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봉(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남이랑북이랑 더불어살기위한 통일운동 대표)


미국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지금까지 거의 70번이나 다른 나라들을 군사적으로 침략하거나 폭격했다. 반세기가 넘도록 해마다 한 두 차례 총질을 해댄 셈이니 동서고금을 통틀어 미국만큼 전쟁을 즐기는 나라는 찾지 못할 것이다. 1970년대까지의 사례는 옛날 얘기로 돌리자. 1980년대 레이건은 그레나다, 레바논, 리비아, 엘살바도르, 니카라구아, 이란을; 부쉬 1세는 파나마와 이라크를; 1990년대 클린턴은 이라크, 소말리아, 보스니아, 수단, 아프가니스탄, 유고슬라비아를; 그리고 2000년대 부쉬 2세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진짜 이유

미국은 최첨단 과학을 이용해 레이져 광선으로 유도하는 "영리한 폭탄 (smart bomb)"을 "정밀한 미사일 (precision missile)"에 실어 군사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춤으로써 민간인들의 살상을 줄인다지만, 멍청하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는 일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1998년 아프가니스탄이 폭격당할 때 파키스탄도 덤으로 미사일을 맞았고, 1999년 유고가 폭격당할 때는 불가리아와 마케도니아가 날벼락을 맞았다. 이렇게 의도되었든 아니든, 군인들이든 민간인들이든,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미국의 침략에 무려 1200만의 목숨이 사라져갔다.
 
이도 모자라 미국은 이라크에 대해 또 다시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요즘은 이른바 "비행 금지 구역"을 중심으로 공습을 더 세게 더 자주 하면서 심리전과 정치 공작을 겸하는 한편 카타르에 새로운 군사 지휘 본부를 세우고 있다니 이미 전쟁을 시작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바그다드에 미군 정권을 세워 이라크를 통치한다는 계획까지 마련해놓은 모양이다. 지금 유엔 무기 사찰단이 이라크에 들어가 있지만, 미국은 사찰 행위가 방해를 받거나 다른 무슨 꼬투리가 생기기만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국제 사회가 반대해도 기어코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겠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부쉬 행정부는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 테러 지원, 독재와 인권 탄압, 유엔 결의안 무시 등 크게 4가지 이유를 꼽고 있지만 모두 타당성도 없고 설득력도 없다.

첫째,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관해:  미국처럼 핵무기와 미사일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많이 배치해놓고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가진 5대 강국도 대량 살상 무기를 맘대로 개발해왔다. 불공평하지만 국제 정치의 현실이니 모르는 체 하자. 그러나 이스라엘과 인도 그리고 파키스탄은 이러한 무기를 가져도 되는데 이라크나 이란 또는 북한이 가지면 안된다는 것은 무슨 논리인가. 국제 관계는 힘에 의해 지배되니 논리는 제껴놓고, 어쨌든 미국이 가장 미워하는 이라크와 이란 그리고 북한은 무조건 가질 수 없다고 치자. 여기서도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정보들에 따르면, 북한은 핵무기를 적어도 1-2개 가지고 있고 장거리 미사일도 가지고 있는데 반하여, 이라크는 아무리 빨라도 5년 안에는 핵무기와 장거리 미사일을 가질 수 없을 것이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는 평화적 해결을 강조하며 이라크는 기어코 침공해야겠다니 수상하지 않은가.
 
둘째, 테러 지원에 관해:  2001년 9ㆍ11이 일어날 때까지 미국만큼 테러를 많이 지원했던 나라는 없다. 지금까지 수십개 이상의 외국 정부를 전복하고, 수십명 이상의 외국 지도자들을 암살하는데 앞장서거나 뒤에서 조종했다. 세계 제1의 테러리스트로 떠오른 오사마 빈 라덴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사실은 잘 알려진 얘기다. 1998년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에서 "테러리스트들에게 지원금도 주지말고 은신처도 제공하지 말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세계의 웬만한 독재자들과 범죄자들은 여전히 하와이를 피신처로 삼았고 각종 테러리스트들은 플로리다를 은신처로 삼아오지 않았는가. 지나간 1990년대의 일은 잊어버릴 수도 있다. 9ㆍ11의 배후 주범으로 알려진 빈 라덴과 직접 가담자 19명중 16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다. 그런데 사우디 아라비아에 대한 폭격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서, 9ㆍ11과 관련이 없는 이라크를 침공해야 한다고 날뛰는 것은 말도 안된다.
 
셋째, 독재와 인권 탄압에 관해:  지금까지 미국처럼 독재 정권을 많이 지원한 나라는 없다. 박정희와 전두환 같이 반공만 외치면 군사 쿠데타도 미국의 지원을 받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독재 정권에 대항해 일어난 수십개의 민주화 데모가 미국의 도움에 의해 반공의 이름으로 무참히 짓밟혔다. 독재와 인권 탄압에 대한 미국의 지지에 관해 기막힌 얘기 한 가지만 소개한다. 백인 정권의 지독한 차별에 대항해 흑인 해방 운동을 벌이다 1962년부터 30년 가까운 옥살이 끝에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고 1994년 남아프리카 대통령으로 당선됐던 넬슨 만델라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게다. 그는 1962년 미국 CIA의 "정보 협조"로 남아프리카 경찰에 붙잡혀 그 기나긴 감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1990년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미국 대통령은 CIA 국장을 지낸 부쉬 1세였다. 부쉬는 만델라에게 전화를 걸어 모든 미국인들을 대신해 석방 축하 인사를 건넸고, 몇 달 뒤 그를 백악관에 초청했다. 그런데 부쉬가 만델라를 만나면 사과할 것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백악관 대변인이 한 말은 "그것은 케네디 행정부 때 일어난 일인데 날 괴롭히지 마라"였다. 미국의 위선과 뻔뻔함이 드러난 대목이었다. 이에 비하면 일본은 과거의 식민 통치에 대해 조금이나마 사죄할 줄 안다고 할까. 만델라 때문에 얘기가 좀 빗나갔는데 이 또한 옛날 일로 돌리자. 요즘 이라크보다 결코 민주적이랄 수 없는 사우디 아라비아, 쿠웨이트, 파키스탄 등에게는 무기도 팔고 경제 지원도 해주면서 이라크의 민주화를 위해 사담 후세인을 치겠다는 것은 소가 웃을 짓거리다.
 
넷째, 유엔 결의안 무시에 관해:  유엔 역사상 미국만큼 유엔 결의안을 지키지 않은 나라는 없다. 국제 관계에서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엔을 무시하고 단독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대외 정책에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나라 역시 미국 밖에 없다. 미국은 지금까지 유엔 총회에서 인권, 평화, 경제 정의, 핵무기 감축, 인종 차별 철폐 등의 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줄기차게 반대해 왔다. 대개 100개 이상의 나라가 찬성할 때 미국은 대부분 유일하게 또는 이스라엘이나 영국과 함께 반대표를 던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유엔 결의안의 찬성-반대 투표 결과가 1년 평균 10차례 이상 120:1로 나오는데 여기서 반대 1표는 자칭 "인권과 평화와 정의의 수호신" 미국이었단 말이다. 한편 요즘처럼 형식적으로나마 유엔의 지지가 필요할 때는, 과거 베트남,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유고슬라비아 등에 대한 침공을 준비하면서 그랬듯, "뇌물, 위협, 속임수" 등으로 찬성표를 모은다. 이러면서 사담 후세인이 유엔 결의안을 지키지 않아 이라크를 침공하겠다는 것은 역겨운 억지다.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이익만 있을 뿐
 
그러면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몰아내고 이라크를 점령해서 군사 정권을 세우려는 진짜 속셈은 무엇일까. 석유 확보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요즘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려는 것을 지켜보며 두 가지 속담 또는 교훈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국제 관계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으며 영원한 국가 이익만 있을 뿐이다"는 국제 정치학의 명언이요, 다른 하나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 그러나 석유는 피보다 진하다"는 국제 석유 산업계의 격언이다.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국이 되고 오늘의 우방이 내일의 적국이 되는 냉혹한 현실과 피로 맺어진 동맹 (혈맹: 血盟) 관계조차 석유가 개입되면 하루아침에 원수로 변하는 기막힌 사실이 겹치기 때문이다.
 
이라크는 1980년대 말까지 미국의 우방이었다. 특히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란과 전쟁을 벌일 때는 와싱턴으로부터 온갖 지원을 받았다. 이란 역시 1970년대 말까지 미국의 우방이었는데, 와싱턴의 지지와 사랑을 받던 부패한 팔레비 왕정이 1979년 혁명에 의해 무너지면서 미국과 이란은 원수 사이로 변했고, 1980년 사담 후세인이 테헤란의 혁명 세력에게 전쟁을 벌이자 미국은 이라크를 도와준 것이다.
 
1980년대에 와싱턴의 위정자들이 후세인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보여주는 믿기 어려운 얘기 몇 토막 소개한다. 물론 그들은 그가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해온 잔인한 폭한 (murderous thug)이었고,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 이라크와의 전쟁 준비에 가장 열성적인 국방부장관 럼스펠드가 1983년 레이건 대통령의 특사로 바그다드를 방문해 후세인과 데이트를 즐겼는데, 그 이후 미국은 이라크에게 이란군의 배치 상황을 보여주는 위성 사진들을 포함한 군사 정보 및 각종 무기들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미국이 생화학 무기를 만드는 데 쓰이는 몇 가지 세균까지 무수하게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이라크군이 이란군에게 생화학 무기를 사용하자 1986년 당시 유엔 사무총장은 이라크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지만 미국은 모른 체 했다. 그리고 1988년 후세인이 쿠르드 반군에게도 생화학 무기를 쓰는 바람에 민주당 의원들이 문제를 삼자 레이건 행정부는 이란을 먼저 비난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한편 1987년 미국은 이라크 석유를 이란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구축함 (USS Stark)을 페르시아만에 보냈는데, 이게 그만 이라크의 미사일을 맞고 불타면서 미군 37명이 죽고 말았다. 후세인은 즉시 "실수"라며 사과했고, 미국은 "믿기지 않을 만큼" 너그럽게 양해했다. 이라크 석유는 수십명 미군들의 피보다 귀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이 사건을 이용해 이란이 전쟁을 확대한다고 비난하며, 엉뚱하게 이란의 유조선들을 폭파하고 초계정들을 공격했다. 나아가 1988년에는 미군함이 이란의 여객기를 "실수로" 쏘아뜨려 290명의 민간인들을 죽이자, 공포에 질린 이란은 몇 주만에 이라크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렇듯 1980년대에 후세인이 와싱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요인은 두 가지다. 이란이 미국의 적이었기 때문에 이라크는 원수의 원수로서 친구가 된 게 하나요, 세계 제2위인 이라크의 석유 매장량이 미국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던 게 다른 하나다. 그런데 바로 이 두 가지 요인 때문에 후세인은 1990년 이후 지금까지 미국 제1의 적으로 변해버렸으니 이를 두고 세상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 할까.
 
1988년 이라크-이란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거물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이라크와 각종 계약을 맺기 위해 바그다드를 찾았다. 전쟁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엄청난 피해를 겪은 터여서 전후 복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 미국 경제인들이 내걸었던 투자 조건의 하나가 이라크 석유 산업의 민영화였다. 그러나 나라 경제가 어렵다고 석유 산업을 미국 회사들에게 헐값으로 넘길 수는 없어서 후세인은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는데, 즉시 미국의 보복이 뒤따랐다. 이라크에게 수십억 달러를 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1990년부터 이라크의 석유 수출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사주를 받은 쿠웨이트가 석유 수출국 기구 (OPEC)의 합의를 깨고 석유 수출을 갑자기 늘린 것이다. 석유 값이 떨어져 큰 손해를 보게 된 이라크를 비롯한 석유 수출국들이 쿠웨이트의 배반을 비난했지만 쿠웨이트는 꿈쩍하지 않았고, 그들의 협상 제안마저 거부했다.
 
한편 후세인은 1990년 7월 바그다드 주재 미국 대사와 비밀 회담을 가졌는데, 여기서 미국 대사는 이라크와 쿠웨이트 사이의 석유 분쟁이 미국과 관계없다며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도 미국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참고로 이 대목은 1950년 1월 국부부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을 밝히면서 한반도를 넣지 않음으로써, 남한에 무슨 일이 생겨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주어 북한의 남침을 어느 정도 유도했던 사실과 비슷하다. 아무튼 이런 일들이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로 쳐들어가게 된 배경이요, 나아가 1991년 1월 미국이 이라크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시작한 구실이다.
 
이렇듯 후세인은 석유 산업을 미국의 회사들에게 넘기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증오를 받게 되었는데, 1990년 후세인이 이스라엘을 불태워버리겠다고 큰소리친 것도 이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미국의 원수 (이란)의 원수로서 친구가 됐지만, 1990년대에는 친구 (이스라엘)의 원수로서 이중 원수가 됐다고 할까. 이와 관련하여 미국이 북한을 침공하는 데는 근처의 남한과 일본이 반대하지만, 이라크를 침공하는 데는 근처의 이스라엘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북한과 이라크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석유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더러운 밀약
 
그러면 미국과 영국은 왜 줄기차게 이라크를 침공하려 하고 러시아와 프랑스는 왜 이에 반대할까. 역시 석유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좋아하고 러시아와 프랑스는 평화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라크 석유를 가운데 놓고 서로 갈등을 벌여온 것이다.
 
먼저 이라크 석유에 대한 부쉬 행정부의 관심은 작년에 발표된 [체니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체니 부통령은 석유 회사의 최고 경영자를 지낸 사람으로 미국의 에너지 정책을 종합적으로 다듬었는데, 그 보고서는 "에너지 안보를 무역 정책과 대외 정책의 최우선 사항으로 삼을 것"을 권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현재 석유 생산은 30년전에 비해 39%나 줄었지만 앞으로 20년간 석유 소비는 33%나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 아래 장기 전략에 따른 석유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군사 작전을 포함해 이라크에 대해 즉각적인 정책 검토를 수행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참고로 체니 부통령만 석유 회사의 중역 출신이 아니라, 부쉬 대통령은 석유 회사 사장을 지냈고, 라이스 국가 안보 보좌관은 석유 회사 이사를 지냈다. 아울러 지금 부쉬 행정부의 최고위 관리 100명이 석유 산업에 개인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액수가 1억 5천만 달러다. 부쉬 행정부가 석유 회사들과 얼마나 끈끈하게 얽혀 있으며 왜 그토록 이라크와의 전쟁에 집착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세계에서 석유가 가장 많이 묻혀 있는 나라는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라크지만, 석유를 가장 많이 수출하는 나라는 아직 미국이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매장량은 약 2640억 배럴, 이라크의 매장량은 약 1120억 배럴, 미국의 매장량은 약 220억 배럴로 알려져 있는데, 세계에서 석유를 가장 많이 쓰는 나라 역시 미국으로 현재 석유 소비량의 약 60%을 수입하고 있다. 한편 30년 전에는 미국계 석유 회사들이 세계 석유 시장을 거의 독점했지만 이제는 약 20% 수준으로 떨어졌다. 미국 석유 회사들의 돈벌이에 빨간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는 뜻인데, 이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후세인을 몰아내는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30여년간 지속되어온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혈맹 관계가 9ㆍ11을 계기로 크게 껄끄러워지고 있어서, 미국은 이 거대한 석유 생산 국가를 대신할 수 있는 나라를 찾고 싶어한다. "자유와 평화"를 외치며 개신교를 국교로 삼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미국과 지독한 왕정 독재를 펴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지지하고 팔레스타인 해방에 찬성하는 사우디 아라비아 사이에 동맹 관계가 맺어진 자체가 원래 부적절한 관계였는데, 석유가 피보다 진했을 뿐이다. 그러나 국제 관계에서 영원한 친구는 없는 법. 빈 라덴을 포함한 알 카에다 지도부와 9ㆍ11 가담자 대부분이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으로 밝혀진데다 사우디 왕실에서 이들에게 재정 지원까지 했다는 정보가 나오자 미국 위정자들이 사우디 아라비아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줄기차게 편파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해온 미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있는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사우디 아라비아 쪽에서도 미국과의 밀월 관계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듯하다.
 
둘째, 후세인이 지난 1990년대부터 러시아, 프랑스, 중국 등의 석유 회사들과 유전 개발 계약을 맺고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라크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석유 매장량을 갖고 있지만, 기술과 장비 부족으로 땅 속에 묻혀 있는 석유를 제대로 퍼올리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퍼올린 석유를 유엔의 경제 제재 때문에 제대로 팔지도 못하고 있다. 식량 구입을 위해 연간 120억 달러 정도를 수출하거나, 국경을 접하고 있는 시리아, 요르단, 터키 등을 통해 밀수출로 푼돈 정도 벌어들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유엔의 경제 제재 때문에 선진국들이 이라크의 석유 개발에 착수할 수는 없어도 계약 경쟁은 치열하게 이루어져 왔는데 지금까지 가장 앞선 나라가 러시아다. 예를 들어, 러시아의 한 석유 회사는 1997년 35억 달러 짜리 유전 개발 계약을 따냈으며, 6-7개의 다른 석유 회사들도 좀 더 적은 규모의 유전 개발 계약을 맺었다. 1970년대부터 이라크와 친선 관계를 유지해온 프랑스도 많은 계약을 맺었으며 지금도 새로운 계약을 협상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지난 10여년 동안 옆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던 미국의 석유 회사들은 얼마나 속이 쓰라렸겠는가. 유엔 사찰단이 이라크에서 대량 살상 무기를 찾든 못찾든 미국은 후세인을 몰아내고 군정을 실시하거나 미국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정권을 세워야 하는 배경이다. 이와 반대로 후세인 정권이 엎어지면 지금까지의 계약은 무효로 되고 기술과 장비가 앞선 미국의 석유 회사들이 이라크 유전 개발을 싹쓸이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러시아와 프랑스는 후세인이 고우나 미우나 지켜줘야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난 달 이라크에 대한 유엔 결의를 앞두고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흥정이 맺어졌다. 1990년 아버지 부쉬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할 때는 붕괴의 위기에 처한 소련에게 온갖 정치 경제 지원을 약속하고 고르바쵸프의 지지를 끌어냈듯이, 2002년 아들 부쉬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는 러시아가 이라크에 갖고 있는 이익을 지켜준다는 보장으로 푸틴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렇듯 치사하고 더러운 밀약을 두고 양국 외교관들은 "신사 협정 (gentleman`s agreement)"이 맺어졌다고 발표했다.
 
남한에서 요즘 권력의 단맛만을 좇아 이 당 저 당 옮겨 다니면서도 얼굴을 붉히기는커녕 기자 회견을 자청해 정치 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한 구국의 결단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벌레 같은 정치인들의 역겨운 말을 비웃듯, 자유와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짐승 같은 강대국 위정자들의 위선과 속임수에 조금이라도 빠져들지 말기 바란다. (이 글은 [남이랑북이랑] 12월호에 게재된 것을 다소 손질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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