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얼마 전 홍콩에 놀러간 미군이 지나가는 여인의 둔부를 어루만지다가 경찰에 끌려갔다. 그는 미국 법이 자기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는데 미국당국은 미국군인도 홍콩에서는 홍콩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밝혔다. 그 미군은 결국 홍콩 법에 따라 벌금을 물고야 풀려났다. 일본에서는 며칠 전에 미군 장교에 의한 필리핀여인 성폭행 미수사건이 있었는데 미군당국은 일본경찰의 수사에 성의껏 협조하고 있다한다. 

한국에서는 지난 6월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목숨을 잃었다. 시민단체들의 들끓는 규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함구로 일관해 왔다. 사건 발생 6개월 후 미국의 군사재판은 공무집행 중이고 과실이 없었다며 가해자인 두 병사들의 무죄를 평결했다. 이에 대해 법무장관은 오히려 미군 측 입장을 두둔했다. 그러나 격렬한 반미시위가 확산되자 좀 정신이 들었는지 대선 주자들도 눈치껏 몇 마디씩 항의하기 시작했고 대통령도 주둔군지위협정, 약칭 "소파"를 개선(개정이 아닌)하는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한다.

반미시위자들은 두 병사의 처벌, 그들의 상사에 대한 책임추궁, 미국대통령의 직접 사과 및 불평등한 "소파"의 개정 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홍콩이나 일본에서 현지의 법을 존중할 줄 아는 미국이 왜 한국에서는 한국 법을 우습게 여기고 미군이 한국인을 죽여도 미국 법으로 대수롭지 않게 다루느냐에 대해 그들은 보다 심각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미국의 책임도 따져야겠지만 한국인들 자신에게는 과연 아무 잘못이 없었는가하는 것도 자성해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은 소위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불평등조약으로 미국의 군사적 지배하에 묶여있다. 한국의 국민들과 지도자들은 이러한 대미예속관계를 한국이란 나라의 목숨 줄이라고 믿고 있다. 그런 판국에 "소파"협정만 고친다고 과연 미군이 한국인을 대등한 상대로 대접해 주겠는가? 또 한국 정부에게 과연 미국과 맞서서 "소파"협정을 대등하게 고칠 능력이 있겠는가? 아니 한국은 왜 북한을 자기 힘만으로는 못 당하고 꼭 미군을 자기 땅에 상전으로 모셔놓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정녕 미군이 없으면 저이들끼리 평화롭게 살아갈 능력이 없는 민족이란 말인가? 이런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보다 심각한 반성과 자괴(自愧)가 없이는, 한국 땅 안에서 한국인이 스스로 2등 국민 대우를 감수해야하는 모순을 타파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지금 확산되고 있는 한국의 반미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6.25전쟁 때 미군이 아니었으면 한국은 멸망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그들이 한국의 구세주라고 자부하고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은 아니지만 한국인들 자신이 지난 50년 동안 필요이상으로 그 점을 강조하여 미국인들의 콧대를 그토록 높여주었으니 이에 대해 한국사람들은 할말이 있을 수 없다.

미국인들은 또 지금 한국인들이 반미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도 미군의 희생을 바탕으로 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6.25전쟁이래 줄곧 40년 동안 국민의 자유를 억누른 역대 독재정권을 미국이 지지해온 사실에 대해 미국인들은 애써 외면하려한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그나마 누리고 있는 시민적 자유는 4.19로 시작해서 5.17 및 6.29로 이어지는 학생과 시민들의 친미독재정권을 상대로 한 끈질긴 민주화투쟁의 결실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모른다. 한국인들 자신이 미국인들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6.25 전쟁 후 50년이 지난 지금도 북한이 두려우니 미군은 제발 나가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정당한 반미시위에 대해서도 그러다가 미군이 나가면 어떻게 하느냐며 곱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지금도 대통령과 정치 지도자들(일부 대선주자 포함)은 "나라의 안보를 위해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은 절대 안된다고 말한다. 그러니 훈련 중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미군을 한국법으로 심판하여 처벌하겠다는 것은 당치도 않는 요구라고 미국인들은 생각한다. 미국인들은 또 인구도 적고 경제도 빈약한 북한을 아직도 자력으로 당해내지 못하는 한국인들의 무능을 비웃는다. 겉으로는 우방이라고 추켜세우면서 속으로는 세계최강의 미군이 그런 줏대 없는 나라의 법정에 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미국의 심리이다. 

그런 즉 이번 두 여학생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은 제1차적으로 물론 미국측에게 물어야 되겠지만, 6.25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주국방태세를 이룩하지 못하고 미군에게 안보를 의지하고 있는 한국인들 자신의 무능에 대한 깊은 자성이 있어야 한다. 북한이 무슨 미국이나 러시아 혹은 중국 같은 큰 나라인가? 아니면 거기 사는 사람들이 남한사람보다 체격이 더 크거나 지능이 더 월등한 괴물이라도 되는가? 북한은 인구도 남한의 절반밖에 안 되며 경제력도 남한의 몇십 분의 1밖에 안 된다. 남한 단독의 힘으로 북한을 못 당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구나 남한에서는 1961년 5월부터 1993년 2월까지 장장 32년 동안 애국심과 책임감을 목숨보다 중히 여긴다는 군인들이 정치, 외교, 군사 및 경제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었다. 그들이 내건 대의명분은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하고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군부는 아직도 북한이 두려워 미군이 나가면 안 된다고 한다.

이것은 그 동안 군인들이 정치를 도맡아 하면서 뭔가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했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그렇다면 한국의 군부는 의당 자주국방태세를 이루지 못한 직무태만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군부는 저들이 잘못해서 그리됐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한다. 굴욕적인 불평등조약을 배경으로 오만과 횡포를 자행하는 미군으로 인해 자국민이 당하는 고통과 수모에 대한 책임의식이 전혀 없다. 그러면서도 남북간의 화해를 도모하는 것은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을 "주적"이라 부르며 자극하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미군은 지역안보를 위해서 통일 후에도 계속 주둔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 궁색한 궤변이다. 그런 이유로 미군이 필요하다면 불평등한 한미방위조약은 이를 폐기하고 지역안보의 혜택을 받는 주변제국과 공동으로 비용과 불편을 분담하면서 대등한 자격으로 미군주둔을 "허락"하는 체제를 모색해야 마땅할 것인데, 그런 구상이나 노력은 전혀 없다.
  
또 미군이 나가면 경제가 흔들리니까 안 된다는 고식적인 사고도 있다. 미군이 당장 무조건 나가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자주국방태세가 확립되고 미군이 나가면 남북간의 화해와 군축이 뒤따르게 되고 한반도의 긴장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어 경제환경은 오히려 더 좋아질 수 있다.

한국의 국민과 군부는 주권국가의 첫째 요건인 자주국방의 긍지와 자존심을 저버리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있다. 국민이나 군부나 모두 지금이라도 그 동안 이토록 일을 그르쳐 놓은 책임자들을 가려내서 엄벌에 처하고 시급히 자주국방태세를 확립해야 한다는 의식이 전혀 없다. 대선주자들 중에도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선거 때마다 숭미사대(崇美事大)를 표방하는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주인 노릇 하는 제대로 된 나라, "나라다운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현상이다.

반미구호를 아무리 소리 높이 외쳐도 미국은 끄떡도 안 한다. 군인들이 30년 이상 독재정치를 하고도 북한군을 자력으로 막을 힘을 기르지 못한 나라, 그래도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는 나라, 그리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외국군대의 영구주둔을 바라고 있는 나라, 이런 나라 사람들이 부르짖는 반미구호에 미국은 코웃음을 친다.

이런 근본문제를 바로잡지 않는 한 얼마 후에는 또 다른 효순과 미선이가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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