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완영 [(주)아이엠알아이 회장]

대북투자 붐이 일고 있는 가운데 평양에 PC 모니터 생산회사를 차려 성공한 아이엠알아이의 투자 모델은 기업들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가 비용을 줄이고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유완영 회장으로부터 대북투자 컨설팅과 제조업을 병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그 나름의 노하우를 들어보았다.

아이엠알아이의 유완영 대표는 서른여덟살의 청년사업가다. 그는 지난 2년여 동안 평양을 15차례 넘게 드나들었다. 회사 기술진은 20차례나 북한을 오갔다. 정상회담 이후인 지난 7월 중순 다시 평양을 방문한 그는 국내에서는 방북이 가장 자유스러운 기업인으로 손꼽힌다.

평양 시내 한복판인 대동강구역에 자리잡은 평양전자제품개발회사. 이 회사는 북한 내에서 유일한 PC모니터 생산 회사다. 1998년부터 모니터 핵심장치인 인쇄회로기판(PCB) 생산라인을 가동해오다 8월부터는 본격적으로 17인치 PC모니터 완제품을 생산할 예정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모니터는 ‘메이드 인 평양’ 생산지 표시와 함께 ‘V-zone’이라는 상표로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몽골로도 수출될 예정이다. 북한내 내수시장을 노려 평양 시내에 직판장을 개설할 구상도 있다.

그동안 평양공장의 PCB 생산물량은 연중 6만개 분량. 한달 평균 5,000개의 PCB가 북한 남포항에서 컨테이너 선박에 선적돼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아이엠알아이는 이를 상주공장에서 조립해 완성품을 생산한다.
유회장은 특히 지난 6월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도 북한측 요청으로 당초 벤처기업인으로는 유일하게 방북 경제인 명단에 포함됐으나 막판에 교체돼 그 배경을 놓고 궁금증을 낳기도 했던 주인공. 또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일정중에는 본래 아이엠알아이가 투자한 공장 시찰 계획도 세워졌으나 막판에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이 회사는 국내 업체들 가운데서는 대북투자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힌다.
우선 아이엠알아이가 북한에 투자를 결정하게 된 과정부터 더듬어 보자.

그는 좀 가혹하게 말한다면 본래 ‘실패한’ 사업가였다. 1980년대말 20대의 젊은 나이로 소련에서 보드카를 수입해 팔다 파산한 아픈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유통업체만이 가능했던 주류 수입에 손댔다 부도를 냈으니 사업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결국 그 사업 실패로 은행으로부터는 한동안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혔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지난 1996년 대북투자 컨설팅업과 98년 모니터 제조업에 뛰어들면서 확실한 명예회복을 일구어냈다.

미국에 투자컨설팅 설립하면서 평양 방문 기회 얻어

─ 애당초 대북투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1990년 사업이 망한 뒤 소련 모스크바대로 무작정 유학을 떠났다. 당시 소련은 한국과 수교 전이었는데 사회주의 국가에서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 모스크바대 유학 시절 북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나?
“유학 시절 모스크바 시내의 평양식당을 자주 찾았다. 당시에는 현지에 한국식당이 생기기 전이어서 한국기업들의 상사 직원들도 많이 찾던 식당이었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북한인들을 만나게 됐다. 모스크바대 대학원에서는 정치학을 공부했는데 개인적으로 한국전 관련 자료 수집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소련의 국립문서보관소(아르히브)나 지역을 돌면서 북한이나 고려 이주민 역사 등 관련 문서들을 수집하는 데 골몰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그에게 직접적인 북한투자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미국생활이었다. 러시아 현지 사정 등으로 3년여의 모스크바 유학생활을 접고 그는 1994년 미국 LA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국인 교포 몇 사람과 국제경영연구원이라는 사회주의권 투자자문회사를 만들었다. 4명의 동업자 가운데 그는 북한과의 인연 때문에 대북 관련 컨설팅을 맡았다. 아이엠알아이는 사실 국제경영연구원의 이니셜인 IMRI(International Management Research Institute)에서 따온 것이다.

─ 대북투자 컨설팅회사를 만들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미국으로 간 뒤 선배 소개로 재미 경제학회에 참석하게 됐는데 당시 교포들이 소련이나 동구권 등에 판로를 개척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만든 것이 국제경영연구원이다. 그때가 1994년 8월의 일이다. 나는 북한관계를 맡게 됐다. 1995년에는 연구원 주최로 미국에서도 처음으로 북한투자 관련 세미나를 열었는데 큰 호응을 얻었다.”
LA에서 열린 대북투자 세미나에는 북한 UN대표부의 한성렬 공사를 비롯해 미 국무부 한국과장 데이비드 브라운, 미 국무부 대북한정책 자문역이었던 오공단 박사 등 내로라하는 북한통이 대거 참석했다. 당시 미국에서도 북한관련 세미나는 군축관련 세미나가 열렸을 뿐 대북경협은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이미 공산권과의 교역경험을 가진 그에게 대북투자 관련 세미나는 엄청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 당시 대북투자 세미나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가.
“국제경영연구원을 설립한 다음해인 1995년 2월초 여섯명의 투자조사단을 이끌고 평양을 처음 방문하게 됐다. 그때 북한쪽 경제계 인사들을 처음 만나 안면을 익혔다. 투자조사단이 평양을 다녀온 뒤로는 홍콩에서 다시 북한 인사와 함께 공동으로 북한투자 설명회를 갖기도 했다.”

─ 북한을 방문했던 투자조사단 중에는 누가 있었나.
“그때는 시장조사차 갔는데 미국인 2명과 한국교포 4명이 동행했다. 임가공 형태의 의류업과 평양축전으로 관심이 높아진 북한여행업, 광물쪽이 갔는데 현장을 둘러보고 관련 인사들을 만났다. 당시에도 임가공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후로도 개인적으로는 북·미간에 직통전화 개설 때도 참석하게 됐다.”
1996년 귀국한 그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그해 7월 아이엠알아이 컨설팅사를 국내에도 설립했다. 그러나 분위기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냉랭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대북투자자문은 정부가 하는 것이지 민간이 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냉전시대의 스파이나 브로커 취급을 당했다. 북에서 사업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의혹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7년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국내기업 대북투자 컨설팅하다 떠맡은 대북사업

“한 컴퓨터회사가 북한 진출에 관심을 가져 컨설팅해 주고 북측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회사 관계자들과 함께 평양에 다녀오게 됐어요. 평양에서 모니터를 생산하기로 했는데 그쪽의 열악한 사정을 보고 난 뒤 업체가 갑자기 중국쪽으로 투자처를 바꿔 버린 거예요. 결국 저로서는 책임을 져야 할 입장이었고 북측의 신뢰를 저버릴 수 없었어요. 한동안 고심하다 결국 제가 그 약속을 이행하기로 결심하게 된 거죠. 마침 경북 상주에 부도난 TV제조업체가 있었는데 그 회사를 인수해 모니터 제조업으로 업종전환한 뒤 대북투자도 실행에 옮기에 된 것입니다.”

제조업 분야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던 그로서는 그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대북투자자문의 제1원칙으로 삼았던 리스크를 최대한 줄이면서 투자방식에서 묘안을 찾아갔다. 북한과 다시 투자계약을 맺은 것은 1998년 4월, 본격적인 사업 시작은 11월부터였다. 마침 그가 대북투자사업을 본격화했던 시기는 기업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했던 IMF한파가 몰아닥친 와중이었다. 그로서는 은행들로부터 신용불량 딱지도 안풀려 은행대출은 생각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결국 인수한 회사는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고 직원들도 직장을 옮겨갔다.

─ 너무 무모한 결정 아니었나?
“실제로 무모했다. 그러나 대북사업의 생명은 북측에 신뢰감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이용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제조업을 하면서 대북투자자문을 종합점검할 수 있게 됐다. 투자자문, 대북사업 연계, 사업관리까지 성공적인 대북투자 모델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부족한 자본으로 직접 사업하려다 보니 리스크를 줄여야 했고, 그래서 사업을 안정적으로 추진했다.”

─ 아이엠알아이의 투자 방식은 어떤 것이었나?
“북한쪽은 건물과 인력을 제공하고 우리는 돈 대신 유휴설비를 제공하는 제3의 방식을 택했다. 결국 투자는 합영 방식이지만 임금 지불은 위탁 임가공 방식을 택했다. 남쪽에서는 생산설비 외에도 생산주위환경, 원부자재 등을 제공하지만 경영권은 북측이 가졌다. 공동경영을 하지 않으니 경영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없었다. 임금 대신 임가공비로 결제해 주기 때문에 세금도 없었다. 우리 설비를 사용해 북측은 반드시 우리쪽 주문 물건만 생산해 내게 돼 리스크를 줄일 수 있었다. 우리로서는 안정적으로 물량을 공급받았고, 북한으로서도 생산물량을 늘리면 늘릴수록 더 많은 임가공비가 들어가니 좋았다.”

─ 아이엠알아이의 파트너가 됐던 대북창구는 어디였나?
“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회장 정운업) 소속의 삼천리총무역회사다. 민경련은 한국 기업들과의 경협을 위해 만든 당 조직으로 아태평화위원회를 통한 사업이라도 결국 실무적 사업은 민경련에서 처리하게 된다. 민경련 산하에 네개 회사가 있는데 개선무역총회사와 삼천리총회사·광명성총회사·금강산총회사다. 우리는 삼천리총회사쪽과 손잡고 일해왔다. 정운업 민경련 회장도 당초 삼천리총회사 사장 출신이다.”

─ 지금까지 들어간 투자금액은 어느 정도인가.
“모두 220만달러가 들어갔다. 그러나 한꺼번에 투자된 것이 아니라 10만달러, 50만달러 등 시간적인 편차를 두고 들어갔고 대부분 유휴설비로 투자됐다. 북측에는 특히 현지에서의 직접기술지도를 요구했는데 그래야만 고부가가치산업을 할 수 있다고 북측을 설득했다. 품질관리 측면에서도 기술자·종업원에게 직접 기술지도가 이루어져야 했다.”

아이엠알아이는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그뒤로도 4~5개의 업체를 추가로 북한에 진출시켰다. 대표적인 기업이 성남전자공업(카세트테이프 메이커)·세광테크론전자(전자코일 제조업체·메디슨(의료기기 제조업체) 등이다. 이 가운데 성남전자는 아이엠알아이가 투자한 평양전자제품개발회사에 별도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다. 세광의 경우도 이 회사에서 도보로 불과 5분 거리에 위치해 공동투자단지 형태를 띠고 있다. 현지 기술지도를 위해 국내 기술자들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도 나머지 세 회사의 공장까지 돌면서 기술지도를 대행해 주고 있다.

종업원과 평양시내 가라오케·당구장 다니며 친밀감 쌓아

“회사마다 40일에 한차례씩 평양을 방문하게 되는데 업무를 공동으로 봐주고 있어 실제로 한달에 두차례 현지를 방문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성남전자도 우리회사보다 6개월 뒤에 평양에 들어왔지만 벌써 열네차례나 현지공장 기술지도 방문을 했어요. 이밖에도 우리가 컨설팅 한 기업들은 물류비용 절감을 위해 컨테이너 선적도 공동으로 하고, 생산공장 내 집하작업도 공동으로 해 지게차 한대로 업무를 처리할 정도입니다. 진출기업 간에 협력관계를 강화해 비용과 리스크를 줄이게 된 것이죠.”

현지 기술자들과 여종업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기술지도가 계속되면서 북한 근로자들과의 인간적인 교감도 깊어졌다. 기술지도가 끝나면 종업원들과 평양 시내 운동장을 빌려 축구·농구경기를 벌이고, 즉석 노래자랑과 함께 맥주파티를 벌이기도 할 정도였다. 종업원들에게도 남쪽 상주공장과 똑같은 근무복을 지급해 일체감을 높이기도 했다. 아이엠알아이는 현지공장의 작업환경 개선에도 관심을 기울여 종업원들로부터 큰 호감을 샀다.

“북한을 방문하는 기술자들은 대개 20∼30대인데 현지 여성종업원들도 ‘오빠’라고 부르며 친근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시간이 나면 북한 기술자들과 평양 시내의 가라오케나 당구장에 같이 다니면서 스스럼없이 어울릴 정도예요.”
유회장은 “우리 직원들 가운데 지난 2년 동안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직원이 35명에 달한다”고 말했다.

─ 평양공장의 인력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
“평양공장 기술직과 종업원들은 모두 120명에 달하는데 기술수준이 상당히 높다. 20여명의 기술자들은 대부분 김일성대와 김책공대 출신 엘리트들이고 여종업원들도 대부분 18세∼20대 초반인데 전문대 이상 대졸 출신들이다.”

─ 북한체제에서는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북쪽 사람들은 외국 투자기업에서 일하기를 꺼린다. 일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동안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했다. 사소한 말 한마디부터 조심하면서 우리의 입장도 이해시켜갔다. 작업환경도 평양 시내의 어떤 공장보다 깨끗하고 편리하게 개선했다. 북쪽은 특히 겨울 날씨가 엄청나게 추운데 전기사정이 안좋아 난방이 안된다. 그런 것부터 해결해 주었다. 전기사정으로 난방기를 주어도 사용이 어려워 아이디어를 짜내 공장 내부를 발열전구로 바꿔 주기도 했다.”

─ 초창기에는 많았던 제품 불량률을 어떻게 줄일 수 있었나?
“초기에는 불량률이 30%에 달해 당혹스러웠다. 결국 시간대별로 생산제품을 체크하면서 그 원인을 찾아냈는데 출퇴근 시간대에 생산된 제품의 불량률이 높은 것을 발견해 냈다. 북한의 잦은 정전사태 때문이었다. 출퇴근시간 평양 시내의 전차와 전기버스 운행이 늘면서 전기사용이 집중돼 정전이 잦았다. 결국 북측과 협의해 생산라인 가동을 출퇴근 시간을 제외한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에 집중시켰고 그뒤로 불량률은 현저히 줄었다. 북측으로서도 불량 제품에 대해서는 임가공비 지급을 안하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 투자계약 이후 Out-Put이 굉장히 빨리 나온 것 같은데….
“본래 모니터 생산과 관련해 2002년까지 단계적으로 투자하기로 했지만 속도가 빨라졌다. 그래서 2차로 스티로폼공장을 평양에서 하게 됐는데 수입 증가와 비용절감 효과까지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원부자재를 모두 조달하다 보니 스티로폼의 경우 물류비용 부담이 컸다. 현지생산된 물량은 우리뿐만 아니라 이미 진출해 있는 삼성·LG공장에도 납품하고 북측 내수시장까지 노려볼 작정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사업보다 시너지를 높일 수 있는 아이템을 선택하는 쪽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평양공장에서 PCB 어셈블리 생산이 일정 궤도에 오르자 아이엠알아이는 국내 외부업체에 주문해왔던 생산량을 차츰 북쪽으로 옮겼고, 결국 최근에는 17인치 모니터 완제품 생산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대기업들의 공격적인 대북사업 진출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99년초 현대가 금강산 관광사업을 하면서 현금이 북으로 많이 갔어요. 북측이 갑자기 우리에게도 더 많은 협조를 요청해 왔어요. 우리는 그것은 어렵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방문을 막는 거예요. 그래서 사업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끌려가다가는 리스크가 너무 커지기 때문에 아예 사업을 포기하고 연락을 끊었죠. 그런데 석달 뒤 북측에서 먼저 연락이 왔어요. ‘김선생, 왜 안들어오시오’. 그뒤로 다시 원상복귀됐어요. 그 과정에서 북측과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어요. 우리가 추천해준 남측 회사에 한달만에 초청장을 내주는 등 투자가 용이해진 것입니다.”

평양공장의 저렴하고도 안정적인 부품공급은 아이엠알아이에 기업인수 2년만에 국내 모니터 제조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해주었다. 제조원가 절감을 통한 저가 모니터 보급전략뿐만 아니라 7개의 자체브랜드 개발, TFT─ LCD 본격생산이 말해주듯 기술력도 업계와 시장으로부터 인정받게 됐다. 지난해 매출액과 순익은 각각 169억원, 6억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 실적도 올해의 매출목표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회사는 올 상반기중에 이미 150억원의 매출을 기록, 지난해 매출액에 육박했고 연말까지는 850억원의 매출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국내 PC모니터업계 5위권 진입, 유럽 진출 박차

매출 구성도 지난해 수출이 1,500만달러를 기록해 내수와 수출 비중이 9대 1을 기록했지만 올해는 수출 비중이 오히려 내수를 크게 앞질러 2대 8로 역전될 것으로 예상된다. 회사는 지난 4월 유럽 최대 유통업체인 독일의 인그램 마이크로사와 연간 50만대, 금액으로는 1억달러 어치의 모니터를 자사 브랜드인 ‘타이푼(태풍)’을 붙여 공급키로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초고속 성장과정에서 아이엠알아이는 회사 자체 내에 남북경협팀을 별도로 가동하면서 대북사업에도 가속도를 붙여가고 있다. 경협팀은 팀장인 조봉현(경제학 박사) 이사 등 박사 3명을 포함해 8명의 연구인력으로 구성돼 있다. 이는 웬만한 대기업의 경협팀보다 내실있는 규모다. 아이엠알아이는 앞으로 2003년까지의 대북 플랜을 이미 짜놓고 사업들을 단계별로 진행중이다.

유회장은 이와 관련해 “북한의 저임금 노동력을 이용한다는 그동안의 소극적인 전략에서 벗어나 소프트웨어나 에니매이션 등 북한의 앞선 기술력을 활용할 수 있는 쪽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미 아이엠알아이는 3D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을 제작중에 있고 북한이 이미 개발한 자동번역 프로그램 등을 상업화하기 위해 일본 조총련계 기업과 합작회사를 세운다는 계획도 진행중이다.

─ 구체적으로 어떤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고 있나?
“북한의 소프트웨어사업은 기술적으로 세계적인 수준이다. 알려진 대로 음성인식프로그램, 번역프로그램, 은별바둑프로그램, 해상관측 분야 등 다양하다. 회사는 곧 일본업체와 합작법인 설립을 통해 북한의 기술력과 일본의 가공기술, 한국의 자본이 결합한 새로운 투자모델을 시도할 예정이다. 10월중 관련제품을 출시할 예정으로 한국·일본시장을 비롯한 해외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번역프로그램도 완벽한 수준인데, 2002년 월드컵에 대비해 핸드폰 모니터상에 실시간 통역형 번역이 가능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를 위해 조선컴퓨터센터(KCC)와 김일성종합대학·평양프로그램센터 등에 개발 용역을 주었다.”

─ 북한의 3차원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국내에서도 관련장비를 보유한 업체가 영구아트센터와 게임소프트지원센터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슈퍼컴퓨터 반입이 안되는 북한은 자체적으로 펜티엄급 컴퓨터 50대를 연결해 슈퍼컴퓨터를 만들었다. 얼마 전 우리가 영화 타이타닉을 데모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게 했는데 놀라운 수준이었다. 보완해야 할 점도 있지만 1분 제작에 20억원이 든다는 이 영화를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기술력이 놀라웠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소프트웨어산업 등 벤처에 대한 관심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얼마 전 중국 방문 때도 베이징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촌’에 있는 컴퓨터 생산공장을 방문한 적이 있고, 평양 대동강구역 안에 첨단 기술단지인 ‘대동강밸리’ 조성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앞으로의 대북투자 방향은 어떻게 가야 한다고 보는가.
“북한의 노동력을 활용하기 위해 노동집약적 업종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단순노동력을 활용한 사업은 북한이 당장 돈 때문에 받아들일 지는 몰라도 지속하기가 어렵다. 가장 좋은 접근 방법은 우리가 없는 기술분야를 대북사업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분야, 즉 기술집약적인 분야로 가야 한다.”

─ 아이엠알아이도 물류비용으로 애를 먹고 있다고 들었는데….
“육로가 개통되면 문제없겠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현재 우리 회사는 컨테이너 선박을 이용하고 있는데 물동량이 40%로 워낙 적어 부담이 크다. 그러나 교역량이 늘어나면 물류비 비중도 줄어들 것이다. 대북투자업체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당분간 정부가 물류보조비 지원도 고려해야 한다. 기업간 공동진출을 통해 물류비 절감을 꾀할 수도 있다.”

─ 대북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대북사업뿐 아니라 비즈니스에서는 신뢰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한번 망한 전력 때문에 신뢰 회복이 굉장히 힘들었다. 북쪽과도 할 수 있는 것은 하지만 과다한 요구는 못한다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신뢰관계에는 문제가 없다. 약속만큼은 확실히 지켜왔다. 최근에는 북측이 작업과정에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는 공문을 보내와 나 자신도 놀란 적이 있다.”

─ 대북사업을 하면서 보람있는 점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 통일까지 가는 데 이산가족 문제 등의 의지가 없으면 그 다음은 누가 어떤 의제를 가지고 대북교류를 하겠는가를 고민해 보았다. 결국 우리의 노력이 없으면 또 다시 주변 열강에 의해 북한은 선점될 수밖에 없다. 이념이 틀리니 안만나고, 만나도 돈이 안되니 안만나면 통일의 길은 요원하다. 나름대로 사명의식이 필요하다.”
(월간중앙 2000.8)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