일세력과 지주 등이 대거 월남했으며, 이들은 남한에서 반공전선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이것은 북한에서 진행된 민주개혁의 이면이며 그림자였습니다. 이제부터 이런 문제들을 몇 번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탁치 균열과 정세 변화

해방된 지 4개월 가량 지난 1945년 말, 한반도의 정치상황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는 모스크바 협정과 신탁통치 분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1945년 12월 말 미국·소련·영국의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 모여 한국(조선)임시정부수립과 5년간의 신탁통치를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협상안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모스크바 협정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반도는 심각한 소용돌이에 휩싸입니다. 모스크바 협정의 지지와 반대를 둘러싸고 남과 북, 좌와 우가 심각하게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모스크바 결정은 북한 내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북한 지역에서 공산당과 신민당(독립동맹이 변신), 직업동맹과 농민동맹을 비롯 대중 단체들은 모두 모스크바 협정에 지지를 보내지만, 조만식은 끝까지 반대합니다. 소련군과 김일성, 최용건 등의 설득에도 조만식이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자 조만식을 정치무대에서 퇴장시키고, 조선민주당을 개편합니다. 이로써 우익 민족주의세력은 정치권력에서 배제되고, 북조선공산당과 조선민주당으로 대표되는 북한에서의 좌우연합도 사실상 무너지게 됩니다.

남한의 우익세력은 신탁통치 반대투쟁을 위해 김구, 이승만을 중심으로 `비상국민회의`로 결집하였습니다. 이어 비상국민회의를 미군정과 이승만은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민주의원`(1946. 2. 14)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일부 중도 민족주의세력이 강력히 비난하였지만 그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또 1946년 6월 3일에는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추진할 것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독정부를 추진하게 됩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민족주의세력의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반면 소련과 김일성은 조만식을 제거함으로써 북한지역에서 반탁 움직임을 재빨리 제압하고,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선 미·소 공동위원회가 개최되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임시인민위원회(1946. 2. 8)를 조직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북한 지역에서 토지개혁과 제반 민주개혁에 들어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공산주의세력과 좌파의 역량을 조직적으로 결집하기 위해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독립동맹)의 합당을 추진하게 됩니다.
이로써 1946년이 지나면서 남과 북의 정세는 판이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북쪽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노동당이 탄생함으로써 당적 역할이 높아지게 되었으며, 임시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주역량을 결집해 민주개혁을 수행함으로써 일제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반탁운동을 통해 우익 세력이 결집되는 성과를 거두기는 했으나, 친일파가 부활하고 친일경찰이 반공경찰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친일잔재 청산에 엄청난 걸림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반공=애국`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게 되고, 이제 건국을 둘러싼 전선은 완전히 뒤죽박죽 엉클어지게 됩니다.

결국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민족 내부의 균열이 심화되면서 남북의 분단도 점점 굳어져 갑니다. 그런 점에서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반 사이 탁치 균열은 한반도 정세를 완전히 새롭게 뒤바꾸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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