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활웅(재미 통일문제 자유기고가)


3일간의 평양방문 결과를 설명해 준다고 10월 6일 서울에 들른 제임스 켈리 미 대통령특사는 북한이 핵 계획 진행을 시인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일이 지난 16일, 미국정부는 돌연 북한이 켈리 특사에게 핵 계획의 존재를 실토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미국의 선창으로 한미일 3국 정상은 26일 멕시코에서 공동성명으로 북한이 핵계획을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즉각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은 또 중국, 러시아 및 기타 제국도 북에 정치적, 경제적 압력을 가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북미 제네바 합의는 두 가지 흥정의 산물

이에 대해 북한외무성은 25일,  미국은 대북 적대정책을 계속 강화함으로써 제네바 기본합의를 이미 어겼다고 지적한 후, 미국의 가중되는 핵 압살 위협에 대처하여 자주권과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는 물론 그 보다 더 한 것도 가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켈리에게 명백히 말해주었다고 밝혔다. 북한은 이어서 미국이 북한의 자주권을 인정하고 불가침을 확약하고 경제발전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협상으로 해결할 용의가 있다고 덧붙였다. 또 31일과 11월 1일에는 북한의 주러시아대사와 주중대사가 각각 미국과의 불가침조약 없이는 핵계획의 폐기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북한은 또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협상제의를 단호히 일축하고 핵 포기 없이는 아무 협상도 없다고 받아넘겼다. 핵개발 포기의 약속을 어긴 북한을 이라크처럼 무력으로 치느냐 아니면 경제봉쇄로 묶느냐를 놓고 미국 내에서는 연일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반도에는 새로운 위기가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핵문제를 직접 따져보고 서울에 돌아온 정세현 통일부 장관은 23일, 미국이 북측의 이야기를 거두절미한 것 같다며 미국측 주장의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그후에도 대북 경제제재까지 할 필요는 없으며 문제를 대화로 평화롭게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국의 현직 장관이 이런 중대사에 관한 미국의 공식 주장에 토를 단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핵무기의 존재가 한반도 평화에 해가 됨은 물론이다. 그런 뜻에서 북한이 핵 계획을 가지고 있다면 이는 결코 찬성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아직 의혹이나 추정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지만, 미국은 공인된 세계최대 핵 보유국으로 지난 50년간 계속 핵무기로 북한에 겁을 주고 있다. 그런즉 한반도의 핵위기는 따지고 보면 미국의 대북 핵위협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의 대북 핵 위협문제는 제쳐놓고 북의 핵 문제만을 따져서는 한반도의 긴장을 말끔히 해소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는 북이 핵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경수로 2기를 지어주는 약속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잘못된 이해이다. 제네바 합의는 요약해서 두 가지 흥정으로 성립돼 있다. 첫째 흥정은 북이 (핵 무기제조에 사용되는 플루토늄 추출이 가능한) 중수로 건설을 중단하는 대가로 미국의 책임 하에 북에게 경수로(2기)를 지어주며 그 공백기간에 중유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흥정은 북이 핵무기를 만들지 않고 국제적 핵 의무를 지키는 대신에 미국은 북에 대해 핵 위협을 하지 안는다는 보장을 해주고 경제제재를 해제하고 외교관계를 진전시킨다는 것이다.

이 약속에 따라 북은 중수로 건설을 중단했으며 사용된 연료봉 8천개는 미국 기술자들에 의하여 벌써 해체되고 봉인되었다. 그러나 미국이 2003년까지 완공하기로 약속한 경수로 공사는 현재 겨우 25%가 진행된 상태이다. 또 미국은 아직도 북에 대한 핵 위협 철폐의 보장을 안 해주고 있다. 3개월 내에 풀기로 한 경제제재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더욱이 부시 정권에 들어와서는 북을 "악의 축"에 속하는 나라로 낙인찍고 핵 선제공격 대상국으로 지명하고 있다.

제네바의 약속을 북한만이 위반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억지

이런 상황에서는 북한의 핵계획의 존재가 설사 사실이라 할지라도 제네바의 약속을 북한만이 일방적으로 위반했다는 미국의 주장은 분명히 억지이다. 약속을 어기기는 미국도 매일반이었다. 또한 자국의 주무장관의 정세인식보다는 미국관료의 보고내용에 따라서 미국과 일본의 논리를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사태의 책임을 오직 북한에게만 추궁하고 있는 한국정부의 자세는 공정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북한과 미국은 94년의 합의문서를 만들고 어쩌면 서로 상대방의 협정이행의지를 믿지 못하는 어정쩡한 마음으로 서명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북은 눈에 보이는 중수로 건설은 중단했지만, 미국이 약속한 정치적, 경제적 조치를 이행하지 않으니까 은밀한 방법으로 핵 계획을 추진해 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미국도 북이 숨은 핵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자기 측 의무이행을 지연 또는 보류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북미간에는 그간 경수로건설 외에도 유해송환문제나 미사일문제 등으로 접촉과 협상이 계속되어 그 과정에서 쌍방간에 점차로 어느 정도의 신뢰가 쌓여져서, 마침내 2000년 10월 12일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과 조명록 북한특사 사이에 양국관계를 대결에서 화해로, 전쟁상태에서 평화상태로 전환한다는 획기적인 공동 발표문이 채택되었다. 이는 반세기에 걸친 한반도에서의 북미간 군사대결구도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다는 양측의 정치적 결단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3개월 후에 들어선 부시 대통령의 공화당 정부는 이 모든 것을 근본부터 뒤집어엎어 버렸다. 그리고 대북 강경정책의 톤을 마구 높여갔다.

도대체 부시의 생각은 무엇일까? 왜 그는 제네바의 기본 합의와 양국간 공동발표문의 약속을 깨버렸을까? 그는 왜 지난 10년간 꾸준히 화해의 손을 내밀어온 북한을 밑도 끝도 없이 "악의 축"에 속하는 나라로 낙인찍고 핵 선제공격 대상 국으로 지목했을까? 외교사절로 갔다는 부시의 특사 켈리는 평양에서 왜 그렇게 "오만무례"하게 행동했을까? 또 지금 북은 핵개발 포기와 미국의 불가침확약을 맞바꾸자고 하는데 왜 미국은 그것을 못하겠다는 것일까? 부시는 한미일 3국의 멕시코 공동성명에서, 지난 2월 서울에서 북한을 침공할 의사가 없다고 한 그의 발언을 재확인했는데, 그렇다면 왜 북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은 못하겠다는 것일까? 미국은 북이 검증가능한 방법으로 당장 핵개발을 포기해야 협상에 응하겠다는 데, 핵개발 검증은 적어도 수년을 요한다는 것이 근래의 미국의 주장이니, 그렇다면 북이 설사 핵개발 폐기를 즉각 선언하더라도 앞으로 수년간은 대북협상은 없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이러고도 한반도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이 평화란 말인가?

남한이 미국의 대리인이 되어 북에 압력을 가하는 자세를 버려야

미국은 지금은 북한 핵 문제를 외교적으로, 평화적으로 다루겠다고 한다. 그래서 남북대화와 북일 회담을 미국을 대신해서 북한에 핵 포기압력을 가하는 경로로 이용하기로 했다. 이는 또한 한국과 일본의 대북 접근을 견제하는 동시에 북한 문제가 대 이라크 전쟁수행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또 미국이 머지않아 최 신예무기로 이라크를 맹타하는 광경을 목격하면 북한도 겁을 먹고 수그러들 것이라는 계산과, 내년 2월에는 보다 숭미사대적(崇美事大的) 정권이 서울에 들어설 것이라는 정세분석도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정책은 매파들이 좌우한다. 미국의 매파들 중에는 푸에블로호 사건(68년), EC-121기 사건(69년) 및 판문점 "도끼만행"사건(76년) 등을 아직도 잊지 않고, 그때 북한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언젠가는 설욕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사들이 적지 않다. 그러므로 미국이 이라크를 친 다음에도 북한이 말 안 들으면 부시를 필두로 한 매파들은 북에 대해 최신무력으로 가차없는 철퇴를 가할 호기가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한국전이 재발되면 북한은 물론 남한까지도 또다시 전란의 끔찍한 참화를 면할 길이 없게 되어 6.25전쟁 때보다 더 큰 피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 군사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미국은 결국 북한을 칠 생각일는지 모른다. 8년 전 미국 지도자들은 대북 무력사용을 심사숙고 끝에 단념했지만, 지금 부시행정부의 매파 인사들은 막강한 무력으로 세계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많은 유권자들은 이런 지도자들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 공격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낙관론도 있다. 그러나 요행을 믿고 편한 잠을 잘 수 없는 것이 국제관계이다. 그리니 전쟁의 가능성은 아무리 희박하더라도 이를 소홀히 넘기지 말고 미리부터 철저히 막는 것이 신중하고 현명한 일일 것이다.

미국의 대북 공격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서는 한국정부가 미국의 대리인이 되어 북에 압력을 가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핵 문제를 둘러 싼 북미간의 시비에 있어서 한국은 북에서 원하는 남북공조까지는 설령 못할지라도 적어도 불편(不偏)의 공정한 입장은 취해야 한다. 북한에게 핵 계획의 포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려면 미국에게도 북한에 대한 무력공격 계획의 철폐를 똑 같이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부시의 한반도에서의 전쟁의지를 사전에 꺾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민족과 우리 강토를 새로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확실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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