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활 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김대중 대통령은 11월 27일 싱가폴에서 한반도평화를 위한 남.북.미.중간 4자회담의 재개를 바란다고 언명했다. 그는 특히 4자회담에서 남북한 군축문제를 제기할 뜻을 강력히 비추었다 한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평화협정은 남북간에 체결하고 그것을 미국과 중국이 보장하는 소위 2+2 형식을 바라고 있으며, 주한미군은 한반도와 동북아지역의 평화를 위해 통일 후에도 계속 주둔하게 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대통령의 이러한 구상은 그럴듯하게 들리나 세밀히 분석해 보면 적지 않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김 대통령의 2+2 구상은 논리적 모순

남북간의 군축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가 한 나라 한 민족인 남북이 본의 아니게 분단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끝에,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150만의 병력이 엄청난 파괴력으로 중무장한 채 대치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 많은 병력과 장비를 유지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느라고 남이나 북이나 편한 잠을 잘 수 없고 뼈빠지게 일해도 살림은 항상 쪼들리고 있는 형편이다. 남북간에 적대감을 거두고 과감한 군축을 할 수 있다면 남북 모두의 살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이라는 것은 굳이 까다로운 통계숫자나 어려운 경제이론을 빌리지 않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남북이 모두 이와 같이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는 것은 한반도가 아직 전쟁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물론 남북간의 싸움으로 시작되었지만 미국을 위시한 유엔 16개국과 중국이 가세함으로써 총 19개국이 참전하였다. 3년 후 중국과 북한, 그리고 유엔 16개국을 대표한 미국의 3자가 휴전협정에 서명했는데 그때 한국은 휴전에 반대하면서 서명을 거부했다. 그후 미군을 제외한 유엔 15개국 군과 중국군은 철군했으므로 지금 한반도에 남아있는 군대는 북한군과 미군, 그리고 미군통제하에 있는 한국군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평화협정을 남북간에 체결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치에 어긋난다. 첫째, 한반도의 평화는 한국의 휴전당사자들이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 순리인데 서울정부는 휴전체제의 당사자가 아니다.

둘째,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적이었으며 아직도 적으로 남아 있는 미국을 제외하고 남북간의 합의만으로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수는 없으며, 그러한 협정은 체결되었다 하더라도 실효를 거둘 수가 없다.

셋째, 남북간의 관계는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니라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관계이며, 따라서 국가간의 합의형식인 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것이 남북사이에 지켜온 원칙이다.

넷째, 남북간에는 이미 1991년 12월 13일 합의한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있으며, 또 92년 9월 17일에 맺은 남북 불가침의 이행과 준수를 위한 부속합의서가 있으므로, 이러한 기존합의를 재확인하고 실천하면 되는 것이지 별도의 평화조약이나 협정을 체결할 필요가 없다.

북한에서는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문제는 휴전협정의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간에 해결할 문제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의 역대정권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 해결원칙을 내세우면서 평화협정도 남북간에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것이 불합리한 주장임은 이미 지적한 대로이다. 그런데 남북문제의 합리적 해결을 표방하면서 북한의 대미관계 개선을 지원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는 김대중 정권도, 북한이 대미관계개선의 제1차적 과업으로 삼고 있는 북.미간 평화협정체결을 반대하면서 남북간 평화협정체결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북-미 평화협정체결을 남한이 돕는다면 한반도평화는 앞당겨질 것

서울정부가 한반도문제의 남북간 해결구도를 주장하는 뜻은 수긍이 간다. 그러나 한국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무기한 이양하고, 또 주한미군을 통일 후에도 계속 붙들어 두어야겠다는 것을 기본입장으로 삼고 있는 한, 한국이 바라는 당사자 해결구도에는 그만한 제약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북한으로서는 주한미군과 관계되는 문제는 아무리 한반도에서 생기는 문제라 할지라도 한국을 상대로 해결할 수는 없으며 미국을 상대로 협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제한된 성격의 남북간 당사자해결 구도는 지난 6월 정상회담의 결과로 이미 실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휴전협정을 대체하기 위한 평화협정을 북한과 미국간에 체결하도록 남한이 협력해 준다는 입장을 취한다면, 한반도의 평화는 훨씬 앞당겨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또 남.북.미 3자를 다 포함하는 군축논의도 그때 가서야 가능해 질 것이다. 그리고 남북간 기본합의서의 이행에도 비로소 시동이 걸릴 것이다. 그렇게 한다해서 한국의 체면이나 위상에 별 손상이 가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해타산 면에서 보더라도 평화체제의 조속한 확립과 실질적인 군축이 가능케 되어 남북 공히 발 쭉 뻗고 자면서 아울러 경제적 부담도 현저히 줄이는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4자회담도 좋고 군축도 좋고 2+2 방식도 다 좋다. 그러나 듣기만 좋은 구상은 소용없다.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구상을 내놓아야 한다. 남북간의 협상이 결실을 보려면 당사자들이 합리적이며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한다. 상대방을 속이려 거나 억지를 관철시키려는 자세로는 결실을 볼 수 없다. 지난 50년간의 남북관계가 그렇지 못해서 답보를 거듭해 왔다. 자기측 입장도 세워야겠지만 상대방 입장에도 서보고, 그 토대 위에서 앙쪽의 입장이 다 살 수 있는 길을 합리적으로 모색하는 진지한 자세로 협상해서 긍정적인 성과를 올리는 묘미를 남북 양쪽의 지도자들은 터득하여야 할 것이다.



<이활웅 자유기고가 약력 designtimesp=5367>

1925년 간도 용정에서 태어나 함경북도 나진시에서 성장했음
1946년 월남(越南)
1950년-55년 육군정훈장교로 종군(從軍)
1956년-71년 외무부 근무
1972년 미국에 이주
1983년부터 코리언 스트릿 저널 지 등 미주 교포 언론에 통일문제 위주로 자유기고 활동
1991년 이후 LA Times 외 Nautilus Institute 등 웹사이트에 영문기고
1994년-95년 미국 "통일마당"(통일문제 연구단체) 회장
1997년-99년 `Korea 2000` 연구원
2000년(4-8월) 민족통신에 `주간 논평`을 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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