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원(한국민권연구소 상임연구위원)


1. 도대체 무엇을 시인한 것인가?

10월 16일 미국의 국무부 대변인, 백악관 대변인 등은 각각 지난 3일 미국의 특사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에서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다는 발표를 했다. 북은 이 사실 자체를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은 제네바 핵합의를 파기한다느니, 이북에 대해서 경제 제재를 한다느니 하고 있다. 북에서는 어떤 말을 했길래 미국은 이렇게 호들갑인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이 시인한 것은 `핵무기의 보유`가 아니라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이다. 미국은 이것을 두고 북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하고 있다며 자기들도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겠다는 것을 언론에 흘리기도 했는데 북이 어떤 맥락에서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특사는 북에 가서 핵무기, 미사일, 대량살상무기에다가 인권 문제등 이른바 <우려사항>들에 대해서 북에 대해 "심히 오만하고 무례하게" 강박하려 들었고 북은 이에 대해 "당신들이 대북강경정책을 포기 하지 않고, 제네바 합의 준수의 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핵개발을 할 수 밖에 없다. 사실 핵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좋은 말할 때 핵선제공격 의도를 핵심으로 하는 대북강경정책을 철회하고 우리의 자주권을 존중하길 바란다. 그래야 우리도 핵개발 프로그램을 취소할 수 있다."고 대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미국이 북에 가서 확인한 것은 `북의 핵개발 프로그램의 존재=제네바 합의의 위반`의 증거를 찾은 것이 아니라 북이 그동안 고수해왔던 원칙적 입장이였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북의 핵개발 단계가 어느 정도인지 현재로서 알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이북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했는지 여부 역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미국의 특사 켈리는 방북할 때부터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와 관련된 증거를 가져갔다고 했는데 그 증거의 신빙성 문제는 둘째 치고라도 그것이 `핵개발이 어느 단계까지 왔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이고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것은 북이 먼저 나서서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는 조치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단순히 전력공급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과의 정치-경제관계의 정상화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자주통일의 유리한 환경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합의했던 것이 제네바 합의였다. 그렇기 때문에 북은 최대한 제네바 합의라는 수단으로 미국을 압박하며 목적을 달성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왜 하필 지금이였을까?

미국은 예상하지 못했던 이북의 강경태도에 당황하고 있다.
미국이 북에 `증거`를 들이대며 핵개발을 시인하라고 강박하자 북은 대북강경정책 철회의 요구와 함께 그것을 `원칙적 입장에서 시인`했으며 동시에 `더 강한 무기`도 있다고 미국을 공박했던 것이다.

북의 이러한 공세에 미국이 당황했다는 것은 첫째 켈리가 방북한 것이 10월 3일에서 5일까지였는데 북이 핵개발을 시인했다고 공표한 것은 10월 16일이였다. 북이 핵개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미 98년부터 알고 있었다1)는 미국이 10일이나 지나서야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린 것은 북의 공세에 당황한 미국이 대책을 논의하고 수립할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뜻한다.

둘째, 미국의 대응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처음에는 경제제재를 하겠다고 했다가 아직 그럴 계획이 없다고 하기도 하고 제네바 핵합의를 파기하기로 했다고 언론에 흘렸다가 국무장관은 그럴 계획이 아직 없다고 하는 등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는 북에 비해 그 움직임이 너무도 분주하다. 이 역시 미국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주동적으로 만든 것이 이북이란 말인데, 북은 왜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으며, 시점은 하필 지금이여야 했는가?

제네바 핵합의 문제는 2003년을 전후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이 되어야만 할 문제였고 2000년 말 제네바 합의의 최종 목적인 평화협정 직전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2001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경수로 건설을 화력발전소로 대체한다느니 하면서 제네바 핵합의 자체를 부정하려 들었고 2002년 들어서는 `선제공격` 운운하며 북을 압살하려들었다. 북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국의 이러한 대북강경정책은 오로지 `채찍`으로만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북은 과감하게 `핵개발 프로그램 존재의 시인`과 함께 `더 강력한 무기의 존재`로 미국을 압박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이 있다면 `북의 핵개발`문제는 미국이 언젠가는 걸고 넘어질 문제였다는 점이다. 미국은 당치도 않은 증거라도 일단 잡으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데2) 93년의 영변 핵시설이라든지 앞서 언급했던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등의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를 미국이 놓칠 리가 없다. 물론 미국을 대화로 나오게 만드는 미끼의 차원에서 준비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왜 하필 북은 지금의 시점을 선택했을까?

첫째, 미국을 포위고립하는 외교적 포석을 깔아놓은 조건이었다.
미국의 대북강경정책에 대해 북은 남북관계의 급진전과 전방위 외교를 통해 거꾸로 미국을 고립시켜나갔으며 그 일련의 행보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었던 것이 지난 7월 25일 서해교전에 대한 유감표명과 남북장관급 회담 재개를 기점으로 전개되었던 조러 정상회담, 조일 정상회담 및 신의주 특구 지정의 전격 발표 등의 조치들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남북관계의 급진전과 조일 정상회담은, 지난 수십년 간 자신을 고립압살시킬 목적으로 구축되었던 한미일 공조체제 균열의 시작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북은 미국에게 가할 `채찍`의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놓고 특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미국으로 하여금 선택을 강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미국이 대북 전쟁계획을 쉽게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시점이 지금이다.
미국의 대북 전쟁계획이 실행에 옮겨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군사기술적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94년 전쟁계획을 수립했다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중 하나는 지하에 은폐된 이북의 전략시설들에 대해 효과적 타격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둘째, 국제적인 여론이 대북전쟁계획을 지지해야 한다. 그 중 핵심이 일본과 한국의 지지이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은 모두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이야기하고 있다. 셋째, 미국이 한반도라는 하나의 전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공식적으로 윈-윈 전략을 폐기한 상태에서 만약 미국이 대북 전쟁계획 실행 시기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이라크라는 다른 하나의 전선에서 전쟁을 마무리한 후인 내년일 것이다.

현재 위의 세 가지 조건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고 그렇기 때문에 북은 지금이 미국을 압박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구성원들 중 일부강경파들이 대북 선제공격을 제안했으나 그것을 채택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3. 어떻게 될 것인가?

현재 미국은 당황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나름대로 대책을 세운 후 대북 공세를 펼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올해 초 동아일보를 통해서 알려졌던 `북한붕괴 시나리오`대로 미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점인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할지가 의문이다.3)

첫째, 미국은 북의 `핵개발계획`을 포기시키기 위해 러시아와 중국의 경제교역을 중단시키겠다고 발표했고 실제로 미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 볼튼은 중국과 러시아로 떠났는데 이는 `북한붕괴 시나리오`의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북이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의 의도가 쉽사리 먹혀들지 않을 듯 보인다.

둘째, 미국은 `북한붕괴 시나리오`의 마지막 단계인 제네바 핵합의 파기를 언론에 흘리고 있는데 이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제네바 핵합의 파기를 선언한다고 해서 북이 손해볼 것은 없다. 일단 제네바 핵합의는 미국이 이미 어긴 상태이다. 다음으로 북은 미국의 경수로와 중유 지원에 대한 기대를 오래전에 버렸으며 전력문제를 자체의 중소형 발전소와 러시아의 지원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제네바 합의에 언급되어 있던 정치경제관계의 정상화문제이다.
경제관계의 정상화란 미국이 지금까지 지속해온 북에 대한 경제봉쇄를 푸는 문제를 의미하는데 북은 그러한 봉쇄로 인한 최악의 경제난을 극복하며 강인한 체질을 만들어 놓은 상태이며 앞으로 미국의 경제봉쇄와 무관하게 경제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관계의 정상화는 현재의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조미 평화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전쟁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대북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 선제공격을 운운하더라도 북은 `선군정치`를 통해 막강한 군사력을 준비함으로써 `평화보장`을 위해 미국에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주변국들이 제네바 합의가 준수되는 것을 원하고 있는 상황 역시 미국에게 불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대북 경수로 지원사업을 담당하고 있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에 가장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한국과 일본의 케도 관계자는 "경수로 지원 사업 중단 여부는 케도에서 결정할 문제이지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렇듯 미국은 수세적 입장에 몰려 `붕괴시나리오`라는 묵은 솜방망이를 허겁지겁 휘두르고 있는 꼴이다.

종합해 보건대 미국은 쉽사리 제네바 합의를 깨지 못할 것이다. 만약 제네바 합의가 깨진다면 그것은 두 가지 경우 중 하나이다.

첫째, 제네바 합의를 대체하는 더 높은 수위의 조-미 정치협상 결과가 나오는 경우이다.
미국이 대북강경정책을 철회하고, 제네바 합의 미이행에 대한 보상을 하며 나아가 제네바 합의에 담겨있는대로 정치-경제적 관계 정상화을 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합의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둘째, 미국이 제네바 핵합의에 대해 일방적인 파기선언을 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북은 영변 흑연감속로를 재가동하며 플루토늄의 봉인을 뜯어버리게 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핵개발을 끝냈을지도 모르는 북에 대해 전쟁을 선포하거나 혹은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있는 상대와 정치협상을 해야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미국은 갈팡질팡 하면서도 대화로 가닥을 잡아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를 특사로 또 파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미국에게도 바람직하다. 북에서는 계속해서 `제네바 합의` 고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이 대화로 나오지 않을 경우 북은 `더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를 선보일 것이며 이렇게 되면 미국은 위에서 언급한 제네바 합의 파기의 두 번째 경로로 갈 수 밖에 없다.

`핵보다 강력한 무기`를 보유한 나라와 전쟁을 하든지, 아니면 제네바 합의도 지키지 못하고 `대량살상무기 확산`도 막지 못한 불리한 조건에서 정치협상을 하든지 미국은 그 선택을 이라크 전쟁 이전에 할 것이다.


<주석>

1) 미국 대통령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의 발언. 연합뉴스 2002.10.21.

2) 1998년 금창리 핵시설 문제도 미국 국방정보국(DIA) 소속의 인공위성 사진 촬영을 증거로 미국이 이북을 압박했으나 인공위성이 찍었다는 굴 속에는 핵시설은커녕 아무 것도 없었음이 드러났다.

3) `시나리오`를 처음 접하는 독자를 위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북한붕괴 시나리오`는 과거 소련을 붕괴시킨 선봉장들이었던 부통령 체니, 국방장관 럼스펠드, 안보보좌관 라이스가 최고책임자가 되어 입안한 것으로서 3단계로 이루어져있다고 한다.

첫 단계에서는 북에 대해 `수사(修辭)적 공격`을 하며, 두 번째 단계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지원과  대북식량지원을 중단시키고 마지막으로 제네바 핵합의를 파기하여 부시집권 2기쯤인 2005년 이후에는 북 내부의 `반란세력`을 동원하여 최종적으로 `붕괴`시키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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