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욱(연합뉴스 기자)


제임스 켈리 미국 특사가 평양을 다녀온 지 열흘이 넘은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의 `북 핵 개발 시인` 발표로 불거진 소위 핵 파문이 서서히 마무리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북한이 먼저 핵 개발 프로그램을 포기하기 전에는 미국은 결코 대화에 나서지 않을 것임을 연일 강조하고는 있지만 이미 속으로는 대북 관계 개선의 길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대담한 접근법`은 `북미 불가침조약`과 관련된 것

미국 대통령 부시가 지난 27일 멕시코 로스카보스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때 한-미-일 3국 정상회담에서 "북미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대담한 접근법`(bold approach)을 취할 수도 있다"고 밝힌 것이다.

미국의 대담한 접근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고 대체로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 정도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런 정도의 조치를 `대담하다`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통상 `bold`라는 표현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조치로서 상궤를 벗어나는 획기적 움직임을 설명하는 말로 미국이 수없이 되풀이해 온 `경제 지원`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아무래도 미국의 `대담한 접근법`은 바로 10월25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담화`를 통해 정식 제안한 `북미 불가침조약`과 관련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통칭 1차 `북핵 위기`라고 부르는 1993년 한반도 위기 당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양국간 대치 상황을 해소하고 양국간 평화의 틀인 1994년 제네바합의를 가능케 했던 것이 바로 이 `대담한 접근`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 미국은 북측의 중거리탄도미사일 시험발사(5.29) 직후인 6월2일부터 서둘러 북한과 1단계 고위급회담을 시작했고 세 차례 중단 위기를 넘긴 끝에 11일 북미공동성명에 서명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단계 고위급회담 직후인 1993년 6월12일 북측 수석대표인 강석주(姜錫柱) 외교부 제1부부장(현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측 대표인 로버트 갈루치 당시 미 국무부 정치군사담당차관보에게 경수로형 원자로 교체를 전격 제의하면서 이를 "새롭고 대담한 제의(new and bold proposal)"라고 표현했다.

이로부터 한 달 뒤인 같은 해 7월 양측은 제네바에서 회담을 갖고 경수로 교체에 사실상 합의했으며 이 합의가 바로 지난 8년간 불완전하나마 양국간 평화를 담보해 온 `제네바합의`의 요체였다.

미국이 영변 핵 원자로를 폐기하라는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폐기할테니 경수로 2기를 지어라"고 요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대담무쌍한 제안이었다.

북측의 이런 `대담한 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대담한 접근법`을 구사함으로써 양국 관계는 전쟁의 위기를 넘기고 평화적 관계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석주가 켈리에게 `대담한 접근`을 요구했을 듯

`2차 핵 위기`라고 불러야 할 이번 사태를 초월해 미국이 연일 강조하는 `평화적 해법`을 통해 양국 현안을 풀 수 있는 것은 경수로 건설, 즉 제네바 합의에 버금가는 `대담한 제안`이 아니고서는 풀기 어렵다.

최근 미국이 `대담한 접근`이란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네들이 `북 핵 개발 재개`를 발표한(17일) 뒤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북측이 제임스 켈리 특사의 평양 방문때 제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1993년 갈루치와의 담판을 통해 핵 위기를 넘긴 강석주가 이번에는 켈리 특사를 맞아 미국에게 `대담한 접근`을 요구했으며 이를 통해 `북 핵 문제`를 일괄타결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켈리가 무슨 증거를 들이밀고 강석주가 이에 발끈해 "그래 우리 핵무기 있다"고 맞섰다는 미국의 주장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시가 APEC 정상회의에서 여러 차례 `기회`(opportunity)를 강조한 사실에 비춰보면 미국은 이미 켈리 특사를 통해 전달된, 그리고 북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25일)를 통해 거듭 확인된, `북미 불가침조약`에 다가서기 위한 나름대로의 복안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북측의 모종의 제안을 미국이 `대담하게` 수용하면서 대북관계 개선의 구도를 마련했거나 마련하고 있다고 봐야 하며 현재 눈에 보이는 미국의 대북 핵 포기 압력에 대한 요구나 주장은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양국은 이미 `제네바합의 이후`에 대해 모종의 공감대를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이 켈리 방북 이후 거의 9일만에 `북 핵 개발 시인`을 나발불면서 `제네바합의 파기`를 주장하고 또 북한은 이런 미국의 행태를 역시 9일간 관망한 뒤 미국의 제네바 파기 주장에 대해 `적반하장`임을 강조하면서 `불가침 조약`을 거듭 촉구한 것이다.

이번 `불가침조약` 제의가 평화협정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일각에서는 평화협정 주장을 철회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단 이번 제의는 북미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로 봐야 할 것이다.

`불가침조약` 제의는 평화협정으로 가기 위한 중간 단계

1974년 3월2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미 의회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평화협정에 도달하기 위해 쌍방이 "서로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고 직접적 무력충돌의 모든 위험성을 제거할 것"을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쌍방은 서로 상대방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란 부분이 바로 25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이 제의한 `불가침 협정`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최고인민회의 `결정`은 모두 4가지 항목으로 돼 있으며 첫째가 불가침이고 둘째가 무력증강 중지이며 셋째가 바로 주한미군 철수이고 넷째는 외국 군대 완전 철수 이후 단계로 `평화협정` 국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치들을 전제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국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회담을 진행한다"는 것이 당시 북측의 의도였다.

최근 6.15선언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기반을 넓히는데 주력해 온 북한은 곧 유엔을 주한미군 철수와 통일의 무대로 활용할 공산이 커 보인다.

1974년 북미평화협정 제안 이듬해인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서 주한미군 철수안이 가결됐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다.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가 동남아 테러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동남아 각국과 정책을 조율한 뒤 평양에 간 것은 나름대로 미국의 동남아 전략에 따른 것이었지만 켈리 방북은 결국 북미관계의 획기적 변화의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

강석주의 놀라운 외교술에 대한 찬사가 절로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마음 한 구석에 켕기는 것이 없지 않다. 상대가 다름 아닌 미국인만큼 북-미 불가침조약 또는 평화협정의 길이 얼마나 순탄할지는 더 두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최고조에 이르러 자칫 `철수` 결의안이 채택될 상황에 이른 1976년 느닷없이 `8.18 도끼 사건`이 발생해 미군 철수 논의에 찬물을 끼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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