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그럴 때만이 가치가 있다. 신파조로 말하자면 관(棺)속에까지 갖고 가야 할 비밀이 있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말아야 할 약속이 있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지켜지는 약속은 별로 없다. 특히 이해관계가 첨예한 정치적 사안이나 외교적 문제일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역설적으로 기록이 깨지기 위해 존재하듯 약속 역시 깨질 것을 알면서 맺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근 `북미기본합의서` 파기여부를 둘러싼 북미간의 공방을 보면 더욱 그렇다.

◆ 1994년 이른바 `북핵위기` 때 북한과 미국이 제네바에서 합의한 기본합의서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 강석주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방북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에게 말했듯이 `실 끝에 달린 상태`(hanging by a thread)와 같다. `손대면 톡하고` 떨어질 것만 같은 상태다. 그런데 놀라운 건 북미 어느 쪽도 먼저 손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쌍방은 지리한 책임공방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 북한은 공식적으로 기본합의서 파기선언을 한 적은 없다. 다만 북한은 미국이 기본합의서 이행문제에 대해 `이미 말할 자격을 상실한지 오래`라고 하면서도 그를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 역시 아직까지 `공식적으로는` 파기선언을 하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사실상` 기본합의서 파기에 해당하는 대북 중유지원 중단결정을 내렸으면서도 공식적인 파기선언을 꺼리고 있다. 켈리 차관보는 19일 "그(기본합의서 파기에 관한) 문제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쌍방 모두 94년에 약속(합의)하지 않으면 안될 부담이 있었듯이 지금도 약속이 깨지면 받을 부담이 크다는 뜻이다.

◆ 이처럼 기본합의서가 파기의 와중에 있는 참에 북한은 미국에 대해 새로운 약속을 요구하고 나섰다. 불가침 조약 체결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레그의 말처럼 "북한은 진심으로 미국으로부터 공격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부시 미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북한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부시의 대북 성명을 두고 불가침 조약은 아니더라도 `불가침 성명`은 된다느니 또는 `정신적인(moral equivalent) 불가침 조약`은 된다는 견해도 있다.

◆ 그런데 역사적으로 봐도 깨지지 않은 불가침 조약은 없는 듯하다. 그래도 북한은 요구한다. 언젠가 휴지조각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말보다는 문서가 낫다는 것이리라. 깨질 듯 깨질 듯 하면서도 생명을 이어가는 기본합의서처럼 말이다. 물론 문서보다 더 중요한 건 신의(信義)다. 그러나 양국은 아직 신의 단계는 아닌 것 같다. `우리를 공격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불가침 조약을 맺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라는 북한측의 공박에 `우리는 이제까지 그 어느 나라와도 불가침 조약을 맺은 적이 없다`는 미국측의 변명은 아무래도 군색하다. 따라서 미국은 깨질 때 깨지더라도 북한의 문서상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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