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섭(화가 / ynano@hanmail.net)


▶[사진 제공 - 씨네 서울]
나는 솔직히 007영화 따위의 오락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007영화 중에서 극장에서 본 영화는 한 편도 없다. 그저 TV의 주말 영화를 꾸역꾸역 보거나 볼만한 신작비디오가 없을 때 심심풀이로 눈이 갔을 뿐이다. 그렇다고 화가답게 예술영화만 고집할 것 같지만 그건 전혀 아니다. `연필부인 흑심 품었네` 같은 살색영화부터 홍콩영화, SF영화, 일본 애니메이션 따위를 두루 섭렵하는 그야말로 영화광이다.

그런데 개봉 전부터 여기 저기에서 문제가 되었던 영화 `007어나더데이`를 보기 위해 심야 상영관을 찾고 있을 때는 머리가 복잡했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랍이나 베트콩, 구 소련의 테러리스트를 적으로 생각하고 만든 영화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왔는데, 북한을 세계 장악의 음모를 꾸미는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한 구체적인 영화라고 하니, 어떤 관점에서 봐야 할지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바로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서 같은 동포를 죽이는 영화를 봐야 한다니... 아무리 영화는 상상의 산물이고, 허구이며, 작가 마음이라고 하지만 말이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는 자본주의의 산물일까, 아니면 북한을 공격하기 위한 치밀한 사전포석일까?

한편에서는 007영화 안보기 운동을 전개한다고 하고, 어느 한쪽에서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일축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게 답답하다.

아무튼 영화이야기를 하자.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그저 멍함이었다. 머릿속에는 뭔가를 생각할만한 정보들이 하나도 없었다. 역시 엄청난 제작비를 쏟아 부은 헐리우드 액션영화답게 사람의 의식을 홀라당 빼먹는 위력이 있었다. 화려한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 웅장한 음악 따위는 역시 `돈 값을 한다`였다. 오락영화답지 않게 영화는 내내 무겁게 전개되었다. 약간의 농담이 있었지만 코믹액션은 없었다.(내가 너무 심각하게 영화를 봐서 그런가?) 이건 지금까지의 007영화와는 또 다른 불순한 의도가 감지된다. 이 얘기는 뒤에서 하자.

영화는 빠르게 전개된다.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북한의 강경파 문 대령과 자오는 서방의 스파이와 손잡고 최첨단 무기를 이용해 세계지배의 야욕을 불태우지만 결국 제임스 본드와 본드 걸의 활약으로 좌절된다는 헐리우드 특유의 권선징악, 해피엔딩의 구조를 가진 뻔한 내용이다. 아마 북한 대신 빈 라덴이나 구 소련의 KGB 따위가 등장했다면 별 생각없이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봤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보고 있다. 하나는 영화자체, 즉 문화적 코드이고, 또 하나는 정치적 코드이다. 물론 이 둘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딱딱한 정치를 문화는 부드럽고 달콤하게 만들어 전달한다. 문화는 정치를 등에 업고 부와 명예를 누린다. 이 공식은 자본주의 문화의 기본이다.

먼저, 이 영화는 불과 얼음으로 표현되는 극단적인 논리를 사용한다. 초반 타이틀화면은 제임스 본드가 고문을 당하는 장면과 불의 형상을 한 여성과 얼음의 형상을 한 여성이 등장한다. 불의 여성은 무섭게, 얼음의 여성은 신비하게 표현되어 전체 영화의 분위기와 줄거리를 상징한다. 따라서 불과 얼음이라는 매력적인 문화 요소를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대립구조, 즉 선과 악으로, 즉 북한은 악의 화신, 미국과 영국은 선의 화신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정교한 설정이다. 미국의 9.11 테러에서 비행기가 건물과 부딪히면서 폭발하는 장면은 사람들에게 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얼음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없다하더라도 사람들은 당연히 불의 반대를 물이나 얼음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영화는 계속해서 불의 이미지를 나쁘게 사용하고 있다. 태양 빛을 모아 인공위성으로 제임스 본드를 죽이려 하거나 얼음 궁전을 녹이거나 휴전선을 불태우고, 지뢰를 폭파시키는 장면 따위가 그것이다.

두 번째 문화코드는 유전자 변형이다. 북한의 문 대령과 자오는 유전자 변형을 이용한 성형수술을 받는다. 그 결과 문 대령은 서양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잠을 자지 못하는 병에 걸렸고, 자오는 수술 도중에 제임스 본드의 방해로 흉측한 얼굴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유전자 변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유전자 변형 식품이 몸에 해롭다고 알고 있고, 심지어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인간복제도 유전자 변형이라고 여긴다.

다시 말해 유전자 변형이 아닌 것은 종교적이며 도덕적이고, 유전자 변형은 돈벌이에 눈이 멀거나 사람들을 기형으로 만드는 종교도 없고, 비도덕적이라는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 영화는 사람들의 이런 부정적 인식을 교묘히 파고들어 북한을 비정상적이고 흉측한 괴물로 인식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북한을 응징하는 것에 대한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명분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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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문화적 상징이다. 과격한 문 대령의 아버지는 인자하고 온건적인 군인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행위를 막으려다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상당히 패륜적인 상징이다. 이 문화적 상징은 아버지를 죽이는 비정한 아들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당연히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는 암시가 담겨있다. 정치적으로는 아버지는 김일성, 아들은 김정일이라는 것으로 바꾸어 볼 수 있다.

네 번째는 최첨단 살상무기이다. 북한이 정말 그런 최첨단 무기를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뢰를 피해 갈 수 있는 이상한 탱크와 레이져 포, 인공위성을 이용한 무기 따위는 제임스 본드가 사용하는 총이나 간단한 특수무기(시계, 반지, 자동차)와 대립을 이룬다. 사람들의 의식에는 약자를 응원하는 문화적 심리가 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때 묘한 동질성을 느낀다는 것이다. 인어공주, 신데렐라 따위의 동화는 언제나 약자가 강자를 이긴다. 물론 실제로는 99% 강자가 이기지만 말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며 이라크를 공격하고 있는 미국의 당위성을 뒷받침해주는 상징이다. 북한도 몇 해 전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일이 있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대량살상 무기라는 영화적 발상은 이렇게 현실과 교묘히 연결되어 있다.

다섯 번째, 영화가 내내 심각하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제임스 본드는 스타일을 구겨가며 북한에 체포되어 장장 14개월 간이나 고문을 받고 거의 폐인이 된다. 또한 본국에서는 그의 실체를 부정하고 기밀누설죄를 씌운다. 그는 불명예스럽게 북한군 포로와 교환된다. 북한군 아버지와 아들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아들의 총에 죽는다. 북한군 테러리스트는 너무 강해 제임스 본드나 본드 걸은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야말로 우연에 의해 이길 뿐이다. 또한 주한미군은 오합지졸로 표현되고 있다. 오락영화가 이렇게 심각하면 별 재미가 없다. 어찌 보면 흥행에 참패할 수 있는 이런 심각성 요소를 왜 넣을 수밖에 없었느냐가 이 영화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다.

나이트클럽에서 술값과 쪽팔림 따위의 생각과 체면을 생각하면 놀 수가 없다. 화려한 액션과 사운드, 그리고 혼을 쏙 빼놓는 컴퓨터 그래픽의 효과는 관람하는 사람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마치 나이트클럽의 화려한 싸이키 조명과 귀를 때리는 사운드 같은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성이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다. 여기에 심각성이 들어가면 이성의 방해없이 감성적으로 내용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기본적인 예술의 원리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북한을 적으로 만들기 위해 이 영화는 다른 영화에서 사용하지 않는 종합세트를 다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 열거한 한가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악당으로 만들고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위에 언급한 네 가지 요소를 뒤섞고, 거기에 심각성까지 보탰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을 최대한 구겨지고 무기력하고 낮추어 약자의 모습으로 연출하면서까지 북한이 `악의 축`이라는 것을 발버둥치며 우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는 영화로 보자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다.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내 주제에 무슨 영화이야기냐고 거의 포기하려다가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성이 떨어진다. 예비군복이라든지, 농촌의 물소가 나오는 장면, 절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든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은 말이 많다. 그래서 영화의 수준이 떨어지지 않느냐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구체적인 리얼리티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이런 배경이나 소품의 사실성은 오히려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생각하게 만들뿐이다. 헐리우드에서 벌어먹고 사는 감독답게 군더기는 깔끔이 제거했다. 영화를 전개하는데 그저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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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런 사소한 사실성의 결여는 정치적이란 비판을 피해 갈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할 것이다. `봐라. 사실과 다르지 않느냐, 왜 영화를 영화로 보지 못하는 거냐?`라며 핀잔을 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낸다. 이 함정에 속으면 본질은 사라진다. 하지만 기분 나쁜 요소는 있다. 그것은 바로 배경과 소품에서 사실성이 필요하지 않아도 되는 정서적 이유 때문이다.

이 영화는 한국인만을 위해서 만들지 않았다. 아마 직배를 통해 전 세계에 상영했을 것이다. 서구인들의 눈에 북한(한국을 포함)은 그저 못살고 전쟁준비에 광분하는 그런 모습으로 인식되어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야구하는 박찬호가 북한 사람인지, 남한 사람인지 구분도 못할 뿐더러 관심도 없다. 노무현 당선자의 얼굴을 노태우 전대통령 사진으로 보도하는 것은 치명적인 실수가 아니라 그냥 흔한 실수일 뿐이다. 모른다는 것은 관심이 없다는 다른 표현이다. 죽든 말든, 전쟁이 나든 말든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배경이나 소품 따위를 가지고 시비를 걸 것 같은가.

이 영화는 부시가 대통령일 때 기획되고 만들어졌다. 부시의 대북정책과 이 영화가 무관하다고 보는 사람은 너무 순진한 것이다. 미국은 그야말로 다인종 국가이고 개인주의가 지배하는 나라이다. 이런 국가에서 애국심을 들먹인다는 것은 우습다. 하지만 미국인의 애국심은 대단하다고 한다. 나는 미국이 애국심 교육을 헐리우드 영화를 통해 하고 있다고 믿는다.

고대로부터 연극은 사람을 감동시키고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오죽했으면 서구의 위대한 철학자는 `연극이 가장 위대한 예술이다`라고 규정지었을까. 연극과 과학기술, 그리고 자본이 만나 영화를 만들어 냈다. 영화는 연극의 교양적 요소와 오락적 요소, 대중동원력 따위를 고루 갖추고 있는 장르이다. 영화는 사람들의 정서를 담아내기도 하지만 반대로 정서를 만들기도 한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반하는 행위를 하면서 돈과 명예를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리를 해야겠다. 007영화 안보기운동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 영화가 가진 본질을 정확히 알고 그 항의의 표시가 되었으면 한다. 단순히 안보기를 강요해서는 우리 국민을 초등학생으로 대상화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국민이 현명하다고 본다. 감성도 뛰어나고 민주적인 의식도 엄청나게 성숙했다. 네티즌의 진지한 문화가 있고, 민주적인 대통령도 뽑았다. 또한 효순이, 미선이 추모집회를 통해서도 그 힘을 확인한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국민밖에 없다. 평화를 사랑하고 한반도와 세계 모든 곳에서 전쟁과 살육을 막아내는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토론하고 설득하는 일이 남았다.

심야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한국 사람인 나는 잘 안다. 이 무표정이 무관심이 아니란 사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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