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석기 유적이 통일과 연관을 갖게 될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 통일시대는 모든 것을 통일의 눈으로 인식하고 통일의 몸으로 체험하며 그래서 통일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생각만 막연히 있었다.

외로움이란 이름의 위기

전곡리 유적이 갑자기 새롭게 다가왔던 것은 어떤 노동운동가의 얘기를 듣고 나서였다. 인천지역의 노동운동가였는데... 그는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결핵으로 죽을 지경이 되자 홀어머니에게 서울에 돈벌러 간다고 가방하나 둘러메고 집을 떠났다. 어머님은 울기만 하실 뿐 붙잡지 않았다. 돈벌러 가는 게 아니라 죽으러 가는 줄 알았지만 붙잡아도 어떻게 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선禪치료하는 사람을 만나 산 속에서 수양을 하면서 죽을 고비는 넘겼다. 그러고는 다시 산에서 내려와 가락시장에서 짐꾼을 하였다. 먹을게 없어서 시장에서 버려지는 생선을 주워서 구워 먹던 어느 날부터 살이 찌기 시작했다. 병세가 기적처럼 회복되는걸 느끼고 자신감을 얻어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서울대학에 입학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노동운동을 위해서 그렇게 했단다. 죽음을 이겨낸 생활력과, 자상한 성격, 명석한 두뇌는 그를 인천지역 노동운동의 지도자로 만들었다.

그를 얘기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온 위기에 대해 말하기 위함이다. 수배생활을 하며 어느 집에 피해 있을 때 후배 내외는 그가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모습을 보고 외로움을 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단다. 동구 사회주의 몰락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더란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고 시골 어딘가로 내려갔다는 소문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가 낙향한 가장 큰 이유를 말할 때 주변사람들은 외로움이라고 얘기하는데 이견이 없었다. 외로움. 외로움은 있어야 할 무엇이 없다고 생각하는 결핍이나 공백의 상태, 또는 지속되던 요구의 단절 상태이다. 그러나 쓸쓸함이나 심심함과는 달리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공백을 극복하려는 방향과 동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외로움이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이러한 동력이 포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위기이다. 낡은 것은 지나갔는데도 새로운 것이 도래하지 않은 상태. 전곡리 유적지의 초라한 마당에서 나는 이 외로움이란 이름의 위기에 대해 생각했다.

전곡리 유적지와 민족문화의 시원

▶[사진 출처 - 이시우 갤러리]
우선 전곡리 유적지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다. 전곡리의 유적지는 전곡역에서 남서방향으로 KBS중계소를 지나다보면 나타나는 대지이다. 한탄강 국민관광지에 약간 못 미쳐 왼쪽으로 전곡리 선사유적지라는 안내판이 보이지만 특별히 신경 쓰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전곡리 유적지는 안동 하회마을과 같은 물돌이 지형이다. 한탄강의 얕고 빠른 물살에 부딪치며 둥글게 마모된 자갈돌들은 이곳에 이르러 물돌이 안쪽의 안정되고 조용한 흐름에 의해 모래 속에 묻히게 된다.

1978년 4월 미군철수논쟁이 달아오르던 때 이곳에 놀러왔던 한 동두천 주둔 미군이었던 그레그 보웬은 이 자갈돌 중에서 모가 난 돌을 발견했다. 그는 고고학을 전공하다 입대한 사람이었다. 자갈돌이라면 당연히 둥글둥글하게 마모가 되어 있어야 할텐데 양쪽으로 날이 서 있었으니 고고학을 공부했던 그는 그것이 강물의 작품이 아니라 사람 손의 작품이란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그것이 주먹도끼와 박편도끼일 것이란 추정을 했다. 서둘러 돌을 프랑스 구석기문화의 권위자에게 보내 그것이 의심할 여지없는 아슐리안 문화의 석기라는 답변을 얻었다.

주로 규석 ·석영 ·사암 등의 석재(石材)로부터 일차적으로 큰 파편을 떼어낸 다음, 박편(剝片Flake: 석기제작 과정에서 원석에 타격을 가함으로써 떨어져 나온 부분을 가리키는데 타격에 의한 흔적, 즉 박편의 속성이 남아 있어 다른 석편들과 구분이 된다)의 양면을 주위로 돌아가면서 엇갈리게 타격을 가하여 작은 박편을 떼어내면서 알맹이만 남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이를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라고 부른다. 또한, 이 석기는 사용할 때 손에 쥐고 사용하기 때문에 주먹도끼라고도 부른다.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의 가장 특징적인 석기이다. 구석기의 초기형태로는 찍개를 들 수 있는데 구석기인들은 냇돌이나 돌덩이의 한쪽 면을 때려, 떼어서 날을 세운 찍개(chopper)와 양쪽면을 떼어서 날을 세운 찍개(chopping tool)를 썼지만, 이어서 손에 쥐기 좋도록 형태를 다듬은 주먹도끼로 발전시켰다.

주먹도끼를 형태상으로 분류하면, 시대에 따라 각각 특징적인 것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형태로는 아베빌리안형(Abbevillian形) ·창끌형 ·타원형 ·행인형(杏仁形) ·넙치형 ·미코키안형(Micoquian形) 등 20여 종류가 보고되어 있다. 석기 제작기술로는 아베빌리안과 아슐리안의 두 기(期)로 나뉜다. 이러한 주먹도끼는 짐승을 사냥하는 데는 물론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했고, 또한 땅을 파서 나무뿌리 등을 캐는 다목적용 석기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H.모비우스 교수는 주먹도끼가 주로 사용되는 전기 구석기시대를 주먹도끼 문화권과 자갈돌석기 문화권으로 구분하였다. 즉, 주먹도끼문화는 주로 아프리카·유럽·중근동·인도·자바 등 구대륙에서만 발견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와 중국·한국·일본 등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는 찍개로 대표되는 자갈돌석기문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레그 보웬의 발견으로 모비우스의 학설은 정면으로 도전 받게 되었으며, 고인류의 문화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면을 제시하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구석기공작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후 본격적으로 김원룡 박사팀을 시작으로 유적지 발굴이 시작되었고 한반도의 구석기 유물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발굴되었다. 현재까지 20여 군데의 발견 중에서 15개 이상이 한탄강과 임진강에 집중되어 있다.

연천에만도 장남면 원당리, 군남면 삼거리, 선곡리, 남계리, 왕징면 강서리, 중면 삼곶리 등에서 구석기 유물의 발견이 되었으니, 아직 결론이 나지 않은 한두 군데를 염두에 두면 15군데 중 그 반 정도를 연천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 강줄기를 구석기문화벨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바닥 안에 잡히는 이 작은 석기는 오늘날의 최첨단 컴퓨터보다도 인류의 진화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석기의 제작자들은 최초로 한탄강을 자연의 강이 아니라 인간의 강으로 만든 사람들이었다. 역사와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민족문화의 시원이라고 해도 좋을 구석기 문화에서 민족사상과 문화의 원리를 찾아봄으로서 통일시대 통일문화에 적용해볼 필요가 있다.

`결`의 미학

구석기유물에는 어떤 민족문화의 원리가 숨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결`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발굴당시 숙소로 쓰던 조립식 건물이 구석기 박물관의 전부여서 생각보다는 초라해 보였다. 연락을 하면 문을 열어준다는 친절한 안내판이 있었지만 나는 아무도 없는 그 `분위기`를 선택했다. 원래의 석기대신 돌깨기 체험 행사 때 쓰여진 듯한 앞마당의 돌 하나가 그럴듯해 조용히 앉아 지켜보았다. 좌절이나 외로움이란 이름의 위기로 헤어져야 했던 많은 동료들의 모습과 전기 구석기시대 전곡인들의 모습이 자꾸만 뒤엉켜 나는 앉았다 일어섰다, 돌다 멈추었다를 반복하며 한나절을 돌과 씨름하고 있었다.

한탄강에서 강자갈을 주워다가 냇가에서 주워온 냇돌을 망치 삼아 움켜쥐고 손이 다치지 않도록 부딪치기 위해 자기도 모르게 혓바닥으로 입을 훔치고 있는 순간의 신중한 전곡리 조상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이 그들에게서 일어났을 일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은 양식을 찾는 대신 돌을 찾았다. 연천 전곡리는 석영을, 파주 금파리는 규암을 주로 사용했다. 규암이 고운 결을 내며 떨어지는데 비해 석영은 박리면이 규암보다 거칠다. 돌의 발견은 사실 결의 발견이었고 결을 발견하자 자연의 돌은 `도구`라는 이름으로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아직 도구가 되기엔 험한 여정이 남았다. 결은 돌 속에 숨어 있는 것이었다. 어디를 봐도 빈틈이 없는 돌의 표면에서 어떻게 돌의 틈을 가르고 암흑에 갇혀 있는 결을 드러내게 할 것인가?

돌을 더 이상 깰 필요가 없는 현대인과 돌을 깬다고 해서 과연 얼마나 더 나아질까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한 구석기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치열하게 돌을 깨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요의 결여만큼이나 확신의 결여는 사물을 강렬하게 바꾸지 못한다. 전곡리에서 출토된 석기와 석기를 만들고 난 부스러기인 박편 석핵을 보면 2번 이상 타격을 가한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만큼 우연적이고 즉시적이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애매모호함과 투박함이 유물의 초기성을 증명한다. 확신의 결여에서 확신의 충만으로 변화하기까지의 긴장이 서려 있어 이들 투박한 박편들에 오히려 더 애정이 간다. 돌과 돌을 강력하게 충돌시키지 않으면 돌의 결은 드러나지 않는다. 돌로서 돌을 깬다. 이것은 현대소립자물리학에서 소립자로서 소립자를 충돌시켜 새로운 입자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돌속의 숨어 있는 결을 인식하고 돌로서 돌을 깨어 그 결을 끄집어내는 행위는 지금까지 혼돈일 뿐이었던 자연에서 질서와 구조를 깨닫는 법칙의 발견이었다. 법칙은 필연적으로 연관이다. 중국의 뇌봉이 한 말중에 혁명은 빈틈없는 나무에 못을 박는 것과 같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현실이라도 사람의 힘을 집중을 하면 틈을 내고 의지를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틈새하나 없는 돌이라도 사람의 손으로 부딪쳐 깨면 돌의 틈이 갈라지고 필연적으로 결이 나타난다는 확신, 법칙은 인간에게 확신을 주었다. 그리고 자연 스스로만이 만들어내던 돌의 결을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한 진보였다.

이러한 진보를 끌어낸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과거의 심상을 기억할 수 있게 하고, 그 결과로 미래의 상을 예견할 수 있게 한다. 상상이 전망적인 미래를 향하면 이상이 된다. 상상은 추동력을 주지만 이상은 거기에 덧붙여 확신을 준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시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확장된 시간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는 여유를 찾아낸 것이다. 자신을 발견함으로서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세계를 발견했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질서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세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상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이를 통해 인간의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법칙과 확신은 외로움을 낳았다. 법칙은 있는 현실과 있어야할 현실을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있어야할 현실이 있는 현실이 되는 순간, 있는 현실은 있었던 현실이 되었다. 있어야 할 현실에는 미래라는 이름을, 있었던 현실에는 과거라는 이름을 달 수 있게 되었다. 항상 현실이 확신대로 법칙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혼돈의 과거는 갔는데 법칙의 미래는 오지 않았을 때 위기가 도래한다. 이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미래는 건설될 수 없는 것이다.

전곡인들의 위기 극복

어떻게 그 위기가 극복될 수 있었는가? 석기가 자연 스스로의 발명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이란 점에서 석기의 연구는 인간의 연구와 만나게 된다. 돌 다음으로 손에 대해서 탐구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손은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섬세함 때문에도 주목되지만 언어능력과도 연관되어 연구가 되고 있다. 바늘에다 실을 꿰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혓바닥이 돌아가는 것을 발견한다. 손의 신경과 혀의 신경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손을 세련되게 사용할수록 혀의 근육도 섬세해지고 훨씬 다양한 신호와 분절음을 낼 수 있는 능력이 증대한다. 비약적인 소통능력의 진보가 손작업을 통해 준비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로부터의 진정한 혁명적인 변화는 생존만을 위한 일차적인 신호체계를 극복했다는 점이다. 동물은 독백을 대화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독백을 방백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때문에 동물은 소통은 가능하나 반성이나 성찰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의 전곡인은 고민하고 실험하며 세계를 자기 식으로 탐구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탐구는 혼자서 진행하는 토론이자 대화이기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배고플 땐 먹어야 한다는 오직 한가지만의 반응보다 훨씬 효과적인 대안을 만들어 낸다. 때로 개미굴이나 벌집의 정교한 건축이 사람의 그것보다 낫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그러나 개미나 벌은 몇 천년 동안 똑같은 건축만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동물의 언어는 주어진 자극에 주어진 신호만으로 반응한다는 점에서 경직되고 폐쇄된 것이지만, 사람의 언어는 열려있다. 폐쇄되어 있더라도 일시적으로만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내적 성찰과 실험을 통하여 끝없이 외적 언어를 확장한다.

만일 전곡인들이 아프리카 상고안(sangoan)에서 발견되어 아슐리안계 석기제작법이라고 불리는 문화를 배웠다고 가정한다면 (최근 연구는 중국문화 주류론으로 기우는 추세이나 어쨌든 전파론적 입장은 마찬가지다) 전곡인들은 몇 가지 문제에 부닥치게 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다각면원구형이라고 불리는 석기에 기록된 흔적이 그러하다. 자갈을 원석으로 사용하여 둥근 모양으로 박편을 떼어 나갔으므로 석기표면에 박편이 떨어져 나간 면으로 많은 각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손에 쥐고 이를 던져서 짐승을 사냥하는데 쓸 수도 있고 고기, 뼈 또는 나무 같은 것을 짓이기는 데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곡유적에는 박편을 내려는 흔적은 있으나 박편을 내지는 못한, 그래서 구별이 힘든 다각면원구형 석기들이 있다. 이것은 차돌의 단단한 재질 특성 때문에 오는 한계이다.

한국상고사학보 10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전곡인이 만든 석기중 일부만 그(아슐리안계)와 유사한 것이 남아 있을 뿐 대부분은 `비정형과 즉시성의 석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석기에 대한 연구에서 석기제작과정에서 버려지는 박편과 석핵(石核 Core : 석기제작과정에서 운석에 타격을 가함으로서 박편을 떼어내고 남은 움푹 패인 부분을 말하는데 몸돌이라고도 한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다른 문화권의 분류개념으로는 포함되지 않는 독특한 양식이 발견되고 있다.

1997년 유용욱에 의한 한탄강 유역의 전곡리와 임진강유역의 주월리, 가월리 유적 출토의 주먹도끼에 대한 비교연구가 있었는데 주먹도끼의 세장도(細長 가늘고 긺) 인장도에 나타나는 형태적인 차이는 제작 집단간의 주먹도끼 형태에 대한 인식차이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조적이고 폐쇄된 문화보다는 모호하지만 창조적인 문화를 가꾸어 낸 것이다.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소통능력 때문에 스스로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창조성이 발휘된 것이다.

그렇다면 전곡인이 그들에게 닥친 위기를 극복하는데 작용한 다른 요소는 또 없었을까? 이상의 내면화가 필요했다. 설령 누군가 석기문화를 전해주었다 해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내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때 그것은 결코 전수되지 못한다.

직접 먹이를 채집하는 대신 석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원당리나 삼곶리 등으로 전파되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것을 만드는 방법과 작업을 고민했거나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직접 채집보다는 애매 모호한 문화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러한 고민의 내면화과정을 포기했다면 전곡인은 단지 소통이 단절 될 뿐 아니라, 사유능력 자체가 상실되었을 것이다. (1964년 제이콥슨은 자신의 문법을 잃어버린 일종의 실어증 환자가 그의 내면적 언어마저 상실한다는 결론을 보고하고 있다.) 새로운 석기혁명이 일어나고 있어도 비슷한 문제를 고민하거나 예감해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항상 보는 강가의 돌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이 도구문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형식적인 신호가 계속되지 않아 당황하고 있는 동물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애매 모호한 희망` 같은 것들이 `논리나 원칙` 같은 외적 언어로 전이되어야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란 점이다. 1944년 타르스키는 모호한 내적 언어로부터 직접 완결된 외적 언어를 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호한 내적 언어도 내적 언어 자체와 조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사람을 사람이게 한 결정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천년이상 미륵사상이 소통될 수 있었던 것은 경전이나 논리보다도 언젠가는 도래할 이상세계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던 것과 같이 전곡인들의 석기혁명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엔 투박하지만 먼 시간 뒤에 실현될 이상이 있어 가능했던 것이다. 이상의 내면화와 그를 통한 내적 언어의 소통이 결국 석기문화의 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전곡인이 발견한 것

가혹한 시련과 위기를 딛고 일어선 전곡인이 스스로 고민했고 발견했던 핵심은 무엇인가?
석기는 우연히 깨어진 돌조각이 아니라 인간진화의 총체적 혁명을 가능케 한 발명이다. 혁명의 이상을 형성할 문화가 있었기에 석기는 탄생한 것이다. 그들에게 돌의 결은 자연의 결이자 사회적 상상력의 결이었으며, 문명의 결이었다. 돌의 결로부터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의 진화가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 주인공은 자기를 해석할 수 있게 된 전곡인이었다. 자연은 생활의 조건이 되었고, 시간은 역사가 되었으며, 생활의 결과는 문명이 되었다.

사람의 이상은 그 실체인 `결`을 발견함으로서 더욱 확고한 것이 되었다.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할 돌의 결을 발견하자 이것은 어디에도 적용되게 되었다. 바람결, 물결, 살결, 숨결 등 이전에는 혼돈이었을 뿐인 자연과 세계가 `결`로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의 미학은 민족문화의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문득 한비자의 말이 일리 있다.

이(理)란 이미 이루어진 사물의 결(文)이다. -해로(解老)편-

결의 미학을 통일의 결을 발견하는데도 적용해보자. 돌의 결을 발견하는 과정만큼이나 통일의 결을 발견하는 과정도 쉬운 일은 아니다. 통일운동이 관성의 늪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서로간의 소통이 단절되고 계속 자기 얘기만을 되풀이하는 반복이 서로를 지치게 했다. 만성적 위기는 많은 사람을 외로움의 이름으로 이탈되게 했다.

전곡리인들의 석기제작에서 발견되는 문화적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전곡리식 석기라는 새로운 문화가 창조되기 위해서 법칙을 발견하고, 상상력으로 미래의 이상을 예견하며 자기반성과 내적 언어를 통해 열렬히 소통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애매모호했던 서로의 의사는 소통됐고 그를 통해 혼돈자체인 자연과도 소통됐다. 자연의 결이 발견된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무후무한 역사적 실험인 통일의 과정도 이와 같으리라. 언젠가는 통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른 곳에서 석기가 발명된 것을 알 듯이 다른 나라의 통일을 보고 세계의 변화를 보며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만으로는 통일이 되지 않는다. 세상은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것에 의해 바뀌고 좋아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에 의해 더 많이 바뀐다. 현실의 결핍에도 불구하고 좋아하고 즐기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상상력의 부족과 결핍은 현실을 미래로 전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과거로 퇴행시킨다.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서해교전이 나자 "그럼 그렇지" 하며 과거의 기준으로 쉽게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통일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곡리인들도 석기를 만들다 안되면 포기하고 눈에 보이는 먹이만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상상력을 잃지 않았다.

상상이 전망적인 미래를 향하면 이상이 된다. 이상은 빛이 아니라 어둠을 향한 도전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어둠에서 길을 찾아가는 방법이 `결`이다. 이상을 실현할 결을 발견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반성의 능력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반성은 자신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자신의 내면의 언어가 충만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세계에 소통하기 위해 손을 뻗는다.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했다.

1999년 서해교전 이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북의 인민군의 사열을 받게 될 것을 누가 상상했겠는가? 어떤 언어와 논리도 정리되지 않았지만 통일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기에 두 지도자가 만날 수 있었다. 타르스키가 지적한 인간만의 능력이다. 남북정상회담이 보여준 정신을 따라 통일의 결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통일과 평화의 결을 발견하라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가 중면 삼곶리 면사무소 근처의 모래단구에 이르면 신석기시대로부터 초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생활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이는 대형 적석총이 발견되어 한 지점에 깊은 역사적 지층이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진강으로 내려가면 백학면 학곡리의 작은 지류천인 신지강 주변에서도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에 이르는 집단 취락지가 발견된다. 이외에 청동기유적으로 상리초등학교 옆 농경지에서 마제석촉이 발견되고, 북방식 고인돌이 연천읍 협신정미소 창고에서, 통현리 수복식당 뒤뜰에서, 은대 3리 신양농원 안에서, 전곡댐 부근 신답리 아우라지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 중 몇몇은 초등학생들의 제보로 발견된 것들이다. 연천지역의 초등학교에 지뢰예방교육을 다니다가 안 사실인데 어린이들이 강가에서 더 많이 발견하는 것이 유물보다 지뢰라는 사실을 듣고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토록 찬란한 석기문화 제작자들의 이상은 더 이상 강처럼 흐르지 못하고, 분단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가?

돌의 결을 발견했던 전곡인처럼, 통일과 평화의 결을 발견하라고 강변하듯 한탄강은 오늘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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